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에이스로 떠오른 김효범(오른쪽)과 박상오.
최근 광고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두 거대 통신사 SKT와 KT의 스마트폰 관련 광고 문구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들이 벌이는 마케팅 대전은 점입가경이다. 이들의 치열한 경쟁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곳이 있다. 바로 ‘겨울 스포츠의 꽃’인 남자 프로농구가 열리는 경기장이다. 서울 SK 나이츠와 부산 KT 소닉붐의 통신사 라이벌전이 열린 1월 9일 잠실 학생체육관.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입장권이 매진된 이날 SK는 그룹사 신입사원이 대거 경기장을 찾았고, KT도 팬클럽 회원 등 SK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의 팬이 원정경기장을 찾아 응원전을 펼쳤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의 연고전과 프로농구 출범 이후 현대-삼성의 재계 라이벌전 때 응원전을 연상케 했다.
눈빛부터 다른 자존심 대결
통신 라이벌전에 임하는 두 팀 선수단은 눈빛부터 다르다. “상대 통신사 팀만은 꼭 이겨야 한다”고 구단 고위층 인사들이 독려하는가 하면, 두 팀 감독도 “오늘만은 반드시 이기자”며 필승을 주문한다. 여기에 승리 보너스까지 당근으로 제시하며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한다. 경기에 지면 2패라도 당한 것처럼 해당 팀 벤치는 의기소침 모드다. 프로농구장은 두 통신사 간 자존심 대결이 벌어지는 유일한 스포츠 현장이다. 비록 KT가 역대 전적에서 27승19패로 다소 우위를 점하지만, 매 경기 그룹 관계자나 팬들의 피를 말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이런 두 통신 라이벌 팀에 이번 시즌에 새로운 특징이 생겼다. 바로 두 팀을 리드하던 에이스의 얼굴이 바뀐 것이다. 뉴 에이스들의 경력도 매우 독특해 이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SK는 모비스에서 이적해 온 김효범(28·193cm)이 새로운 해결사로 자리 잡았고, 1월 11일 현재 공동 선두를 달리는 KT는 같은 팀에서 3년간 소리 없이 제 역할을 해온 박상오(30·196cm)가 뉴 에이스로 떠올랐다.
지난 시즌 모비스에 통합우승을 안긴 후 FA(자유계약선수) 대박을 터뜨리며 SK로 둥지를 옮긴 김효범은 올 시즌 초반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며 김민수, 방성윤의 부상 공백을 메워왔다. 김효범은 현재 경기당 17.4득점을 올리며 득점 부문 9위에 올랐는데 국내 선수로만 따지면 귀화한 혼혈 형제 선수인 문태영(LG), 문태종(전자랜드)에 이어 3위다. 경기당 3점슛은 2.4개로 이 부문 1위다. 지난 시즌에 기록했던 경기당 11.1득점, 경기당 3점슛 1.8개에 비하면 많이 향상된 수치다. 따라서 팀에서도 외국인 선수 테런스 레더를 제외하면 개인 기록이 가장 좋다. 팀에 득점력 높은 슈터가 없어 집중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거둔 성적이기에 더욱 값지다. 그동안 SK는 방성윤이 에이스 자리를 지켜왔다.
2009~2010시즌까지 주로 식스맨을 맡았던 박상오는 올 시즌 일취월장한 실력으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지난 시즌 경기당 8득점, 2.7리바운드에 그쳤지만 올해는 경기당 16.2득점, 5.7리바운드로 두 배 향상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선수 랭킹으로만 따지면 득점 5위, 리바운드 6위의 좋은 성적이다. 지난 시즌 17분에 머물렀던 경기당 평균 출전시간도 33분으로 늘었다. 박상오가 다쳐 코트에 눕기라도 하면 전창진 감독이 몸 상태를 묻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온다. 팀 내 위치가 그만큼 확고해진 것. 3년간 드라마의 조연을 맡던 배우가 4년째에는 주연을 맡은 셈이다. 이번 시즌 전까지 KT에는 여러 선수가 고른 득점 분포를 보였기 때문에 국내 선수 중에는 특별히 에이스로 칭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이들은 통신 라이벌전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김효범은 이번 시즌 4차례 가졌던 KT와의 경기에서 경기당 14.7득점에 3개의 3점슛을 림에 꽂아넣고 있다. 이번 시즌 SK전에서 경기당 12.5점을 올린 박상오는 경기당 리바운드를 8.3개나 잡아내며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이들은 독특한 경력으로 국내 농구계에 화제를 모았다. 1994년 캐나다로 이민 간 김효범은 그곳에서 농구를 익힌 뒤 2000년부터 미국 LA의 뱅가드대학에 다니며 미국 대학리그를 경험했다. 1학년 때는 시즌 평균 17득점을 올리며 팀 내 슈터로 자리 잡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한 에이전트의 소개로 국내 무대를 밟은 김효범은 개인보다는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모비스의 농구 스타일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언어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동료들이 내 어눌한 발음을 가지고 놀려대는 통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지난 시즌 전 소속팀 모비스에 통합우승을 안길 때도 4쿼터에 강했던 김효범은 SK 이적 후에도 4쿼터에 결정적인 3점슛을 꽂아넣으며 해결사 노릇을 해내고 있다. 김효범은 “4쿼터만 되면 역할을 많이 부여받고 최대한 집중력 있게 플레이를 하려고 한다”며 4쿼터에 강한 이유를 설명했다.
서로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아
SK 나이츠와 KT 소닉붐은 통신사 맞수답게 매 경기 명승부를 연출한다. 경기 종료 후 인사를 나누는 KT 전창진 감독(오른쪽)과 SK 신선우 감독.
고등학교 시절 그의 재능을 전해들은 강정수 당시 중앙대 감독은 전역을 앞둔 박상오에게 농구부 입단의 기회를 줬고, 박상오는 부대에서 몸을 만든 뒤 전역 후 중앙대에서 받은 일주일간의 테스트를 보란 듯이 통과했다. 박상오는 타고난 힘과 체력을 바탕으로 전 쿼터를 쉼 없이 누비며 꾸준한 득점과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기복 없는 플레이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83cm였을 만큼 학생시절부터 힘 하나는 장사급이었으며, 이런 타고난 힘에 올해는 기술과 유연성까지 좋아져 누구도 막기 힘든 선수로 성장했다. 얼마 전에는 KBL 심판이 선정하는 ‘최고의 허슬 플레이어’에 뽑히기도 했다.
두 통신사의 새로운 라이벌은 서로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박상오는 “김효범은 순간 동작이 빠르고 스피드가 좋아 일대일 능력이 뛰어나다. 슈팅 능력에 돌파력까지 갖춰 막기 정말 힘든 훌륭한 선수”라며 칭찬했다. 김효범은 “그의 플레이는 영리하고 여유가 있다. 배울 점이 많은 선수다. 슛은 정확하고 막기도 힘들다”며 박상오를 치켜세웠다.
라이벌 관계인 두 팀을 이끄는 뉴 에이스. 이들의 활약에 거는 팬들의 기대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김효범은 “나와 팀 동료들이 다치지 않고 이번 시즌을 끝냈으면 한다. 팀워크가 향상돼 꼭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박상오 역시 “중하위권을 만나도 지지 않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 시즌 2위를 하고도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지 못했던 지난 시즌의 한(恨)을 이번에는 풀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