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학 복사실. 제본교재가 수북이 쌓여 있다.
대학가의 불법복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가 지난해 전국 대학 주변과 대학 내 복사업체 2400여 곳을 단속한 결과, 273개 업소가 적발됐고 6000여 점의 불법복사물이 수거됐다. 적발된 업체 중 37.7%가 대학 내 업소였다. 대학가의 해묵은 불법복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기 위해 문광부가 나섰다. 대학이 저작권료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내면 수업을 위해 한 불법복제를 문제 삼지 않는 일괄징수 제도를 실시하기로 한 것. 언뜻 보기에 편리하고 합리적인 방법 같으나 대학 측은 “보상금 책정과 진행 방식이 일방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8월 19일 문광부는 “각 대학이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도서, 음악, 영상물 등 국내외 저작물을 강의 교재로 사용하는 데 대해 대가를 물리는 ‘수업목적 저작물 이용 보상금 제도’(이하 보상금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대학은 저작권자에게 보상금을 내고 수업 현장에서 각종 저작물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저작권자는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대교협 “보상금 협의한 적 없다”
현행 저작권법상 보상금제도는 문광부 장관이 고시하는 기준에 따라 저작권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문광부가 책정한 보상금 금액은 학생 1인당 4400~4500원. 그러나 보상금 수령단체인 (사)한국복사전송권협회(이하 협회)와 대학의 의견을 고루 반영하기 위해 두 단체가 합의해 정한 금액을 기준으로 할 방침이다. 문광부는 “두 기관이 두 차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최종 금액은 3000~4000원이 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협회는 문광부와 관련 없는 비영리단체로, 저작권료를 징수해 개별 저작권자(작가, 학자 등 저작권자와 출판사 등이 회원)에게 분배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문광부는 대학과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다고 했지만 대학가의 반응은 “의견수렴 과정에 문제가 있고 학생 1인당 보상금을 책정하는 방식도 잘못됐다”는 것이다. 문광부는 “2008년 10월 일반대학, 전문대학, 원격대학 등 전국 340여 개 대학 중 50개 대학을 표본으로 선정하고 대학마다 10명의 교수를 대상으로 5개월간 수업 시 저작물 이용실태를 조사했다”고 했으나 각 대학 측은 바로 이 표본조사에 문제를 제기한다. 대학별, 전공별, 심지어 교수 개인별로 저작물 이용량이 천차만별인데 특정 표본만 조사해 보상금을 일괄적으로 걷는다는 사고가 탁상행정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그것.
이화여대 교수학습개발원 이종경 원장은 “교수 3명이 특정 저자의 책 500쪽을 사용해도 A교수는 저작물을 그대로 쓰고, B교수는 인용을 하고, C교수는 재구성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저작권 사용량을 정확히 산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어떻게 전국 대학의 저작물 이용량이 같다고 가정하고 같은 보상금을 거둘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 역시 문광부의 보상금 산출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문광부는 “보상금액을 정하기 위해 대교협과 두 차례 만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다”고 발표했지만 대교협 측은 “올해 초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공청회에 참석했을 뿐 협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설사 문광부의 의도대로 일괄적으로 보상금을 걷는다 해도, 그 보상금이 저작권자에게 적절히 분배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문광부와 협회는 보상금의 분배에 대해 각 대학 측이 저작권물을 이용하는 양만큼 분배하겠다는 방안을 마련해놓고 있지만, 각 대학 측은 “저작권 사용량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어떤 기준으로 분배를 하느냐”고 반문한다.
문광부는 이번에 발표한 보상금 제도에 동의하지 않는 대학의 경우, 무단복제물 현황을 개별적으로 조사해 그에 따른 금액을 내게 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학생 1인당 보상금을 내는 방식(포괄징수 방식)이 개별적으로 내는 것(개별징수 방식)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대부분 대학이 포괄징수 방식을 따를 것으로 본다. 문광부 저작권보호팀 관계자는 “대학이 수업별로 저작물 이용량을 산출해 저작권자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비용은 물론 시간도 많이 든다. 소송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문광부가 개별징수 방식을 택한 대학에 대해 무작위 실태조사를 해 저작권 사용내역을 불성실하게 제출한 사실을 밝혀낼 경우, 해당 대학의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일방적이고 섣부른 제도 시행 방식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다. 대학의 수업 목적용 저작물의 인용과 관련해 저작권법, 제도 등을 연구해온 중앙대 법대 변용완 강사는 “보상금 분배를 위한 저작물 이용 실태를 제대로 조사·관리하려면 교육기관의 저작물 이용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화 시스템 등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세대 한 관계자는 “저작권법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대학 전반에 확산되면서 각 대학이 데이터를 구축하는 등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체적으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섣부른 밀어붙이기식 제도 시행으로 자칫 대학이 다양한 저작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방적이고 섣부른 시행 불만 많아
학생들의 우려는 더 깊었다. 대학 측 예상 납부액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수를 합한 수치에 학생 1인당 보상금액을 곱한 금액이다. 2009년 보상금 총 납부액을 학생 1인당 4190원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납부액이 가장 높은 연세대는 1억5905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연세대 대학원 재학생 이모(26) 씨는 “등록금도 자꾸 오르는데 정부가 대학과 충분한 협의 없이 제도를 밀어붙이다 보면 결국 대학이 해당 비용을 학생의 등록금에 전가시킬 것”이라며 걱정스러워했다. 고려대 대학원 재학생 김모(28) 씨도 “도서관에 가보면 수업 교재로 선정된 책은 고작 2~3권 있고,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보상금을 걷기 전에 도서관 예산 등을 충분히 지원하는 방안부터 모색해야 한다. 무조건 학생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 같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정보통신 매체를 통해 교육을 하는 원격대학은 이번 제도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다. 온라인 강의의 경우 저작물 이용 현황이 그대로 노출되고 감시도 쉽기 때문에 실제 저작권 관련 소송을 당하는 경우가 일반대학보다 잦은 편이다. 한국원격대학협의회의 김영철 사무국장은 “저작권자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는 데 시간과 비용을 많이 쓰면서도 이를 다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제도 시행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