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어려운 이웃 초청 오찬 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노점상 최정자 씨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며 격려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화급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추경을 편성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채무가 폭증하고 있는 데다 수십조원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일으켜야 할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추경 편성의 타당성과 시기, 내용 등에 관해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
우선 이번 추경 편성은 급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예산으로 편성된 285조원을 제대로 집행하지도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추경은 4월 개최 예정인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가 자화자찬용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G20에서 30조원 추경 편성을 내세우며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한들 귀담아들을 나라는 별로 없을 텐데 말이다. 30조원의 추경이 과연 타당하고 시의적절한 지,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건지 정부·여당은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급조된 추경은 각 정부 부처와 여권이 마구잡이로 짜낸 사업들에 쓰이게 마련이다. 당초 예산 배정에서 밀려난 사업, 여권이 내년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추진하려는 각종 선심성 사업 등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30조원에서 재정적자분 보전용 12조원을 제외한 18조원의 용도를 마련하려면 대규모 건설토목 사업과, 전달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 급조된 일회성 사회복지 정책들로 짜깁기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정부·여당이 발표한 생계곤란 가구에 대한 현금 지급 등 6조원 규모의 민생안정 대책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 긴급 대책은 정책적 일관성과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는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상속세 부담 완화 등 ‘부자 감세’를 단행했다. 반면 재정 부담을 이유로 차상위 계층의 건강보험 혜택을 없애는 등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 지원을 오히려 줄였다. 그러면서도 민생안정 대책을 발표하며 생색을 내고 있다. 정부·여당이 이제 와서 ‘일자리’와 ‘서민 생계지원’을 들먹이는 것은 막대한 부자 감세와 토건 예산 투입에 대한 ‘반발 무마용’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또한 민생안정 대책은 시행 과정에서도 많은 혼란이 예상된다. 체계적인 전달체계가 구축돼 있지 않고, 대상자 선정 기준과 방법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 후 ‘민생 안정’이라니…
이번 추경의 재원은 국채 발행 등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미리 당겨쓰는 돈이다. 그 부담의 상당 부분은 미래세대의 빚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번 추경의 사용은 경제적 약자를 체계적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미래 자식세대를 위한 전략적 투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부양책에서 배울 부분이 많다. 오바마 행정부는 의료전산정보망 구축과 21세기형 교실·실험실·도서관 건설, 신재생 에너지 기술개발, 그동안 부진했던 노후 사회 인프라 유지보수 등에 예산 대부분을 쓰기로 했다. 또 미국 자동차 회사 ‘빅3’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도 친환경차량 기술개발 자금을 저리 융자하는 방식을 택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전기자동차 시대가 도래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모두 세 차례의 긴급 경기부양책을 마련한 일본도 많은 정치적 논란에도 경제위기에 따른 서민과 저소득층 생활, 그리고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오죽하면 지난해 10월 발표한 경기부양책의 제목부터가 ‘생활대책’이었을까.
반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를 볼 때 이번 추경안은 우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현 정부의 경기부양 대책은 현재의 화급한 문제에 대응하고 미래를 전략적으로 대비하기보다는 과거 회귀적이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 여전히 70, 80년대 개발연대식의 토건사업에 매달렸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4대강 하천정비 사업이나 경인운하 사업 등 이름만 녹색인 각종 토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버블 붕괴로 발생한 경제위기 때 버블을 초래한 산업에 자원을 쏟아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오히려 문제만 더 키울 뿐이다. 과거 일본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도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인 1992년부터 1995년 초까지 5차례에 걸쳐 70조 엔의 경기부양 예산을 투입했다. 이는 한 해 전체 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그러나 일본은 0%대 성장률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과도한 토건 예산을 편성한 바람에 건설업계의 구조조정을 가로막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경기침체를 장기화했다. 일본도 당시 가라앉는 경기를 부양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제 충격의 총량을 키운 셈이 됐다.
막대한 국채 발행을 통해 추경 재원을 조달하는 것도 문제다. 국채 발행으로 시중 자금을 다 빨아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물량 쇼크’를 예상해 채권 시장이 불안해지고 있다. 현 정부는 한국은행이 국채 물량 전부를 소화할 것을 거론한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막대한 국채를 인수한다는 것은 돈을 찍어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물가상승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3월8일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의장(왼쪽)이 여의도 당사에서 추경안 등에 대해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물가가 상승한다면 추경 편성의 의미도 희석된다. 가계부문의 임금동결 내지는 임금삭감도 모자라 실질구매력까지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경기부양을 하겠다고 편성한 추경이 한편에서는 가계의 실질소득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급속도로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정부의 최대 책무는 서민 가계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자리와 소득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가와 환율 안정이 절실하다. 이 두 가지가 가계의 내수 소비를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경기불황을 이유로 노·사·민·정 대타협이라는 허울 아래 대대적인 임금삭감을 추진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는다며 금리인하로 물가와 환율 폭등을 방치한다. 그 결과 서민 가계는 이중, 삼중의 펀치를 맞고 있다. 임금·소득 감소와 예금이자 수입 감소에 물가·환율 급등으로 실질소득마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이런 잘못에 대한 반성은 없이 갑자기 수십조원의 국채 발행을 통한 대규모 추경을 당연시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