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의 새해는 1월 1일을 맞으며 실시하는 카운트다운과 ‘새해맞이 불꽃놀이’로 시작된다. CNN이 10년 넘게 ‘지상 최고의 뉴 이어 행사’로 선정한 시드니 하버 불꽃놀이. 2011년 올해는 150만 명 이상의 시드니 시민과 관광객이 현장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를 감상했고 세계 50여 개 나라에 생중계됐다.
바로 그 순간, 한국 젊은이 20여 명이 오페라하우스 근처에서 카운트다운에 동참하며 환호 속에 2011년을 맞았다. 이들은 한국의 특성화고교 재학 중에 호주로 건너온 18~20세의 젊은이들. 한국 지방자치단체 교육청에서 하는 ‘전문계고교 글로벌 인재교육 프로그램’에 선발된 학생들이다.
이들을 불꽃놀이 현장으로 불러 모은 사람은 바로 한국의 톱스타 문근영의 외삼촌 류식(47·나무에듀컨설팅 대표) 씨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새해를 맞는 이들과 어울려서 큰 목소리로 소망을 빌었다. “우리는 젊다. 2011년을 뜨겁게 살자. 한 걸음씩 더 앞으로 나가자”라고.
한글사랑의 현장 ‘문근영도서관’
2010년 11월 27일, 시드니에 있는 린필드한국학교(교장 양용선)에서 ‘한글사랑도서관’(일명 ‘문근영도서관’)이 주관한 ‘2010년 독서상’ 시상식이 열렸다. 한글사랑도서관은 한글 책을 대출받아 읽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 이 시상식 말미에 도서관 운영 공로자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수상자로 류씨가 호명되자 한글학교 교사와 학부모 자리에서 환호가 터졌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감사패를 받은 류씨는 “도서관 운영에 힘써주신 선생님들과 4년 넘게 책을 직접 고르고 구입해 호주로 보내는 근영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한글사랑도서관은 2009년 1월 정식 개관했다. 그때까지 한글 전용 도서관을 갖는 건 이민 역사 40여 년을 헤아리는 호주 동포사회의 숙원이었다. 비록 호주 현지인 교회의 부속건물을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한글사랑도서관(Han Geul Library)이란 번듯한 현판을 내걸었고, 한글을 배우는 동포 어린이뿐 아니라 한글 책을 읽고 싶어 하는 현지인에게도 개방했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 만들어진 건 바로 문근영과 외삼촌 류씨 덕분이었다. 2006년 호주를 처음 방문한 문근영은 이곳에 한글 전용 도서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삼촌과 함께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는 도서관이 마련되면 무엇보다 한글 책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신간 우량도서들을 직접 골라 구입해 호주로 보냈다. 책값도 많이 들었지만 발송비도 만만치 않았다. 문근영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5년간 책을 보내왔다(‘주간동아’ 628호 참고).
이렇게 해서 모인 책은 한글사랑도서관 개관 전까지 시드니 전역의 수십 개 한글학교에 이동도서관 방식으로 대여됐다. 하지만 이동도서관 서고(書庫)는 한계가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문근영은 2008년 11월 류씨를 통해 기부금 1억 원을 도서관 개설 비용으로 기탁했다.
그러자 시드니의 한인 동포들은 도서관 건립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모여 청소했고, 책장을 짜고 내부 인테리어를 했다. 한글사랑도서관의 준비는 이처럼 전부 자원봉사로 진행됐다.
현재 한글사랑도서관이 소장한 한글 도서는 1만 권이 넘는다. 2월에는 문근영이 발송한 3500권이 새롭게 도착할 예정이다. 모국어는 나라말인 동시에 얼이다. 한글을 익히고 전래동화를 읽은 동포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한글사랑뿐 아니라 나라사랑까지 발견할 수 있다. 류씨 가족도 주말마다 도서관으로 가서 청소하고 도서를 분류했다. 지금은 문근영이 보내오는 책을 시드니총영사관 산하 한국교육원(원장 조영운)에서 받아 도서관에 전달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번거로운 일을 류씨가 도맡아 했다.
류씨의 이타적인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국에서 호주로 건너오는 특성화고교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해왔다. 한국 젊은이의 절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기능과 기술을 배우는 특성화고교 출신 젊은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처진 모습이기 때문. 또 가뜩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 데다 해외 거주라는 특수성 까지 더해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을 류씨는 자신이 친삼촌이라도 된 것처럼 돌봤다.
호주에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삼촌’이 돼준 문근영 외삼촌 류식 씨(가운데 안경 쓴 사람).
학생들이 한국 음식이라도 먹고 싶어 하면 도시락을 잔뜩 챙겨서 산이나 바다로 함께 떠났다. 2010년 11월 시드니 근교 블루마운틴으로 가 불고기 바비큐를 먹은 다음 6km 거리를 산행했다. 워낙 경사가 급한 산이라서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류씨는 이날 산행을 ‘극기훈련’이라고 이름 붙였다. 해외에서 본인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도록 정신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이뿐 아니다. 학업과 취업을 병행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간혹 비행이라도 저지르면 호주 실정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체벌을 하기도 했다. 잣대로 손바닥을 때리는 정도인 그의 체벌을 거부하는 학생은 없다. 오히려 그를 통해 혈육의 정을 느낀다고.
가끔 학생들이 학교에서 상을 받거나 직장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그날은 잔치가 벌어졌다. 주말마다 류씨 집으로 와서 함께 지내는 학생도 부지기수. 그중 일부는 한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류씨는 마치 드라마 대사를 외우듯 학생들에게 묻는다.
“행복하냐? 그럼 나도 행복하다.”
류씨가 회사 이름을 나무에듀컨설팅으로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저마다의 행복을 성취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행복한 숲’을 지향하는 것.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남이 잘돼야 나도 잘된다. 남이 행복해야 나 또한 행복해진다”는 말을,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도 실행한다.
류씨의 삶이 이러하다 보니, 밤 10시 퇴근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정작 자녀들과 함께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오빠, 언니들의 아빠”라는 눈총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류씨는 믿는다. “호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녀들이 유창하게 한국말 하는 걸 보고 근영이가 감동해서 한글사랑도서관을 마련한 것처럼, 아빠와의 주말을 빼앗아가는 오빠와 언니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자녀들이 반듯하게 자랄 것”이라고.
1 2006년 호주를 방문한 문근영은 린필드한국학교에서 일일 교사를 맡았다. 2 2010년 11월 류식 씨는 한국의 특성화고교 출신 젊은이들과 시드니 근교 블루마운틴으로 산행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