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바꿔 ‘예술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면 어떨까? 아닌 게 아니라 적지 않은 문학작품과 영화의 주제, 소재, 모티프가 ‘죽음’이다. 통속 드라마의 줄거리를 극적으로 이끄는 단골 장치도 주인공이 ‘느닷없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 아닌가. 이런 경우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하나의 장치로서의 죽음이라 하겠지만,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죽음에 접근하는 문학과 영화도 드물지 않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세종서적 펴냄)을 빼놓을 수 없다. 근위축증, 즉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스승 모리 슈워츠 교수와 화요일마다 10여 차례 만나 나눈 얘기를 엮은 책이다. 1997년에 출간돼 ‘뉴욕타임스’ 비소설 베스트셀러에 200주 넘게 머무르며 41개 언어로 번역됐다. 제자와 스승이 묻고 답한다.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셨어요?”
“미치, 난 나이 드는 것을 껴안는다네.”
“껴안아요?”
“나이 드는 것은 단순히 쇠락만은 아니네. 그것은 성장이야. 곧 죽게 되리라는 부정적인 사실 그 이상이지. 그것은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때문에 더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고.”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죽음에 관한 명언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진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고 죽을 수 있네. 자네가 가꾼 모든 사랑이 거기 그 안에 그대로 있고, 모든 기억이 여전히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네. 자네는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어. 자네가 여기 있는 동안 만지고 보듬었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죽음은 세상을 떠난 사람 본인보다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문제다. 고아 소녀 서머는 늘 사랑으로 자신을 대해주던 메이 아줌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남편 오브 아저씨와 함께 상실감에 빠진다. 괴짜 친구 클리터스의 제안으로 이들은 메이 아줌마의 영혼과 만나고자 심령교회를 찾아 떠나지만 교회는 문을 닫았고 아줌마의 영혼과도 만나지 못했다. 비로소 아줌마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서머는 슬프게 운다.
떠난 사람보다 떠나보낸 사람들의 문제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사계절출판사 펴냄)는 청소년용으로 출간됐지만 성인이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서머가 말한다.
“지금 메이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와 클리터스에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메이 아줌마는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사랑의 기억으로 서머와 오브 아저씨의 가슴속에 살아남았다. 그는 세상을 떠났으되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 펴냄)에서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베로니카는 제목 그대로 죽기로 결심하고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지만, 깨어나 보니 하늘나라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는 게 아닌가.
더구나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심장이 심각하게 손상돼 남은 생이 일주일 남짓밖에 안 된다. 시한부 인생이 되고 나서 삶에 대한 애착이 싹트는 베로니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슨 실수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 단 한 가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실수만 빼고.”
베로니카는 며칠 남지 않은 생이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지만 정작 그걸 실현하는 사람은 단지 몇 사람에 불과해. 문제는 그럴 때, 꿈을 실현하지 못한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끼는 데 있어.”
“모범적인 삶의 교본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살라고 충고할 거야!”
베로니카의 일주일 남짓한 삶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 남은 시간이 하루인지 수십 년인지 알지 못하므로.
영화로 넘어가보자. 세계적인 패션전문지 ‘엘르’의 수석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는 43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20일 후 의식을 찾은 장은 왼쪽 눈꺼풀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눈 깜박이는 횟수로 철자를 나타내 책을 써 내려간다. 15개월 동안 20만 번 눈을 깜박이며 책을 써낸 그는 책이 나오고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영화 ‘잠수종과 나비’(동문선에서 펴낸 보비의 책 번역서 제목은 ‘잠수복과 나비’)는 죽음이 예정된 육체, 즉 잠수종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지만 영혼만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비처럼 날아다닌 사람의 이야기다. 삶의 존엄이 곧 죽음의 존엄이기도 하다면,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법적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는 존엄사 관련 영화에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가 있다.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 전신마비가 된 라몬 삼페드로는 가족의 뒷바라지 속에 침대에서 입으로 펜을 잡고 글을 써왔지만 간절한 소망은 단 하나, 존엄사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법정투쟁도 불사한다.
그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친구들이 나선다. 전망 좋은 바닷가 호텔방을 마련하고 청산가리를 준비해 빨대를 꽂아주는 친구들. 법원 앞에서 라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의 문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삶은 권리다. 의무가 아니다.’
삶의 존엄이 곧 죽음의 존엄
롭 라이너 감독의 ‘버킷 리스트’에서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재벌사업가 에드워드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두 사람은 병실을 박차고 나온다. 이후 영화는 일종의 버디 무비, 즉 두 사람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갖가지 일을 벌이는 이야기로 전개되고 가족과의 화해, 삶에 대한 깨달음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할리우드적 가벼움과 통속적 감동’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영화지만, 영화 속에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책과 영화들은,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잘 산다는 것과 불가분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 진정한 의미의 웰빙과 웰다잉은 동전의 양면인 것을.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세종서적 펴냄)을 빼놓을 수 없다. 근위축증, 즉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스승 모리 슈워츠 교수와 화요일마다 10여 차례 만나 나눈 얘기를 엮은 책이다. 1997년에 출간돼 ‘뉴욕타임스’ 비소설 베스트셀러에 200주 넘게 머무르며 41개 언어로 번역됐다. 제자와 스승이 묻고 답한다.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셨어요?”
“미치, 난 나이 드는 것을 껴안는다네.”
“껴안아요?”
“나이 드는 것은 단순히 쇠락만은 아니네. 그것은 성장이야. 곧 죽게 되리라는 부정적인 사실 그 이상이지. 그것은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때문에 더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고.”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죽음에 관한 명언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진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고 죽을 수 있네. 자네가 가꾼 모든 사랑이 거기 그 안에 그대로 있고, 모든 기억이 여전히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네. 자네는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어. 자네가 여기 있는 동안 만지고 보듬었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죽음은 세상을 떠난 사람 본인보다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문제다. 고아 소녀 서머는 늘 사랑으로 자신을 대해주던 메이 아줌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남편 오브 아저씨와 함께 상실감에 빠진다. 괴짜 친구 클리터스의 제안으로 이들은 메이 아줌마의 영혼과 만나고자 심령교회를 찾아 떠나지만 교회는 문을 닫았고 아줌마의 영혼과도 만나지 못했다. 비로소 아줌마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서머는 슬프게 운다.
떠난 사람보다 떠나보낸 사람들의 문제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사계절출판사 펴냄)는 청소년용으로 출간됐지만 성인이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서머가 말한다.
“지금 메이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와 클리터스에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메이 아줌마는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사랑의 기억으로 서머와 오브 아저씨의 가슴속에 살아남았다. 그는 세상을 떠났으되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 펴냄)에서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베로니카는 제목 그대로 죽기로 결심하고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지만, 깨어나 보니 하늘나라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는 게 아닌가.
더구나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심장이 심각하게 손상돼 남은 생이 일주일 남짓밖에 안 된다. 시한부 인생이 되고 나서 삶에 대한 애착이 싹트는 베로니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슨 실수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 단 한 가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실수만 빼고.”
베로니카는 며칠 남지 않은 생이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지만 정작 그걸 실현하는 사람은 단지 몇 사람에 불과해. 문제는 그럴 때, 꿈을 실현하지 못한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끼는 데 있어.”
“모범적인 삶의 교본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살라고 충고할 거야!”
베로니카의 일주일 남짓한 삶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 남은 시간이 하루인지 수십 년인지 알지 못하므로.
영화로 넘어가보자. 세계적인 패션전문지 ‘엘르’의 수석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는 43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20일 후 의식을 찾은 장은 왼쪽 눈꺼풀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눈 깜박이는 횟수로 철자를 나타내 책을 써 내려간다. 15개월 동안 20만 번 눈을 깜박이며 책을 써낸 그는 책이 나오고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영화 ‘잠수종과 나비’(동문선에서 펴낸 보비의 책 번역서 제목은 ‘잠수복과 나비’)는 죽음이 예정된 육체, 즉 잠수종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지만 영혼만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비처럼 날아다닌 사람의 이야기다. 삶의 존엄이 곧 죽음의 존엄이기도 하다면,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법적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는 존엄사 관련 영화에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가 있다.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 전신마비가 된 라몬 삼페드로는 가족의 뒷바라지 속에 침대에서 입으로 펜을 잡고 글을 써왔지만 간절한 소망은 단 하나, 존엄사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법정투쟁도 불사한다.
그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친구들이 나선다. 전망 좋은 바닷가 호텔방을 마련하고 청산가리를 준비해 빨대를 꽂아주는 친구들. 법원 앞에서 라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의 문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삶은 권리다. 의무가 아니다.’
삶의 존엄이 곧 죽음의 존엄
롭 라이너 감독의 ‘버킷 리스트’에서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재벌사업가 에드워드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두 사람은 병실을 박차고 나온다. 이후 영화는 일종의 버디 무비, 즉 두 사람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갖가지 일을 벌이는 이야기로 전개되고 가족과의 화해, 삶에 대한 깨달음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할리우드적 가벼움과 통속적 감동’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영화지만, 영화 속에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책과 영화들은,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잘 산다는 것과 불가분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 진정한 의미의 웰빙과 웰다잉은 동전의 양면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