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항을 드나드는 항공기와 충돌 논란을 빚고 있는 제2롯데월드 조감도.롯데그룹과 국방부 측은 충돌 확률이 1000조 분의 1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처음 이 수치를 공표한 것은 ‘월간조선’ 2008년 9월호. ‘월간조선’은 ‘제2롯데월드 건물과 항공기 충돌 가능성은 1000조분의 1(미 연방항공청 충돌위험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서울공항에 연간 5만회 착륙을 가정할 경우 200억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할 확률’이라는 제목으로 이 수치를 공론화했다. 그 덕에 이 수치는 제2롯데월드의 안전을 홍보하는 대명사가 됐다.
2월3일 국회에서 열린 제2롯데월드 신축 관련 공청회에서 찬성 측 발표자로 나온 롯데물산 기준 사장은 “공인 충돌위험모델(CRM·Collision Risk Model)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에서도 초고층에 충돌할 확률이 1000조분의 1로 안전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김광호 군사시설기획관도 이 확률을 거론하면서 “제2롯데월드가 건설되면 서울공항을 출입하는 항공기와 충돌할 수 있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라고 공격했다.
한국항공대 송병흠 교수는 조금 신중하게 “2006년 국제기준을 적용한 전문가들에 의한 용역 결과(충돌위험모델 검증 및 분석 보고서)와 실제 작전을 수행하는 최근 공군 측의 판단 결과를 존중하더라도 비행 안전에는 문제없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안전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1000조분의 1이라는 수치가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계산법으로 나온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국내 회사가 CRM 이용해 계산
최근 기자는 찬성자 측이 공개하지 않은 ‘확률 계산 문건’을 입수해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했다. 그 결과 ‘이 자료를 근거로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도 항공기와 충돌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000조분의 1이라는 충돌 확률을 계산한 곳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문(文)엔지니어링’의 김영일 상무팀이고, ‘사진1’은 이 팀에서 제작한 CRM 검증 결과 문건이다. “롯데 측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CRM을 이용해 제2롯데월드와 항공기가 충돌할 확률이 1000조분의 1이라는 계산을 해줬다”는 김 상무는 문건을 작성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진 1 ICAO의 CRM을 토대로 문엔지니어링이 계산한 서울공항 서편 활주로의 ILS 유도 시 충돌 확률에 대한 보고서. 사진 2 제2롯데월드에 인접한 동편 활주로의 항공기 충돌 가능성은 계산하지 않았다.
김 상무는 “ICAO가 만든 프로그램인데 ‘월간조선’과 제2롯데월드 찬성자들은 왜 이를 미국 연방항공청(FAA)에서 만든 것인 양 주장하느냐”는 질문에는 “FAA도 이 프로그램을 사용해 충돌 위험성을 조사하므로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는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FAA가 직접 계산한 것이 아니라, 국내 엔지니어링 회사가 롯데 측의 의뢰를 받아 계산해준 것이 1000조분의 1이라면 이를 공인된 수치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이 수치를 근거로 충돌 위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기자와 전문가들은 이 문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이 분석은 서울공항에 착륙하려는 항공기가 ILS(Instrument Landing System·계기착륙 시스템) 유도를 받는 경우로만 한정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ILS는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착륙 시스템으로 꼽힌다.
이 시스템은 활주로 연장선과 착륙하려는 항공기 및 활주로까지의 각도를 전파로 항공기 조종사에게 정확히 알려준다. 따라서 조종사는 공항에서 쏘는 이 전파를 잡아 ‘자동 비행(auto pilot)’하도록 조정해놓으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 그러나 공항의 ILS 장비가 고장났거나 항공기에 ILS 수신기가 없는 경우, 그리고 ILS 수신기는 있어도 자동비행 장치가 없는 항공기의 경우 이 시스템의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김 상무는 ILS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항공기와 제2롯데월드가 충돌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 이유를 “CRM 자체가 ILS 유도를 전제로 한 것이라 ILS 유도가 되지 않는 경우는 계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ILS는 대형기를 위해 개발된 시스템이다. 대통령 전용기, 수송기, 정찰기 등 대형 군용기가 자주 출입하는 서울공항에는 ILS 장비가 설치돼 있다. 그러나 군용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전투기는 대부분 ILS 유도로 착륙하지 않는다. 그 대신 PAR(Precision Approach Radar)라는 정밀착륙 시스템이 쓰인다.
유사시 적은 공항부터 공격할 것이므로 최북단에 있는 서울공항의 ILS 장비는 파괴될 수도 있다. 서울공항은 ILS 장비가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격됐거나 연료가 떨어진 전투기가 비상 착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CRM은 이러한 상황은 가정조차 하지 않은 프로그램이다.
1000조분의 1이라는 충돌 확률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이 계산이 서편 활주로(주활주로)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는 데서 또 한 번 확인됐다. 서울공항에는 서편 활주로와 동편 활주로(부활주로)가 있는데, 제2롯데월드와 인접한 것은 동편 활주로의 연장선이다(‘사진2’ 참조). 제2롯데월드는 동편 활주로 쪽 비행안전구역선 바로 바깥에 자리해 이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2003년 12월1일 미국 연방항공청이 한국 항공안전본부에 보내온 메모랜덤. 롯데 측 주장과 달리 이 메모랜덤에는 제2롯데월드가 항공 안전에 위험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간접적으로 표현돼 있다.
동편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가 제2롯데월드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공군이 간접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최근 공군은 제2롯데월드와 동편 활주로 연장선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리기 위해 동편 활주로를 서쪽으로 3도 트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렇게 해야 제2롯데월드가 들어서도 계기비행 상태로 이착륙하는 것이 ‘간신히’ 가능해지기 때문.
롯데는 2003년에도 제2롯데월드 건설 문제를 놓고 공군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때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 산하 항공안전본부는 FAA에 제2롯데월드 건설에 대해 자문을 구한 바 있다. FAA에서는 3명의 조사단을 한국에 보내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얼마 뒤 그 결과를 항공안전본부에 메모랜덤(memorandum)으로 보내왔다.
FAA “위험 판정 사례 제공”
제2롯데월드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당시 FAA가 제2롯데월드를 지어도 안전하다고 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 근거로 메모랜덤을 제시했다. 그러나 메모랜덤은 그야말로 자문에 대한 의견을 적은 ‘메모’로, ‘보고서’로 번역되는 ‘report’보다도 격이 떨어진다. 이 메모랜덤에서 FAA는 책임을 피하려는 듯 활주로에 인접해 건설되는 초고층 빌딩 문제에 대해 빙빙 돌리는 복잡한 문장으로 답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FAA는 이 문제에 대한 법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건물이 들어서면 이 공항에 대한 ILS 같은 정밀 접근 절차는 몰라도, 비(非)정밀 접근 절차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조종사들은 이 건물로 인해 비행착각에 빠지거나 시맹지역(blind area)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FAA 조사팀은 한국 항공안전본부가 문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위험 판정(determination of hazard)에 대한 사례를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FAA는 제2롯데월드가 들어서도 서울공항에 출입하는 항공기가 안전할 것이라고 단정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FAA는 한국 항공안전본부에 그들이 위험 판정을 내린 사례의 자료를 제공하겠다고 함으로써 제2롯데월드 건설이 항공 안전에 위험을 줄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FAA와 문엔지니어링은 제2롯데월드가 건설되면 서울공항을 출입하는 항공기가 어떤 경우에도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롯데는 제2롯데월드에서 멀리 떨어진 서편 활주로에서 ILS 유도를 하는 경우로만 한정해 계산한 1000조분의 1이라는 충돌 확률을 퍼뜨리고 있다. 이러한 롯데의 태도는 과학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