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은 지난해 7월16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미래한국헌법연구회 창립기념식에서 축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조차 국회 차원의 개헌 논의에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지난해 의장 취임 직후 개헌 논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한나라당 내 친(親)이명박계와 청와대 측의 강한 반발로 논의 자체가 무산된 데 대한 ‘불편함’도 숨어 있는 듯하다.
김 의장은 이날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의장 취임 직후 가동된 의장 직속 ‘헌법연구 자문위원회’(위원장 김종인·이하 헌법자문위)는 지난 2월 말 어느 정도 연구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김 의장이 이를 중단시켰다. 여야 대치정국이 계속되면서 개헌 논의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기회를 엿보다가 ‘D-데이’로 잡은 게 7월17일 제헌절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 ‘비정규직법’과 ‘미디어관계법’ 등 민감한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정면으로 맞부딪치면서 임시국회 개회조차 불투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의장은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가지 않을 분위기다.
김 의장은 일부 일정만 조정해놓은 상태다. 의장비서실 측에 따르면, 당초 7월10일을 전후해 헌법자문위가 먼저 최종보고서를 발표한 뒤 김 의장이 보고서의 취지와 배경 등을 설명하고 개헌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펼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회 파행이 이어지고, 비정규직법안 처리 문제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헌법자문위의 보고서 발표를 제헌절 이후로 미룬 것. 그렇지만 개헌의 필요성과 강력한 추진 의지를 담은 제헌절 기념사는 그대로 발표하기로 했다.
제헌절 기념사에서 공론화 예상
김 의장은 이어 임시국회 마지막 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정치권에 ‘개헌특별위원회’(이하 특위)를 공식 제안할 계획이다. 9월 정기국회부터 특위가 본격 가동돼야 내년 초까지 개헌 논의가 마무리될 수 있고,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가능하리라는 나름의 ‘시간계획표’에 따른 수순이다.
마침 ‘미래한국헌법연구회’(이하 헌법연구회)가 7월9일과 10일 양일간 국회에서 ‘대통령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역대 국회의장을 초청해 개헌좌담회를 연 데 이어, 국회의원 개헌토론회를 개최한 것은 김 의장으로서는 반가운 일. 여야 현역의원 186명이 가입한 국회 내 최대 연구모임인 헌법연구회가 여야 대치국면에서 개헌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김 의장과 여야 특위에서 논의될 개헌 방향은 어떤 내용일까. 헌법자문위에 참여한 학자들은 그동안 헌법연구회의 각종 세미나에 참석해 자문 구실을 해온 학자들과 상당수 중복된다. 결과적으로 헌법자문위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한 보고서 내용은 헌법연구회 소속 여야 의원들의 논의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헌법연구회 의원들의 논의 방향과 헌법자문위에서 작성한 최종보고서 내용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공개되진 않았지만, 헌법자문위 최종보고서에는 우리나라 권력구조 개편 방향으로 미국식 대통령제와 권력분점형 정부제 두 가지를 가장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미국식 대통령제는 3권분립이 분명하고 4년 중임제에 정·부통령제를 가미한 권력구조 형태다. 권력분점형 정부제는 내각제의 한 형태인 이원정부제보다 내각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의회 권한도 강화된 독특한 권력구조 형태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은 축소되는 것.
의장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권력분점형 정부제는 기존의 내각제나 순수대통령제보다 진보한 형태의 권력구조다. 예민한 문제가 많을 경우 운영하기가 훨씬 어렵다”면서 “대화와 토론문화가 정착된 사회에서나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과연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미국식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가능하면 상·하 양원제도 시도해볼 만하다는 게 김 의장의 생각이라는 것. 반면 헌법연구회 소속 의원들은 권력분점형 정부제를 좀더 선호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어떤 권력구조가 우리나라에 더 적합할지에 대한 견해는 아직 분분하다.
하지만 김 의장이나 헌법연구회 소속 의원 대부분은 어떤 권력구조를 선택하느냐에 앞서 의회의 권한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그동안 5년 단임제에서 드러난 갖가지 문제점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된 데서 오는 폐해라는 지적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전제로, 의회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법률안제출권이나 예산편성권을 의회로 이관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감사원의 정부 회계감사 기능도 의회로 가져와야 한다는 게 의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또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기 위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인준청문회’로 바꾸고, 의결정족수도 현행 과반수에서 3분의 2나 4분의 3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가능할까
정부 예산을 지금처럼 행정부가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률주의를 적용해 의회에서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도 논의 중인 방안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도 상시 열려야 한다. 이런 방안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권력분점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등 3권분립의 완결이다.
헌법자문위 김종인 위원장은 “대통령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치유하려면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 심화, 법치국가 등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개헌이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개헌은 가능한 것일까. 김 위원장은 “끊임없이 대립으로만 치닫고 있는 정치권의 오늘을 보면 과연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개헌안을 만들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사실상 개헌이 어렵다”고 전망했다. 헌법연구회 한나라당 간사인 이주영 의원 측도 “이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한데, 대통령 정무비서실 측 관계자를 통해 전해들은 바로는 아직은 개헌에 부정적인 기류가 강한 것 같다”면서 “개헌은 언제든 필요한 일인 만큼 국회에 개헌 논의를 위한 ‘상설기구’만 만들어놓더라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회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김 의장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그동안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김 의장의 의지가 강한 만큼 결국 국회에서 논의하기 나름”이라며 기대를 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