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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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라 신바람, 울려라 ‘여민락’(與民樂)

한국인은 모두가 하나 될 때 즐거움과 행복 느끼며 발전

  •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입력2009-12-29 1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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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민족의 피 속엔 원래부터 예능의 ‘끼’가 숨겨져 있다. 절대적 빈곤과 경직된 사회 분위기 탓에 발현되지 못한 선천적인 ‘예능력’이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맞아 이제야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타고난 예능력의 유래, 흥과 신바람의 ‘필연적 관계’를 짚어본다.
    불어라 신바람, 울려라 ‘여민락’(與民樂)
    한국인은 ‘내 집’ ‘내 마누라’ ‘내 부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마누라’ ‘우리 부모님’이라 부른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두 그루의 대나무를 보자. 지상에서 보면 각각의 대나무로 보이지만, 지하에서 보면 한 뿌리로 연결돼 있다. 그러니 지하를 기준으로 보면 두 그루의 대나무라 칭하기 어렵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몸은 별개지만 마음만큼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마음’이란 말을 곧잘 쓴다.

    한국인은 ‘하나 되기’를 좋아한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족보를 만드는 것도 할아버지를 찾아가면 ‘하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지진, 태풍을 극복하느라 현재를 챙기기 바쁜 일본인에 비해 근원을 생각할 여력이 생기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 되자’는 말을 잘 쓴다. 외국인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들에겐 ‘협조하자’는 말은 있어도 ‘하나 되자’는 말은 없지 않은가. 하나 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도 나타난다. ‘한나라당’ ‘하나은행’ ‘우리은행’ ‘한겨레신문’ 등도 이런 정서에서 비롯됐다.

    한(恨)을 부르는 이별과 고립 못 참아!



    ‘하나 되기’를 좋아하는 만큼 고립되는 것도 싫어한다. 이별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의 이별가와 외국의 이별가는 차원이 다르다. 외국의 이별가에선 이별을 미화하고, 이별을 하더라도 좋은 관계로 지내자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이별가는 떠나는 님에게 ‘가지 마라, 가지 마라’면서 ‘가거들랑 빨리 돌아오라’고 하고, 그래도 간다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라’며 이별을 용납하지 않은 채 처절히 절규한다.

    그렇지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기 때문에 고립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 경쟁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 경쟁하면 할수록 열 받아 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런 일로 하나가 되지 못하다 보면 한이 맺히게 마련이다.

    두 마리의 돼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한 마리는 원래부터 자신이 돼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돼지는 현재의 자기에게 불만이 없다. 열심히 돼지죽을 먹고, 열심히 돼지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다른 돼지는 마술에 걸려 돼지가 돼버린 신세다. 그 돼지는 돼지로 취급당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다. 돼지라 불리는 것도 싫고 돼지죽을 먹는 것도 싫다. 현재의 모습뿐 아니라 삶 자체가 한스럽다.

    후자의 돼지가 한국인이고 그 한이 한국인의 한이다. 한국인에게 한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아줌마는 ‘아줌마’로 불리는 것이 불만이고,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아저씨’라 불리는 것이 불만이다. 자신을 돼지(아저씨, 아줌마)가 아닌 고귀한 존재(왕자, 공주)라 여기는 까닭이다. 아줌마 대신 사모님이라 부르고, 아저씨 대신 사장님이라 부를 때 반색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반면 외국 아줌마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자신을 잘못 본 게 아니냐며 불편해한다).

    이 불만을 해소하려면 한을 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종교적인 깨달음과 학문적인 깨침이 필요하다. 그래선지 한국에는 예로부터 종교와 철학이 발달했다. 깨침이란 남과 내가 남남이 아니라 하나로 통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나는 너와 하나이고, 나는 모두이며 나는 하늘이고 우주다.

    불어라 신바람, 울려라 ‘여민락’(與民樂)

    1 2 김홍도의 ‘점심`’, ‘고누도’ .

    언제나 하나 될 준비 완료, 촉매제 필요

    이런 깨침을 얻은 사람의 삶은 더 이상 개체적인 삶이 아니다. 개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고통일수록 하나 된 삶을 사는 것은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이 다름 아닌 여민락(與民樂)이다. 여민락은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행복감이다.

    여민락이란 말은 ‘맹자’에서 유래했다. 맹자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이 더 즐겁다고 전제하고,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할 때 백성도 왕이 사냥을 하거나 풍악을 울리는 것을 좋아할 거라며 여민동락(與民同樂)이란 말을 사용했다(1445년 세종 27년에 여민동락의 의미를 빌려 ‘여민락’이라는 음악을 만들어서 궁중의 연향(宴饗)에서 많이 연주했는데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평가받는다).

    불어라 신바람, 울려라 ‘여민락’(與民樂)

    김홍도의 ‘풍속도첩’.

    한국인은 남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사람은 원래 혼자라는 생각에 혼자서도 식당을 잘 가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선지 한국인은 언제나 하나 될 준비가 돼 있다. 어떤 촉매가 있기만 하면 바로 하나가 된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인이 보여준 놀라운 길거리 응원도 바로 그러한 예다. 그것은 하나가 된 한국인이 벌인 거대한 축제였다. 신바람이 나면 한국인은 하늘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모두 성스러워진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는데도 길거리에 쓰레기가 남지 않았다. 외국의 언론들은 이를 기적인 양 보도했다.

    한국 땅에는 가끔 신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침체한다. 저 옛날 고구려시대 때 행하던 동맹(東盟), 부여에서 행하던 영고(迎鼓), 마한이나 예에서 행하던 무천(舞天) 등이 모두 신바람을 일으킨 촉매였다. 신라시대의 화랑이 성공한 것도 신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고려 태조 왕건도 신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에 성공했다. 세종대왕의 정치는 신바람을 일으킨 정치였고, 이순신 장군의 전쟁은 신바람을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도 신바람을 일으킨 사랑이었다.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칠 때 한국인은 신이 난다.

    한국인은 지금도 하나가 되고 싶어 목이 말라 있다. 그리고 신바람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다. 다만 촉매가 없어 촉매제를 기다린다. 촉매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신바람이 날 것이고, 한국의 예술은 그 신바람을 타고 활활 타오를 것이다. 기다리지만 말고 우리 스스로 촉매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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