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스님은 수덕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등 여러 소임을 맡았고, 사판(事判)이 끝난 후 미련 없이 선방에 들어가 수십 년간 정진하며 이판(理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4월 덕숭총림(德崇叢林) 방장(方丈)에 추대됐다. 2008년 입적한 스승 원담 스님의 뒤를 이은 것이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요람이 바로 덕숭총림 수덕사이기에 스님에게는 많은 기대와 격려가 이어지고 있다. 올봄 능인선원에서 만난 스님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여(如如)한 모습 그대로였다.
스님은 어려서 절에 왔다. 평생을 스님으로만 살아온 것이다. 어쩌면 스님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저의 속가(俗家)가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부친께서는 만공 노선사에게 계(戒)를 받았을 정도로 열심인 불자였어요.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 스님도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열세 살 때 부친과 함께 불공을 드리러 수덕사에 왔다가 남았습니다. 나중에는 집에서 저를 찾으러 와도 절에 숨어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인연이 벌써 60여 년입니다.”
▼ 어려서 출가하셔서 행자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는 몸이 너무 약해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덟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습니다. 아홉 살 때는 1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기도 했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런데 절에 오고 난 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몸이 좋아졌어요. 공양주(供養主·식사 담당 소임)와 채공(菜供·반찬 담당 소임)을 3년 동안이나 거뜬히 해냈습니다. 정성스럽게 소임을 다했습니다. 산중 어른들도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복을 짓는 일이고 중노릇의 기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밥 하고 국 끓이는 일에는 구애받지 않을 정도입니다.”
▼ 행자 이후 공부 과정은 어떠셨나요?
“수덕사 대중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참선한 뒤 아침 공양을 하면 논과 밭으로 나가 일했습니다. 논만 100마지기(약 6만6100㎡)가 넘어서 관리가 쉽지 않았지만, 모든 농사일을 스님들이 직접 했습니다. 그러고도 해가 지면 다시 절에 와 정진을 했습니다. 진짜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생활이었습니다. 농한기에는 기간을 정해서 용맹정진도 했습니다. 일을 한다고 정진을 게을리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살다가 강원(講院)에 갔습니다. 처음 은사 스님께서는 강원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본래 덕숭총림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따로 스님을 공부시키지 않는 가풍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니 은사 스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스님은 어렵게 은사 스님의 허락을 얻은 뒤 직지사로 갔다. 거기서 현대불교의 대강백 관응 스님을 모시고 1년 정도 공부했다. 관응 스님이 당시 학인 스님들에게 ‘선가귀감’을 강의했는데, 설정 스님이 칠판에 글을 써놓으면 관응 스님이 들어와 강의를 하는 식이었다.
“관응 스님이 서울 중앙선원으로 가신다고 해 스님을 따라 같이 올라갔습니다. 어머니뻘 되는 보살님(여자 신도)들이 자꾸 제게 양자로 들어오라 했습니다. 관응 스님이 보살님들에게 아무리 주의를 줘도 고쳐지지 않아 결국 해인사 강원으로 갔습니다. 수덕사 출신이 처음으로 해인사 강원에 간 것입니다.”
준수한 외모와 총명한 머리를 가진 젊은 설정 스님을 보살님들이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설정 스님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줄줄 외고 한글을 뗐다. 군에 가서도 학력은 무학(無學)이었지만 일처리를 잘해 “머리가 이렇게 좋은데 왜 무학이냐? 학력을 속였지?”라며 추궁을 당할 정도였다.
(왼쪽) 1959년 가야산에서 찍은 사진. 앉아 있는 이가 설정 스님이다. (오른쪽) 1958년 해인사 괘불 앞에서.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설정 스님.
“강원을 마치고 군대를 갔습니다. 그런데 제대하면 환속(還俗)하는 스님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대 전 동화사 비로암에서 7일간 기도를 했습니다. 제대 후에도 스님으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게 해달라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3년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저는 다른 고민에 빠졌습니다. 환속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선원(禪院)에 가서 공부할 것인지 아니면 서양 학문을 더 공부할 것인지를 두고 며칠 밤을 새우며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깝게 지내던 후배 스님이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해보자고 제안해 은사 스님의 허락을 받고 상경했습니다. 작은 절에서 일을 도와주고 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다 그만 폐병이 왔어요.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스스로 주사를 놓고 참아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처님 법’만 믿고 살아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막상 시험을 치려 하니 무엇을 전공할지가 또 고민이었습니다. 절에 땅이 많고 농사도 많이 짓고 있으니, 농대에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사찰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 대학을 마치고 후회를 하셨다고 하던데요?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했습니다. 물론 승려로서 종립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조석(朝夕) 예불에도 꼭 참석했습니다. 성적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때 다소 후회를 했습니다. 선방에서 참선을 했으면 마음공부가 많이 진전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저의 뜻이 순수하긴 했지만 그때 학교 다닌 것이 조금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스님은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납자(衲子)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스님은 판단하는 듯했다. 그래도 사찰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독학으로 공부를 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이 분명하다.
▼ 덕숭총림의 가풍은 무엇인가요?
“덕숭총림에는 그 흔한 부도 하나 없습니다. 초대 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나 2대 방장 벽초 스님, 3대 방장 원담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도 우리는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습니다. 만공 스님께서 절대로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사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만공 스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리를 수습해 ‘상(想)’을 내는 것은 마구니들이 하는 짓이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총림의 무상(無想), 무념(無念), 무심(無心)의 가풍입니다.”
지금도 능인선원 선방에는 만공 스님이 내린 추상같은 청규(淸規)가 걸려 있다. 한눈팔지 말고 공부에만 매달리라며 만공 스님은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내렸다. 첫째, 입승(立繩)의 지도에 복종하라. 둘째, 공부는 필히 마쳐라. 셋째, 잠을 많이 자지 마라. 넷째, 묵언하라. 다섯째, 바깥출입을 삼가라. 여섯째, 청규를 어길 시에는 축출한다. 덕숭총림의 수행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명료한 말씀이다.
▼ 덕숭총림 방장에 추대되신 후 ‘방장행자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누구나 행자(行者)입니다. ‘도(道)’의 경지에 이르면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수반하게 됩니다. 특히 언행일치가 안 되면 ‘도’가 아닙니다. 수행자로서 조고각하(照顧脚下) 하면서 중도연기(中道緣起)를 깨달을 때까지 철저히 공부해야 합니다. 저도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기에 행자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에 의해 방장으로 추대됐을 때부터 ‘행자’의 신분으로 살아야겠다 다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 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서 앞으로는 절대 편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신이 허락하는 한 정진하면서 대중과 중생을 위해 살 것입니다.”
(위) 1980년대 말 수덕사 대웅전 앞에서 원담 스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설정 스님이다. (아래) 제자들과 얘기하고 있는 설정 스님. 맨 오른쪽이 주경 스님, 가운데가 수암 스님이다.
▼ 스님께서는 승격(僧格)을 강조하십니다.
“출가 유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출가(身出家) 심불출가(心不出家), 둘째 심출가(心出家) 신불출가(身不出家), 셋째 심출가(心出家) 신출가(身出家), 넷째 삼계출가(三界出家)입니다. 우리 스님들은 생사와 윤회를 다 끊고 삼계출가를 해야 합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과 교양과 지성도 겸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요즘 ‘생활인’인 스님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중이 아닙니다. 직업인입니다. 승격을 망가뜨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스님이 많을수록 불교 발전은 요원합니다. 비승가적이고 비교양적이고 반지성적인 불교는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중도연기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중도(中道)는 무심, 무념, 무상을 증득하고 유무와 선악, 대소 등을 극복한 것입니다. 모든 분별심이 끊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은사 스님께서 주신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들고 있습니다.”
이 화두는 수많은 수행 일화를 남긴 중국 당나라 때 조주 스님이 만든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一歸何處)?”라고 물었다. 조주 스님은 “내가 칭저우(靑州)에 있을 때 삼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대답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말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조주 스님은 삼베라는 다소 엉뚱한 답으로 ‘논리 너머의 그 무엇’을 찾기를 바란 것이다.
▼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임기를 마치고는 홀연히 선방에 가셨습니다.
“1998년 4년간의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마치고 암에 걸렸을 때 철저히 나를 돌아봤습니다. 스님이든 재가자든 한 번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완쾌되지 않았지만 봉암사 선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선방에서 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봉암사에서 3년간 공부하니 몸도 점차 좋아졌습니다. 이후에는 상원사 청량선원에 갔습니다. 상원사에서는 하루도 안 빠지고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진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참배했습니다. 날마다 환희심이 났습니다. 젊은 시절 범어사와 묘관음사 등에서 공부했던 시기만큼이나 좋았습니다. 상원사에서 좀 더 공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정혜사 능인선원도 챙겨야 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 스님과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머리 긴 사람도 불법(佛法)의 도리를 알면 대선지식이고 머리 짧은 사람도 종지(宗志)를 모르면 속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근기에 맞게 염불(念佛)이나 주력(呪力), 참선(參禪) 세 가지 중 하나를 꼭 선택해서 수행하면 좋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는 ‘이놈은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참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끝입니다. 모든 공부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공부해야 합니다. 숨 쉬고 밥 먹을 줄 알면 화두공부는 할 수 있습니다.”
▼ 우리 사회 지도자들에게도 당부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습니다. 신뢰가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의와 신뢰가 있어야 힘이 생기고 어려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런 기풍이 바로 선다면 우리 사회는 아무리 큰 난관이 닥쳐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덕목입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서울 동국대에서 공부하는 상좌 스님이 인사를 드리러 왔다. 설정 스님은 상좌 스님의 성적표를 보면서 공부를 점검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애정 어린 당부 말씀도 부드럽지만 따끔했다. 스님은 “불가(佛家)에 보물을 찾으러 왔으면 보물을 찾아야지, 쓰레기만 주워서는 안 된다”며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는 대중을 잘 교화하는 스승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부처님 법을 전하며 덕숭산을 지키는 설정 스님. 스님의 법향(法香)은 덕숭산을 넘어 보물을 찾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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