2012년 총선과 대선을 1년여 앞둔 지금, 국내 주요 정당과 차기 대권주자들의 유례없는 이념 색깔 조정이 한창이다.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수준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따뜻한 보수’를 표방하며 진보 친화적인 ‘복지’를 핵심 어젠다로 내세웠다. 과거 한나라당 내 개혁파로 인식되던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 반대로 각각 ‘보수적 안보 행보’와 ‘무상복지와의 전면전’을 감행했다. 민주당에서는 중도 성향의 손학규 대표가 ‘보편적 복지’를 내걸고 당의 좌향좌 행보를 이끌고 있고, 정동영 최고위원은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공약’까지 차용해 ‘대담한 진보’를 내세웠다. 반면 진보정당 통합론을 주창하는 국민참여당 유시민 신임 대표는 오히려 복지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을 시도하는 중이다.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어젠다
이처럼 정치권 내 이념 색깔 조정 작업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이념 트렌드 변화와 무관치 않다. 다만 정당과 정치인마다 조정 작업에 편차를 보이는 것은 국민의 이념 변화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일단 국민의 이념 성향, 즉 이념무드(ideological mood)의 변화 방향에 대한 진단에서 여야 간 인식 차가 크다. 여당의 경우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냉담해진 대북인식을 근거로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주장하는 경향도 있고,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노선’ 및 ‘공정사회론’에 대한 지지를 통해 중도 이념과 정책을 강조하는 흐름도 있다. 반면 야당에서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표출된 ‘무상급식’ 지지를 근거로 진보 노선을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그렇다면 실제 국민의 이념 트렌드 변화는 어떨까. 이를 살펴보려면 이념무드 개념을 통해 우리 국민의 이념 변화 추세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 학계에서 오랜 기간 이론적, 경험적 연구가 축적된 이 개념은 ‘국정지지율(presidential approval)’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과 함께 거시적 차원에서 ‘한 사회의 정치인식 트렌드’를 측정하는 지표로도 쓰인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조사대상 국민 스스로 자신의 이념 성향을 평가한 주관적 지표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0점(최하단)이 ‘매우 진보’, 5점이 ‘중도’, 10점(최상단)이 ‘매우 보수’다. 동아시아연구원(EAI) 여론분석센터가 이 같은 기준으로 2002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조사한 결과, 최근 한국 국민의 전반적인 이념무드는 진보화도, 보수화도 아닌 중도화다(그래프 1 참조).
노무현 정부 초기 잠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지만, 탄핵 직후인 2004년 4월 조사에서는 야당 탄핵공세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하면서 진보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탄핵 이후 정부와 여당이 경제위기 대처보다 국가 정체성 논쟁과 대연정 논란에 집중하면서 다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 2005년 12월 조사에서 이념무드 평가 점수는 평균 5.3점으로 2004년 4.6점에 비해 보수 쪽으로 이동했다. 2006~2008년 3년간 지방선거와 대선, 총선을 거치면서 이념무드 평균 점수는 5.5점까지 치솟았다.
일관성 없는 ‘상충현상’ 가속화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광우병 촛불 시위, 노 전 대통령 서거 등으로 국민 이념무드가 보수화에서 벗어나는 ‘이념적 유턴 현상’이 나타났다. 이념무드 평균 점수가 2009년 12월 5.2점, 2010년 12월 5.0점 등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 2월 조사에서는 다시 5.1점으로 중도 수준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를 보면 현 정국을 보수화 정국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진보적 이념으로 균형추가 넘어간 것도 아니다. 전 정부와 구(舊)여권에 대한 정치적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적지 않음에도 이념적 균형 상태를 깨는 상황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국민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주장한다. 정당과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 정치 엘리트 사이의 이념적 양극화가 국민 갈등으로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일면 맞기도 하지만, 일면 틀리다. 국민 내부의 진보와 보수 간 이념적 간극은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모두 정권 교체 초기에 진보와 보수간 이념적 거리가 확대돼 이념 양극화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임기 중반 이후에는 다시 좁혀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한국사회의 이념적 갈등은 양극화가 악화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대로 일관된 수렴 현상을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초기 탄핵이나 이명박 정부에서의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처럼 정치권의 갈등이 크게 증폭돼 이념적 양극화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진보와 보수 간 ‘이념적 균형 잡기(ideological balancing)’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기존의 ‘진보=친노동=복지=친북=반미’ ‘보수=친자본=성장주의=반북=친미’라는 이분법적 이념 균열이 약화하고, 그 대신 서로 모순돼 보이는 가치와 정책 선호가 공존하는 상충적 태도가 강화됐다는 점이다. 기존의 주류 선거 이론에서는 여러 이슈에 대한 정책 선호가 특정 이념 성향에 맞게 일관성을 보이는 층은 스마트한 국민이며, 이러한 일관성이 없는 다수의 국민은 무지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이론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선 보수주의자가 반미적 태도를 보이거나 복지 노선을 우선하고, 반대로 진보주의자가 친미와 성장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정치적 무지의 결과로 해석된다.
이처럼 과거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공존할 수 없는 가치가 충분히 공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바로 ‘상충적 유권자 이론’이다. 다시 말해 노동 친화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성장주의 노선을 선호하고, 성장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반대하거나, 미국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북한에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상충적 유권자 이론의 문제의식이다.
EAI·한국리서치는 지난해 10월 북한, 미국, 성장 및 복지, 정규직 확대와 처우, 기업 감세 등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에 대한 국민 선호도를 조사했다(그래프 2 참조). 2.5점이 중간 값이고, 이보다 작고 1점에 가까울수록 진보적이다. 2.5점보다 크고 4점에 가까울수록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이 조사결과를 보면 북한 주적 명시나 공무원의 정치활동 허용, 한미동맹, 한미FTA 등 특정 이슈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시각차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실제 선호하는 정책 내용이 과거의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한미관계를 묻는 질문에 보수층의 응답 평균은 3.16점으로 강한 동맹 관계를 희망한 반면, 진보층 평균은 2.72점에 그쳤다. 하지만 진보층 역시 자주 국방보다는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많아 다른 쟁점에 비해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한미FTA에 대해서도 진보층 응답 평균은 2.81점으로 보수층 못지않게 조속한 시행을 선호했다. 반대로 보수층에서는 복지에 대한 선호도가 과거보다 높아졌고,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한미관계 인식, 성장 및 복지 이슈는 진보와 보수층 내부에서 상충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다. 2002년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집회 당시 ‘바람직한 한미동맹’에 대한 질문에 ‘탈미 자주’라고 응답한 사람은 28.1%였던 데 반해,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20.4%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 위협이 커졌던 2004년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36.9%로 늘었고,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인 지난해 11월 조사에서는 과반수에 가까운 48.6%까지 상승했다. 반대로 탈미 자주를 선호하는 응답은 18.1% 수준까지 하락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강화되면서 한미동맹의 가치가 크게 확산된 결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진보층에서도 마찬가지다. 2006년 진보층의 41.1%가 탈미 자주 외교를 선호한다고 응답했지만, 지난해 11월 조사에서는 26.7%로 줄었다. 반대로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30.2%에서 45.3%까지 급상승했다.
성장 및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보수층에서 상충적 태도가 증가했다. 2006년 조사에서는 보수층 응답자의 61.5%가 복지보다는 성장을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2010년에는 49.1%로 줄었다. 반대로 성장보다는 복지가 우선이라는 응답은 38.5%에서 50.9%로 상승했다. 그동안 진보층의 절반 가까이가 진보적 한미동맹론자로 바뀌었고, 반대로 보수층의 과반이 보수적 복지주의자가 된 셈이다.
각 정당 및 차기 대권주자들은 이념 성향이 강한 집단보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상충적 국민, 즉 유권자의 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더 이상 ‘진보=자주=복지 대 보수=동맹=성장’이라는 논리에 기초한 정책은 매력적이지 않다. 유권자의 태도 변화에 맞는 정책을 얼마만큼 신속하게 내놓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여론의 반응성과 책임성에 주목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중도실용노선이나 공정사회론이 진정성 여부를 떠나 역대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이끌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또 상충적 태도를 가진 유권자는 특정 진영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균형 투표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떤 정치세력이든 밀어붙이기식 정치 행태는 상충적 유권자의 지지 이탈은 물론,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독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이념적 선명성이나 강력한 정책적 카리스마보다 여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응성과 책임성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정책 내용에 대한 지지뿐 아니라, 소통 의지와 방식도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상대적으로 높은 국정지지율을 유지하면서도 세종시 수정안 등 핵심 국정과제를 추진하지 못한 이유로 소통의 부재를 지적한 여론이 높았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결국 교조적 인식 틀에서 벗어나 ‘이념적 유연성’ ‘화합의 리더십’ ‘소통 능력’ 이 세 가지가 다가오는 정권 교체기의 핵심 키워드이자 핵심 가치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따뜻한 보수’를 표방하며 진보 친화적인 ‘복지’를 핵심 어젠다로 내세웠다. 과거 한나라당 내 개혁파로 인식되던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 반대로 각각 ‘보수적 안보 행보’와 ‘무상복지와의 전면전’을 감행했다. 민주당에서는 중도 성향의 손학규 대표가 ‘보편적 복지’를 내걸고 당의 좌향좌 행보를 이끌고 있고, 정동영 최고위원은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공약’까지 차용해 ‘대담한 진보’를 내세웠다. 반면 진보정당 통합론을 주창하는 국민참여당 유시민 신임 대표는 오히려 복지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을 시도하는 중이다.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어젠다
이처럼 정치권 내 이념 색깔 조정 작업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이념 트렌드 변화와 무관치 않다. 다만 정당과 정치인마다 조정 작업에 편차를 보이는 것은 국민의 이념 변화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일단 국민의 이념 성향, 즉 이념무드(ideological mood)의 변화 방향에 대한 진단에서 여야 간 인식 차가 크다. 여당의 경우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냉담해진 대북인식을 근거로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주장하는 경향도 있고,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노선’ 및 ‘공정사회론’에 대한 지지를 통해 중도 이념과 정책을 강조하는 흐름도 있다. 반면 야당에서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표출된 ‘무상급식’ 지지를 근거로 진보 노선을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그렇다면 실제 국민의 이념 트렌드 변화는 어떨까. 이를 살펴보려면 이념무드 개념을 통해 우리 국민의 이념 변화 추세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 학계에서 오랜 기간 이론적, 경험적 연구가 축적된 이 개념은 ‘국정지지율(presidential approval)’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과 함께 거시적 차원에서 ‘한 사회의 정치인식 트렌드’를 측정하는 지표로도 쓰인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조사대상 국민 스스로 자신의 이념 성향을 평가한 주관적 지표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0점(최하단)이 ‘매우 진보’, 5점이 ‘중도’, 10점(최상단)이 ‘매우 보수’다. 동아시아연구원(EAI) 여론분석센터가 이 같은 기준으로 2002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조사한 결과, 최근 한국 국민의 전반적인 이념무드는 진보화도, 보수화도 아닌 중도화다(그래프 1 참조).
노무현 정부 초기 잠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지만, 탄핵 직후인 2004년 4월 조사에서는 야당 탄핵공세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하면서 진보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탄핵 이후 정부와 여당이 경제위기 대처보다 국가 정체성 논쟁과 대연정 논란에 집중하면서 다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 2005년 12월 조사에서 이념무드 평가 점수는 평균 5.3점으로 2004년 4.6점에 비해 보수 쪽으로 이동했다. 2006~2008년 3년간 지방선거와 대선, 총선을 거치면서 이념무드 평균 점수는 5.5점까지 치솟았다.
일관성 없는 ‘상충현상’ 가속화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광우병 촛불 시위, 노 전 대통령 서거 등으로 국민 이념무드가 보수화에서 벗어나는 ‘이념적 유턴 현상’이 나타났다. 이념무드 평균 점수가 2009년 12월 5.2점, 2010년 12월 5.0점 등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 2월 조사에서는 다시 5.1점으로 중도 수준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를 보면 현 정국을 보수화 정국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진보적 이념으로 균형추가 넘어간 것도 아니다. 전 정부와 구(舊)여권에 대한 정치적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적지 않음에도 이념적 균형 상태를 깨는 상황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국민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주장한다. 정당과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 정치 엘리트 사이의 이념적 양극화가 국민 갈등으로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일면 맞기도 하지만, 일면 틀리다. 국민 내부의 진보와 보수 간 이념적 간극은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모두 정권 교체 초기에 진보와 보수간 이념적 거리가 확대돼 이념 양극화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임기 중반 이후에는 다시 좁혀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한국사회의 이념적 갈등은 양극화가 악화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대로 일관된 수렴 현상을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초기 탄핵이나 이명박 정부에서의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처럼 정치권의 갈등이 크게 증폭돼 이념적 양극화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진보와 보수 간 ‘이념적 균형 잡기(ideological balancing)’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기존의 ‘진보=친노동=복지=친북=반미’ ‘보수=친자본=성장주의=반북=친미’라는 이분법적 이념 균열이 약화하고, 그 대신 서로 모순돼 보이는 가치와 정책 선호가 공존하는 상충적 태도가 강화됐다는 점이다. 기존의 주류 선거 이론에서는 여러 이슈에 대한 정책 선호가 특정 이념 성향에 맞게 일관성을 보이는 층은 스마트한 국민이며, 이러한 일관성이 없는 다수의 국민은 무지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이론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선 보수주의자가 반미적 태도를 보이거나 복지 노선을 우선하고, 반대로 진보주의자가 친미와 성장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정치적 무지의 결과로 해석된다.
이처럼 과거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공존할 수 없는 가치가 충분히 공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바로 ‘상충적 유권자 이론’이다. 다시 말해 노동 친화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성장주의 노선을 선호하고, 성장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반대하거나, 미국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북한에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상충적 유권자 이론의 문제의식이다.
EAI·한국리서치는 지난해 10월 북한, 미국, 성장 및 복지, 정규직 확대와 처우, 기업 감세 등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에 대한 국민 선호도를 조사했다(그래프 2 참조). 2.5점이 중간 값이고, 이보다 작고 1점에 가까울수록 진보적이다. 2.5점보다 크고 4점에 가까울수록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이 조사결과를 보면 북한 주적 명시나 공무원의 정치활동 허용, 한미동맹, 한미FTA 등 특정 이슈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시각차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실제 선호하는 정책 내용이 과거의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한미관계를 묻는 질문에 보수층의 응답 평균은 3.16점으로 강한 동맹 관계를 희망한 반면, 진보층 평균은 2.72점에 그쳤다. 하지만 진보층 역시 자주 국방보다는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많아 다른 쟁점에 비해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한미FTA에 대해서도 진보층 응답 평균은 2.81점으로 보수층 못지않게 조속한 시행을 선호했다. 반대로 보수층에서는 복지에 대한 선호도가 과거보다 높아졌고,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한미관계 인식, 성장 및 복지 이슈는 진보와 보수층 내부에서 상충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다. 2002년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집회 당시 ‘바람직한 한미동맹’에 대한 질문에 ‘탈미 자주’라고 응답한 사람은 28.1%였던 데 반해,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20.4%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 위협이 커졌던 2004년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36.9%로 늘었고,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인 지난해 11월 조사에서는 과반수에 가까운 48.6%까지 상승했다. 반대로 탈미 자주를 선호하는 응답은 18.1% 수준까지 하락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강화되면서 한미동맹의 가치가 크게 확산된 결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진보층에서도 마찬가지다. 2006년 진보층의 41.1%가 탈미 자주 외교를 선호한다고 응답했지만, 지난해 11월 조사에서는 26.7%로 줄었다. 반대로 한미동맹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30.2%에서 45.3%까지 급상승했다.
성장 및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보수층에서 상충적 태도가 증가했다. 2006년 조사에서는 보수층 응답자의 61.5%가 복지보다는 성장을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2010년에는 49.1%로 줄었다. 반대로 성장보다는 복지가 우선이라는 응답은 38.5%에서 50.9%로 상승했다. 그동안 진보층의 절반 가까이가 진보적 한미동맹론자로 바뀌었고, 반대로 보수층의 과반이 보수적 복지주의자가 된 셈이다.
각 정당 및 차기 대권주자들은 이념 성향이 강한 집단보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상충적 국민, 즉 유권자의 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더 이상 ‘진보=자주=복지 대 보수=동맹=성장’이라는 논리에 기초한 정책은 매력적이지 않다. 유권자의 태도 변화에 맞는 정책을 얼마만큼 신속하게 내놓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여론의 반응성과 책임성에 주목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중도실용노선이나 공정사회론이 진정성 여부를 떠나 역대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이끌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또 상충적 태도를 가진 유권자는 특정 진영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균형 투표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떤 정치세력이든 밀어붙이기식 정치 행태는 상충적 유권자의 지지 이탈은 물론,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독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이념적 선명성이나 강력한 정책적 카리스마보다 여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응성과 책임성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정책 내용에 대한 지지뿐 아니라, 소통 의지와 방식도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상대적으로 높은 국정지지율을 유지하면서도 세종시 수정안 등 핵심 국정과제를 추진하지 못한 이유로 소통의 부재를 지적한 여론이 높았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결국 교조적 인식 틀에서 벗어나 ‘이념적 유연성’ ‘화합의 리더십’ ‘소통 능력’ 이 세 가지가 다가오는 정권 교체기의 핵심 키워드이자 핵심 가치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