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교전 국가이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런 미국을 이끌어가는 ‘전쟁 지도자’인 셈이다. 전쟁 전략을 세우는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맡고 있다. 한 국가가 전쟁 중이라면 전쟁 지도부의 역할, 특히 화합이 중요하다. 그런데 밥 우드워드(‘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는 최근 펴낸 책 ‘오바마의 전쟁’에서, 오바마 측근 사이에 불신과 긴장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폭로했다. 특히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NSC 회의는 미국의 아프간전쟁 전략을 둘러싸고 전쟁 지도부의 심각한 갈등 상황을 드러냈다고 한다.
2009년 백악관 상황실의 침묵
밥 우드워드는 1974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사퇴를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미 워싱턴 워터게이트 건물 안의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돼 문제가 된 사건)을 심층 취재해 이름을 날린 ‘워싱턴포스트’의 간판기자다. 그의 신작 ‘오바마의 전쟁’은 아프간 안정화를 위해 몇만 명의 미군을 증파할 것이냐를 두고 조 바이든 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 관료들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군 인사들이 반목을 빚었고, 이들 사이에 낀 오바마 대통령이 결국 화를 냈다는 비화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지금부터 1년 전인 2009년 9월부터 백악관 상황실에서 두 달 넘게 잇따라 열린 NSC 회의의 중심 안건은 아프간 전략 재검토였다. 특히 얼마만큼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는가가 핵심 이슈였다.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 등 미군 지휘부는 “아프간 안정을 위해선 4만 명이 증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이든 부통령은 2만 명으로 선을 그었다. 아프간이 제2의 베트남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 논리였다. 칼 아이켄베리(아프간 주재 미국대사), 제임스 존스(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등도 바이든 부통령의 편을 들었다.
미국의 아프간 개입 확대를 꺼려온 오바마 대통령도 군부 지도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아프간에서 미군이 명예롭게 철수하겠다”는 이른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4만 증파론과 함께 내놓으라고 거듭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는 수십 차례나 되풀이됐고, 오바마의 측근과 장군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졌다. 정책 충돌을 넘어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그와 관련해 우드워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마바 대통령의 심기는 불편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펜타곤의 군부 지도자들에게 아프간전쟁 수행과 관련한 여러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해왔다. 오바마가 보기에 그의 보좌관들은 그런 대안들을 제시하기는커녕, 단 한 가지 선택사항만을 대통령이 택하도록 몰아가면서 아프간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9년 1월 대통령 취임 뒤 오바마가 아프간 출국전략을 세우느라 고심할 때 군부 지도자들은 아프간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확대론을 세우고 있었다. 펜타곤의 군부 지도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2만1000명의 병력을 아프간에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한 뒤로도 추가 파병론의 불길을 꾸준히 지폈다. 2009년 9월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은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주둔 병력을 늘리지 않으면 아프간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달 뒤인 10월에는 멀린 합참의장이 상원에서 퍼트레이어스 장군과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다.
“나는 그 서류엔 서명 안 하겠다”
그러나 오바마는 미국의 아프간 개입을 제한하고, 아프간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게이츠 국방장관, 멀린 합참의장,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 등 대통령 고위 군사보좌관 3명은 명확한 출구전략도 없이 4만 명 이상의 증파를 고집했다. 다음은 우드워드의 기록.
2009년 11월 11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제8차 아프간 전략 검토회의에서 오바마는 군부 지도자 3명을 향해 드디어 화를 냈다.
“당신들은 오직 한 가지 옵션(option)만 내미는데… 그렇다면 내가 골라잡아야 할 옵션은 그것 말고 없다는 것이오?”
상황실에는 순간 침묵이 흘렀다. 멀린 합참의장이 나중에 입을 열었다.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겠는데요.”
미국이 아프간 개입을 확대해나갈 경우, 앞으로 10년 동안 무려 8890억 달러의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미 예산관리국(OMB)은 내다봤다. 우드워드의 책에 따르면, 오바마는 아프간 전략회의 자리에 예산관리국의 그 자료를 들고 와 “그런 비용을 아프간에 쓰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드워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펜타곤이 제시한 ‘아프간 공격 임무의 대안’이란 제목의 서류에는 초록색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래프는 4만 명의 증파가 마치 천천히 솟아오르는 산처럼 그려졌고, 2010년 말 10만8000명의 병력이 그래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래프는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2016년에 이르러 백악관 상황실에서 그 회의가 열리던 2009년 가을 시점의 아프간 주둔 병력인 6만8000명 규모로 돌아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상황실 뒤편 의자에 앉아서 회의를 지켜보던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측근 참모들은 오바마가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마바는 법정에서 유죄를 증명하는 서류나 되는 듯이 그 초록색 그래프 종이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6년 뒤에나 겨우 지금 수준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나는 그런 서류엔 서명하지 않을 거요.”
이처럼 골치 아픈 과정을 거쳐 결국 오바마는 3만 명의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바이든 부통령의 2만 파병론과 군부의 4만 파병론 사이에서 고민하던 오바마는 중간선을 택한 셈이다. 우드워드는 오바마가 3만 명 증파를 결정한 것은 그의 법률가적 절충(a lawyerly compromise)이라 풀이한다. 오바마는 이라크 주둔 미 병력을 2010년 8월까지 5만 명으로 줄였고 이마저도 2011년 말까지 모두 철수할 방침임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은 2011년 7월부터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를 시작할 예정이고 그로부터 3년 안에는 모두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간의 불안한 정세로 이라크처럼 확실한 철수 일정을 짜지 못하고 있다. 2012년 말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의 발목을 아프간이 잡을 것인가. 오바마의 잠 못 이루는 워싱턴의 밤은 임기 내내 이어질 전망이다.
2009년 백악관 상황실의 침묵
밥 우드워드는 1974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사퇴를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미 워싱턴 워터게이트 건물 안의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돼 문제가 된 사건)을 심층 취재해 이름을 날린 ‘워싱턴포스트’의 간판기자다. 그의 신작 ‘오바마의 전쟁’은 아프간 안정화를 위해 몇만 명의 미군을 증파할 것이냐를 두고 조 바이든 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 관료들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군 인사들이 반목을 빚었고, 이들 사이에 낀 오바마 대통령이 결국 화를 냈다는 비화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지금부터 1년 전인 2009년 9월부터 백악관 상황실에서 두 달 넘게 잇따라 열린 NSC 회의의 중심 안건은 아프간 전략 재검토였다. 특히 얼마만큼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는가가 핵심 이슈였다.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 등 미군 지휘부는 “아프간 안정을 위해선 4만 명이 증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이든 부통령은 2만 명으로 선을 그었다. 아프간이 제2의 베트남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 논리였다. 칼 아이켄베리(아프간 주재 미국대사), 제임스 존스(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등도 바이든 부통령의 편을 들었다.
미국의 아프간 개입 확대를 꺼려온 오바마 대통령도 군부 지도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아프간에서 미군이 명예롭게 철수하겠다”는 이른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4만 증파론과 함께 내놓으라고 거듭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는 수십 차례나 되풀이됐고, 오바마의 측근과 장군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졌다. 정책 충돌을 넘어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그와 관련해 우드워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마바 대통령의 심기는 불편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펜타곤의 군부 지도자들에게 아프간전쟁 수행과 관련한 여러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해왔다. 오바마가 보기에 그의 보좌관들은 그런 대안들을 제시하기는커녕, 단 한 가지 선택사항만을 대통령이 택하도록 몰아가면서 아프간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9년 1월 대통령 취임 뒤 오바마가 아프간 출국전략을 세우느라 고심할 때 군부 지도자들은 아프간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확대론을 세우고 있었다. 펜타곤의 군부 지도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2만1000명의 병력을 아프간에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한 뒤로도 추가 파병론의 불길을 꾸준히 지폈다. 2009년 9월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은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주둔 병력을 늘리지 않으면 아프간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달 뒤인 10월에는 멀린 합참의장이 상원에서 퍼트레이어스 장군과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다.
“나는 그 서류엔 서명 안 하겠다”
그러나 오바마는 미국의 아프간 개입을 제한하고, 아프간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게이츠 국방장관, 멀린 합참의장, 퍼트레이어스 당시 중부군 사령관 등 대통령 고위 군사보좌관 3명은 명확한 출구전략도 없이 4만 명 이상의 증파를 고집했다. 다음은 우드워드의 기록.
2009년 11월 11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제8차 아프간 전략 검토회의에서 오바마는 군부 지도자 3명을 향해 드디어 화를 냈다.
“당신들은 오직 한 가지 옵션(option)만 내미는데… 그렇다면 내가 골라잡아야 할 옵션은 그것 말고 없다는 것이오?”
상황실에는 순간 침묵이 흘렀다. 멀린 합참의장이 나중에 입을 열었다.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겠는데요.”
미국이 아프간 개입을 확대해나갈 경우, 앞으로 10년 동안 무려 8890억 달러의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미 예산관리국(OMB)은 내다봤다. 우드워드의 책에 따르면, 오바마는 아프간 전략회의 자리에 예산관리국의 그 자료를 들고 와 “그런 비용을 아프간에 쓰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드워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펜타곤이 제시한 ‘아프간 공격 임무의 대안’이란 제목의 서류에는 초록색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래프는 4만 명의 증파가 마치 천천히 솟아오르는 산처럼 그려졌고, 2010년 말 10만8000명의 병력이 그래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래프는 완만한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2016년에 이르러 백악관 상황실에서 그 회의가 열리던 2009년 가을 시점의 아프간 주둔 병력인 6만8000명 규모로 돌아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상황실 뒤편 의자에 앉아서 회의를 지켜보던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측근 참모들은 오바마가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마바는 법정에서 유죄를 증명하는 서류나 되는 듯이 그 초록색 그래프 종이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6년 뒤에나 겨우 지금 수준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나는 그런 서류엔 서명하지 않을 거요.”
이처럼 골치 아픈 과정을 거쳐 결국 오바마는 3만 명의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바이든 부통령의 2만 파병론과 군부의 4만 파병론 사이에서 고민하던 오바마는 중간선을 택한 셈이다. 우드워드는 오바마가 3만 명 증파를 결정한 것은 그의 법률가적 절충(a lawyerly compromise)이라 풀이한다. 오바마는 이라크 주둔 미 병력을 2010년 8월까지 5만 명으로 줄였고 이마저도 2011년 말까지 모두 철수할 방침임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은 2011년 7월부터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를 시작할 예정이고 그로부터 3년 안에는 모두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간의 불안한 정세로 이라크처럼 확실한 철수 일정을 짜지 못하고 있다. 2012년 말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의 발목을 아프간이 잡을 것인가. 오바마의 잠 못 이루는 워싱턴의 밤은 임기 내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