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차기 대권주자인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김태호 총리 후보자 낙마 이후 변화될 차기 구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친이계 대표주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그는 김 전 후보자가 등장한 8·8개각 일주일쯤 전에 이 대통령과 독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이 ‘김태호 총리’ 카드를 귀띔해주면서 김 전 후보자의 내정이 차기 대선후보 구도와는 관련이 없다는 설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지사는 김 전 후보자의 발탁이 차기 구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8·8개각 다음 날 경기도청 공무원 조회 자리에서 임명권자인 이 대통령과 김 전 후보자를 겨냥해 막말에 가까운 ‘쓴소리’를 쏟아냈다. “자고 일어나면 총리라고 나타나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중국의 경우 ‘차세대 지도자는 누구’라고 예측 가능하다”고 한 것.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이전에도 ‘검증된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번 발언도 그 연장선상이지 김 전 후보자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친이계의 지원을 기대하는 김 지사가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에 긴장해서 나온 발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누구를 朴 대항마로 키울까 고민
김 지사의 소신 발언이 이어지자 청와대 핵심 참모가 김 전 후보자 낙마 뒤인 8월 24일 “경기도나 잘 챙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럼에도 김 지사는 다음 날 “국가의 리더십이 혼미하다”고 반격을 가했다. 이를 두고 정가에선 “김 지사가 ‘제2의 김태호’ 카드가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예측 가능한 리더십론’을 계속 피력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8월 21일 박 전 대표와도 단독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도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에게 ‘김태호 총리 임명은 차기 구도와 관련 없다. 대선후보 경선을 공정하게 관리하겠다. 그러니 김태호 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친박계가 협조해달라’는 당부를 했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이런 분석이 맞다면, 김 전 후보자가 임명동의안 표결 처리까지 가지 않고 사퇴했기 때문에 회동에서의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 셈이다.
박 전 대표는 김 전 후보자의 등장이나 퇴장 때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친박계 의원 사이에서는 “이명박 정부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친이계 핵심에서 다각도로 ‘박근혜 대항마’를 검토하고, 김태호 후보자와 임태희 대통령실장 발탁도 그 일환”이라고 의심했었다.
김 전 후보자의 등장에 긴장한 것은 정몽준 전 대표나 오세훈 서울시장 등 다른 잠룡도 마찬가지다. 정 전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 김문수 지사처럼 세대교체론이나 ‘40대 기수론’이 몰아치는 상황을 우려했다. ‘젊은 리더십’을 강조해온 오 시장은 자신보다 한 살 적고 친화력이 뛰어난 김 전 후보자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 전 후보자의 퇴장으로 ‘포스트MB’ 구도의 변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까지는 2년이 남아 있는 까닭에 상황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현시점에서 여권의 차기 대권구도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모으는 인물은 이재오 특임장관과 이상득(SD) 의원이다.
이 장관은 특히 박 전 대표와 숙적이다. 정기국회 개회일인 9월 1일 국회에 출석한 이 장관이 박 전 대표 자리로 찾아가 90도로 인사하는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장관이 박 전 대표의 선친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경험이 있는 데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MB 캠프의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서로 날을 세웠다. 박 전 대표도 이 장관의 개인적인 캐릭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특임장관으로서 당·정·청 관계를 조율하게 된 이 장관이 친이계를 결집해 직접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거나 제3의 대항마를 물색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면 같은 민중당 출신인 김문수 지사를 지원할 가능성도 높다. 이 장관은 8월 2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 지사와는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왔다. 상당히 훌륭하다. 김 지사가 대선후보로 나서면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도 차기 대선후보 경선과 관련해 ‘태풍의 눈’이 될 수 있다. 친동생인 이 대통령을 대신해 ‘포스트MB’ 구도를 그릴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특히 박 전 대표에게 우호적이다.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필요하다면 박 전 대표를 지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사석에서 피력해왔다. 이러한 태도는 수도권의 친이계 소장파와 충돌한다.
최고조에 달한 헤게모니 다툼
정몽준 전 대표
정태근 의원은 “이상득 의원이 청와대, 국가정보원에 의해 민간인 불법사찰이 이뤄진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의원은 청와대 인사라인을 이 의원과 그의 측근인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 장악하고 있다는 의혹도 거듭 제기했다.
그러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나서서 “무책임하게 비난만 하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 본인들은 과연 얼마나 깨끗하게 지냈는지 ‘공정한 사회’ 차원에서라도 밝히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이상득-박영준 라인과 수차례 암투를 벌였던 정두언 최고위원은 9월 1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마치 청와대에 차지철이 되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수도권 소장파의 대표주자인 남경필 의원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가면서 했던 사조직을 ‘빅 브라더’라 부르는데,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수사하자고 하면 수사하는 게 대한민국의 법이 아니다. 이것은 모욕”이라고 치받았다.
이런 언쟁은 언뜻 당·청 갈등처럼 비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SD계와 소장파 사이의 친이계 헤게모니 다툼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전반기 권력다툼이 인사 주도권을 놓고 이뤄졌다면, 후반기 권력다툼의 핵심 목표는 포스트MB 구도를 짜는 주도권이다. 따라서 이번에 불거진 친이계 내부의 갈등은 차기 대권경쟁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