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외국어 영역의 듣기 비중이 50%로 확대되는 등 영어교육에서 ‘듣기’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하 교육청)이 12월28일 발표한 ‘2010년 주요 업무계획’에서도 영어교육 중 회화 및 실용영어를 중요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교육청은 중·고교의 영어과목 평가에서 듣기, 말하기, 쓰기 능력을 50% 이상 반영하고 그중 말하기 비중이 최소 10% 이상 되도록 권장해왔다. 이번 발표에서는 이 비중을 상향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2009년 교과부가 개발한 ‘한국형 토플’ 국가영어능력평가도 2012년부터 본격 시행된다. 이 시험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등 4개 영역으로 이뤄졌는데, 듣기와 말하기의 비중이 높다. 교과부에 따르면, 2015년부터 이 시험은 수능의 외국어 영역을 대체할 가능성도 있다. 2012년 시행해본 후 대체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처럼 교육 당국은 영어교육에 대한 다양한 개선책을 마련해 발표했다. 개선책의 근간에는 ‘사교육이 아닌 공교육 중심’ ‘듣기를 비롯한 실용영어 중심 학습’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하지만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혹시 또 다른 의미의 사교육을 확대하는 건 아닐까.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가운데)이 2009년 12월22일 ‘2010년 주요 업무계획’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다.
‘강남불패’ ‘교육특구’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서울 강남지역은 교육 분야에서 막강 파워를 자랑한다. 명문대와 특수목적고등학교(이하 특목고) 진학률 전국 최고, 각종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서 최상위권 유지. 강남의 인문계 고교인 휘문고는 명문대 진학률이 웬만한 특목고보다 높을 정도다. 그런데 강남지역의 학력을 과목별로 나눠보면 가장 빼어난 과목이 바로 영어다. 다음은 영어 학습지회사 홍보 관계자의 말이다.
“매년 영어 경시대회를 개최하는데, 처음 몇 해는 지역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서울 강남지역 학생들이 상위권 상을 거의 싹쓸이하더라고요. 지금은 지역 할당제를 도입해 지역별로 상을 주고 있지만, 전국 단위 대회에선 강남지역 학생들이 대부분 상을 휩쓸어요.”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는 먼저 듣기와 말하기로 습득하고, 그 다음 읽기와 쓰기로 이어진다. 영어 역시 듣기 환경에 많이 노출될수록 습득이 쉬워진다. 강남지역 학생들이 우수한 영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도 선천적 언어 자질 때문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영어환경에 자주 노출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학원에서 영어수업을 듣는 것은 물론,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영어 캠프에도 참여하며, 영어권 나라로 유학까지 다녀온다면 영어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바탕에 ‘경제력’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따라서 일부에서 걱정하듯, 수능 외국어 영역 듣기 비중의 50% 상향 조정 같은 실용영어 및 영어회화를 강조하는 교육 개선안은 ‘강남 아이들’로 상징되는 경제력을 갖춘 층에 유리할 가능성이 크다. 교과부는 이런 개선안들이 공교육 중심으로 자리잡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영어 듣기평가 비중을 높이면 어학원에 오래 다녔거나 유학을 다녀온 아이에게 유리하다. 학교의 영어 듣기교육은 인원이 많은 데다 음향시설도 사설학원보다 뒤떨어진다. 오히려 사교육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K고교 영어교사)
“학교 혹은 시·도교육청 주최로 개최되는 각종 영어 관련 경시대회가 많다. 토플, 토익 등 영어인증점수를 대입에 반영하지 않는다면 이런 대회들의 결과가 더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회 준비를 위해 학생들은 또 다른 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A초교 교사)
*2009년 3월 교육시민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서울 강남과 강서, 경기도 분당과 서부, 북부 지역에서 각각 초등학교 1곳씩을 선정해 총 5개 학교, 238명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우리나라의 입시 체제에서 영어는 ‘무한경쟁’이다. 학년도, 영역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제 학년 과정이 아닌 성인 과정의 인증점수를 따야 유리하다. 물론 인증점수는 높을수록 좋다. 청심국제중 합격생 중 성인용 인증시험인 IBT 토플 100점 이상자가 13%에 달한다는 통계는 ‘무학년, 무영역, 무한경쟁’을 실감케 한다.
2010학년도 수능은 외국어 영역이 까다롭게 출제돼 외국어고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대다수 학생 및 학부모는 외국어 영역의 듣기 비중을 높인다는 교육당국의 발표에 간담이 서늘해진 것은 불문지사.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많이 만나 상담해온 필자가 장담컨대 ‘학교에서 영어수업만 열심히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 영어는 내신성적에만 필요할 뿐, 영어 실력 쌓기는 어학원 등 사교육을 통해서 이뤄진다. 다음은 필자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영어교육의 대안이다.
△초·중·고 과정에서 내신과 입시에 필요한 영어단계를 정확히 제시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국가영어능력시험 ○급, 중학교 3학년까지는 ○급, 고등학교 3학년까지는 ○급 같은 식이다. 시험은 학교에서 영어수업만 들으면 통과할 수 있는 난이도여야 한다.
△학생 간 수준별 학습이 이뤄져야 한다.
△국제중, 특목고, 대학 입시에서 국가인증시험 외의 여타 경시대회 등은 평가에 반영할 수 없도록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듣기, 말하기, 쓰기 등의 평가 비중을 높이기 전에 전국 학교의 음향 시스템이나 영어 교사 등 영어학습 환경을 어학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보완해야 한다. 학생 수를 조절하는 건 필수.
△영어인증시험의 경우 초등, 중·고등, 성인 등 단계를 정확히 나눠 지키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PELT(Practical English Language Test·국가 공인 실용영어 테스트)를 예로 들면 초등학생은 펠트 주니어만 치를 수 있도록 하고, 스탠더드(중·고생용)와 어드밴스드(성인용)는 지원하지 못하도록 한다. 단, 외국어 영재성을 인정받는 학생에 한해 성인용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하되, 영어 영역의 포트폴리오로만 넣을 뿐 당락을 좌우하는 잣대로 사용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