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섣달그믐에는 어린 아이들이 붉은 바지를 입고 처용무를 춰 궁궐 내 악귀를 쫓았다.
또 ‘고려사(高麗史)’ 제64권 군례조(軍禮條)의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에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귀신을 쫓는 벽사(邪)를 위하여 나례의식을 주관해 궁(宮)이 정(淨)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정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했다”라고 적혀 있다.
왁자지껄 진자 12명은 악귀 내쫓는 역할
큰 액막이굿인 대나지례(大儺之禮) 거행 의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담당부서에서는 왕에게 주달하여 12∼16세 사람 중에서 선발해 진자(子)로 삼았다. 탈을 쓰고 붉은 바지를 입은 진자 24명을 1대(隊)로 했다. 이 중 집사자(執事者) 12명은 붉은 수건에 붉은 창옷을 입고 채찍을 잡는다(12귀신이 되어 악귀를 쫓는 역할). 별도의 악사 22명 중 1명은 방상씨(方相氏·귀신을 쫓는 사람)라고 해서 네 눈 달린 황금빛 탈을 쓰고 곰 가죽으로 만든 검정 옷에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든다. 또 다른 한 명은 창수(唱帥·먼저 외치는 사람)라고 하여 탈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든다. 고각군(鼓角軍·북을 두드리고 피리를 부는 사람) 20명을 1대로 하여 4명은 기를 잡고 4명은 피리를 불고 12명은 북을 치면서 금중(禁中·궁궐)의 악귀를 쫓기로 돼 있다. (중략) 굿하는 사람들이 대별로 궁문 밖에 모이면 내시(內侍·국왕 측근의 엘리트 관료)가 왕이 있는 내전 앞으로 가 진자가 다 모였으니 궁중의 역귀(疫鬼)를 쫓아낼 것을 아뢰고, 굿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해 궁중으로 들어가게 한다. 진자들은 북을 치고 왁자지껄하게 궁으로 들어가는데 방상씨는 창을 들고 방패를 휘두른다. 창수는 진자 12명을 인솔하며 외치기를 ‘열두 귀신으로 하여금 흉악한 악귀들을 내쫓을 것이며, 너희들의 몸뚱이를 물어뜯고 허리뼈를 꺾으며 살을 찢고 내장을 뽑게 할 것이다. 너희들이 빨리 물러가지 않고 뒤떨어지는 놈은 열두 귀신의 밥이 될 것이다.’ (중략) 그리고 굿한 음식과 술은 구덩이에 파묻고 각각 물러간다.
이 의식에서 악공들의 연주에 맞춰 역귀를 쫓을 때 내세운 동남동녀(童男童女) 진자들은 처용무(處容舞)를 추었고, 나례 때 희생(犧牲·집단 성원의 안녕과 동식물의 증식을 기원해 행하는 종교적 행위)으로는 닭 다섯 마리를 잡아 역기(疫氣)를 쫓았다. 고려 정종(靖宗)이 조서에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후 호생(好生·생명을 구함)할 것을 마음먹고 새, 짐승, 곤충까지 모두 나의 혜택을 입게 하려 했다. 그런데 연말 액막이굿에 닭을 다섯 마리나 잡아 역귀를 구축하려 하니 내 마음이 몹시 아프다. 될수록 다른 것으로 대용하게 하라”고 이르니 사천대(司天臺)에서 “‘서상지(瑞祥志)’에 따르면 12월에 행하는 큰 액막이굿을 할 때 해당 부서에 지시해 막대기로 심을 박고 흙으로 소를 만들어서 찬 기운을 가시게 한다고 했으니 각각 길이 1척, 높이 5촌에 달하는 황토우(黃土牛) 네 마리를 만들어 닭 대신에 사용케 하기 바랍니다”라고 아뢰어 왕이 그대로 따랐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달집태우기 행사도 액막이와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자정에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爆竹)을 터뜨려 집 안에 있는 사귀(邪鬼)를 몰아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고 새해 첫날, 설날을 경건하게 준비했다. 그래서 설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듯하다. 새해에 낯섦, 즉 새해라는 문화적인 시간 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속성을 가장 강하게 띠는 날이 바로 설날이었기 때문이다.
‘설’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이미 신라 때 민간에서 널리 사용한 말이라고 짐작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 편의 원효불기(元曉不羈)를 보면 원효의 이름에 대한 유래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원효는 역시 방언으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로 첫 새벽(원효)이라 불렀다(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 言稱之始旦也).” 원효라는 말은 시단(始旦)이며 그것은 원단(元旦)을 뜻하므로, 신라인들은 그것을 원단을 뜻하는 ‘설’로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를 지칭하는 ‘설’이라는 말이 이미 고대로부터 널리 쓰여왔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로 전해져왔음을 의미한다.
거문고 갑 안에서 중과 궁주가 간통
각종 세시기가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새해라는 시간 질서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신일은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거문고 갑을 쏘다(射琴匣)를 보면 나온다.
소지왕(炤知王) 10년,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라고 했다. 왕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하니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왕에게 바치니 왕이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 차라리 떼어보지 않아 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보니 “금갑(琴匣)을 쏘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쐈더니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금갑의 화(禍)를 면한 뒤 사람들은 “만약 까마귀가 아니었더라면 임금의 몸은 화를 입었을 것”이라며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를 지내며 모든 일에 금기(禁忌)하고 근신(勤愼)해 신일로 삼았다. 이날을 달도()라고 칭하며 슬프게 근심하여 조심했다.
이와 같이 설은 새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날이므로 삼가고 조심함으로써 순조롭게 새해에 통합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녔다. 이런 뜻은 원일(元日),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 등의 한자에도 내포돼 있다.
이제 궁궐에서 거행하던 나례의식은 사라졌으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섣달그믐에 대청소를 하고 밤중에 폭죽을 터뜨려 정(淨)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하려는 유풍이 전승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믿고 이날을 해지킴, 별세(別歲), 수세(守歲) 등으로 부르며 등촉을 밝히고 밤을 지새웠다. 우리도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며 설날을 맞이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