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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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세상을 향해 호루라기 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0-05-17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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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세상을 향해 호루라기 불다

    김기협 지음/ 서해문집 펴냄/ 328쪽/ 1만2900원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는 6·25전쟁 당시 남침 사흘 만에 점령된 서울에 남아 있던 역사학자 김성칠(1951년 작고.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이 9·28수복 때까지 인공(인민공화국) 치하에서 경험한 것을 기록한 개인 일기지만, 좌우 대립이 심각했던 그 시기에 중도적 시각에서 좌우익의 전변을 꿰뚫어본 희귀한 기록이다. 보통 사람의 체험 수기가 가질 수 없는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나는 1993년에 이 책의 초판을 2만 부나 발행하는 일을 주도했다.

    개인의 일기를 책으로 내는 일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어쩌면 무모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3일 만에 2쇄 2만 부를 더 발행하는 등 반응은 무척 좋았다. 교과서에도 글의 일부가 실리면서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돼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최근에는 인공 치하 3개월 동안 단 한 장의 신문도 발행되지 않아 그 기간의 역사적 기록은 이 책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이 책을 그렇게 팔고자 했던 일이 새삼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칠의 셋째 아들 김기협은 서른여덟이 돼서야 자신의 어머니가 일기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의 머리말에 “역사를 공부하는 아들이 마흔이 되도록 일기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아들이 고민을 나눌 자격이 없는 것으로 어머니가 판단했다고 생각해 20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화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일로 김기협은 늘 아웃사이더였다고 말한다. 한 지인에게서 “한국 사회의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바깥으로 도망쳐 나오기만 해온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저자는 병상의 노모가 건강을 회복한 일과 노무현의 죽음을 접하면서 소수파일망정 자신이 사회 안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을 바꿔먹은 다음에 인간 사회의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려면, 즉 ‘사람 사는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글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을 넘어’다.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먼저 10년 전에 쓴 칼럼을 보여주고, 이어서 비슷한 주제로 새로 쓴 칼럼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10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유효한 원칙과 상식이 무엇인지 재확인하기도 하고, 1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짚어보거나 그사이 변화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그 10년은 다시 집권한 보수정권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시기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한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 나라에는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이 두 번 열리면서 남북관계는 크게 진전됐지만 개인주의의 발흥이 심해지면서 진보주의자가 발 디딜 틈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집권한 노무현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저자는 스스로 ‘노빠’가 됐다고도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노무현이 추구했던 ‘함께 사는 세상’의 꿈을 지지하면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이명박은 폐쇄적 소수 집단을 대변하는 인물” “어둠 속의 권력답게 국민을 괴롭히고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것을 역할로 삼는 검찰” “‘입법전쟁’에 내몰려 내용도 모르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최소한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용산 참사에 대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자는 동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한나라당, “법률의 의결 과정에 하자가 있어도 의결된 법률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 등 우리 사회 뜨거운 쟁점에 대해 전방위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거칠어 보이긴 해도 저자의 비판은 결코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 역사에서 찾아낸 적절한 전거를 활용하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이론을 적용, 유려한 문체로 현실과 비유해 풀어썼다. 따라서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함의를 쉽게 알 수 있다.

    역사학자 집안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 때문에 오히려 방황했던 역사학자가 환갑에 이르러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자리를 찾은 다음, 역사학의 엄정한 잣대로 마주한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한 이 책은 우리 사회가 맞이한 위기의 본질과 그에 대한 합리적 대책을 내놓고 있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어야 비로소 경기의 규칙이 드러나는 것처럼 규칙의 본질은 비규칙적일 때 드러난다. 위기에 처한 뒤 자세가 한껏 흐트러진 우리 사회를 향해 그동안 보기 어려웠던 ‘엄정한 심판’ 김기협이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는, 그래서 울림이 크고 우렁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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