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8

..

귀신도 울리고 웃기는 ‘차태현 원맨쇼’

김영탁 감독의 ‘헬로우 고스트’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0-12-27 11: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귀신도 울리고 웃기는 ‘차태현 원맨쇼’
    한국인에게 귀신은 위협적인 존재라기보다 측은한 영혼에 가깝다. 한국의 전통 속에서 귀신은 무작정 남을 해코지하는 게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나타나는 존재다.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식스 센스’에 등장하는 귀신들처럼 말이다. ‘여고괴담’ 속 진주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고등학교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고, 고을 원님의 꿈에 나타난 ‘장화, 홍련’도 억울한 자신들의 죽음을 고하고자 했다. 무섭다기보다는 불쌍한,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영혼들. 그게 바로 한국형 귀신이다.

    김영탁 감독의 ‘헬로우 고스트’는 비록 제목은 서구적이지만 전통적인 한국형 귀신을 선보인다. 한국적 전통성은 이 영화가 감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영화는 감동과 눈물을 호소하는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헬로우 고스트’는 몇몇 눈속임 전략을 쓰고 있다. 첫 번째 눈속임이 바로 코미디다. 트레일러 광고물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 이 작품은 ‘과속스캔들’로 일약 국민 코미디 배우로 성장한 차태현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코미디는 빙의에서 비롯된다. 약간 모자란 주인공의 몸에 빙의된 여러 인물은 갖가지 방식으로 그를 괴롭힌다. 중년남자는 이 남자 몸을 빌려 흡연을 만끽하고, 변태 할아버지는 남자 손을 빌려 여자 엉덩이를 만진다. 불량식품 마니아 꼬마 귀신은 더 감당하기 어렵다. 하기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눈물을 찍어대는 아줌마도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코미디라고 하지만 그다지 웃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4명의 귀신 캐릭터는 각각 엉뚱한 행동을 하면서 주인공을 괴롭히지만 그 해코지는 학예회 수준이다.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코미디가 아니라 드라마다. ‘헬로우 고스트’는 관객을 웃기는 것은 실패했지만 울리는 것은 성공했다.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감동이다. 감동의 비밀은 이 작품이 귀신이 아니라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과 연관된다. 그것도 아주 한국적인 가족관 말이다. 우리에게 조상은 나를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마다 우리는 조상을 통해 살아 있는 후손의 영달을 빈다. 조상이라 부르는 귀신은 말하자면 죽어서도 든든한 힘이 돼주는, 가족의 초월적 힘을 보여준다.



    영화 ‘사랑과 영혼’이 영혼이 된 상태에서라도 연인을 지켜주는 순정을 흥행 코드로 삼았다면, ‘헬로우 고스트’는 죽어서도 나를 지켜주는 가족으로 그 코드를 변주한다. “가족이란 게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이 영화가 주장하는 원대한 가족론 앞에서 무참히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빠도 가족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가족이란 존재 자체로 힘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헬로우 고스트’는 매주 화요일 ‘긴급구조 SOS’에 등장하는 나쁜 가족과 정반대에 놓인 이상적 가족을 향해 나아간다. 없느니만 못한 가족이 있다 할지언정 김 감독의 가족론 앞에서는 반론의 여지를 찾기 힘들 듯싶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관객에게 가족 코드는 꽤 성공요인으로 손꼽힌다는 점. ‘헬로우 고스트’를 가족 멜로드라마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헬로우 고스트’에는 연극배우 출신의 여러 배우가 출연하지만 사실상 차태현의 원맨쇼라 해도 무방하다. 빙의라는 설정도 그렇지만 차태현은 고창석과 같은 개성이 뚜렷한 배우들을 유머러스하게 재해석해낸다. 늘 감초로만 출연했던 장영남이 보여주는 정극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만일 이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아마도 장영남 때문일 것이다. 가족과 함께 여가를 나누고 싶다면, 이 영화 추천할 만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