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회, 한현석, 피부호, 진우권, 나수근, 김태종 (좌로부터)
1798년 농업정책을 제시하라는 정조의 교지에 응해 다산 정약용이 올린 ‘응지론농정소(應旨論農政疏)’는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와 농업인에게 깊은 지혜를 준다. 다산의 3농(三農)을 가슴에 새겼음일까. 글로벌 위기에도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나선 성공 농업인들이 있다. 스스로 3농 정책을 펼치는 농업인 6명을 만났다.
강화 약쑥 삼계닭 길러 대박 행진
인천 강화군 형제농장 안창회 씨
일반 삼계(삼계탕용 닭)는 35~48일 기르는 데 비해 ‘웅추삼계’는 최적의 육질이 만들어지도록 농장에서 50~57일 기른 후 출하한다. 일반 삼계보다 보름 정도 더 길러야 하는 만큼 사육비와 인건비 부담이 높아 일반 농가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웅추삼계를, 그것도 아주 특별하게 키우는 사람이 있다. 인천 강화 형제농장의 안창회(53) 씨가 그 주인공.
2남2녀의 장남인 안씨는 3남매가 양계업을 하는 ‘닭 가족’.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양계 일을 하면 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3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수원으로 내려와 부모의 양계장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1만 마리 정도이던 닭의 수와 수익은 매년 늘어갔다. 그러다 복합 축산업이 대세인 당시의 흐름에 따라 한우를 함께 길렀다. 그런데 1984년 1차 쇠고기 파동이 일면서 타격을 입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따로 하고 있던 사업까지 부도를 맞았다. 그의 표현대로 “쫄딱 망해서” 빈털터리 무일푼으로 수원을 떠나 부모님이 계신 고향 강화로 갔다. 그의 부모는 2년 앞서 강화에서 양계장을 하고 있었다. 강화에서 그는 임대 하우스 세 동에서 3000마리를 밑천으로 또다시 양계 일을 시작했다. 마침 군에서 제대한 동생이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선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강화 인삼이다.
“처음에는 호응이 좋았어요. 인삼 먹인 닭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도매상과 대형 유통업체들에서 주문이 계속 들어왔고, 저절로 판로가 닦였죠. 그런데 어차피 삼계탕에는 인삼이 들어가잖아요. 소비자들은 또 다른 차별화를 요구하더라고요.”
그는 가까이에서 대안을 찾았다. 사자발약쑥. 사자발약쑥은 강화도에서만 자생하는 쑥으로 무기질과 비타민A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해 사자발약쑥 달인 물을 웅추삼계에게 먹였다. 물과 약쑥을 100대 4 비율로 중탕하는데, 중탕기는 기술센터의 지원을 받고 약쑥은 직접 재배한다. 약쑥의 약발 때문일까. 일반 농가의 닭 폐사율이 5~7%인 데 반해 약쑥 먹인 닭의 폐사율은 1~2%에 그쳤다.
폐사율이 줄면서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게 됐고, 그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도 톡톡히 봤다. 이후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웅추삼계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으며, 그 덕에 2008년에는 한 대형마트에 납품돼 ‘올해의 히트 상품’으로 선정됐다. 이후 3000마리의 닭이 17만 마리로 늘었고 ‘닭장’도 첨단 자동화 설비로 바꿨다. 그러자 수익률이 2배 정도 올라 연평균 1억원을 벌게 됐다고.
“사료 급여와 급수는 물론 난방과 환기를 모두 자동화 설비로 관리하다 보니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축사를 돌보면 돼요. 그 덕에 저희 부부만으로도 양계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됐죠. 동생들은 근처로 분가시켰어요. 웅추삼계를 브랜드화해 전국 직영 매장을 여는 것이 목표예요. 할 수 있어요.”
안창회 씨가 자신의 농장에서 사자발약쑥을 살펴보고 있다(좌). 야생초 생육 상태를 확인하는 한현석 대표(우).
충북 청원군 태극화훼농원 한현석 대표
야생초가 좋아 국내외를 오가며 자료를 찾고 공부하다가 결국 대박을 터뜨린 ‘야생초 사나이’가 있다. 태극화훼농원 한현석(49) 대표.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의 인상이 야생초를 닮았다 싶었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그의 삶도 야생초다.
용접 부문 국제 1급 자격증을 취득해 20대 초반 중소기업의 공장장이 될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던 한 대표는 스물두 살의 어느 날 ‘용접인생’을 접고 ‘화훼인생’을 시작했다.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분이 밑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직급이 높아 이것저것 지시하다 보니 ‘나이 들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은 거예요. 그래서 돈 적게 들여 시골에서 죽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방법을 찾았는데, 화훼가 생각나더라고요.”
경기도 일대에서 일을 배운 뒤 지금의 충북 청원에 터를 잡았다. 터를 일궈가던 어느 날 국내 최대 종묘회사에서 씨(종자)를 샀는데, 알고 보니 모두 일본산이었다. 그래서 국내산 화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야생초’에 눈을 뜬 것이다.
“야생초 산업이 발달한 일본으로 무작정 날아갔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야생화 재배 시장이 거의 없었거든요. 일본의 현실을 직접 보니 부럽기도 하고 배도 아프고…. 우리도 야생초에 대한 인식만 달라진다면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죠.”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야생화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자료는 부족했고 정보도 모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결국 스스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귀한 것을 싸게 공급하면서 오래 잘 키우는 비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야생초도 이런 분위기를 탔죠. 2000년 들어 산행만 1년에 150일가량 했어요. ‘병아리난초’를 발견하고 씨를 받은 뒤 사진을 찍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적도 있어요.”
내친걸음이었다. 1년에 대여섯 번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해외로 나가 새로운 수종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렇게 해서 한 대표가 보유한 품종만 200여 종. 충북 청주 지역에서 야생초 사진전만 수차례 열었고 야생초 책자도 출간했다.
“1년에 8000부 정도의 홍보 소책자를 배포해요. 물론 야생초를 알리는 데 홈페이지도 활용하고 있죠. 야생초 시장 확대를 위한 일종의 투자인 셈이에요. 그렇다고 판매만을 위해 홈페이지를 운영하진 않아요.”
한 대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는 두 종류로 하나는 야생화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는 순수 야생초 홈페이지, 다른 하나는 야생초 쇼핑몰이다. “홈페이지에는 광고가 없어요. 회원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글을 올리고 삭제하는 일 모두 회원들이 직접 할 수 있죠.”
회원들의 로열티는 ‘묻지마’ 수준이라고. 기르다 죽으면 똑같은 야생초를 무료로 다시 보내준다. 이른바 ‘무한 애프터서비스(AS)’인 셈. 그렇다고 홈페이지를 통한 판매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화훼시장, 야생화 전문점, 조경업체 등에서의 판매가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야생초를 닮은 인생 아니던가. 지금의 궤도에 오르기까지 네 번의 실패를 맛봤다. 2004년에는 폭설로 하우스가 무너지면서 한순간에 1억4000만원을 날렸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야생초를 보니 제가 죽겠더라고요. 얼른 삽을 들고 눈으로 덮어줬죠. 야생초는 눈으로 덮어주면 살거든요.”
자신이 새로 발견한 야생화 ‘비비추’에 붙일 이름도 이미 정해놓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규제가 심해 야생화 품목 등록이 까다로웠지만 내년부터는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비비추는 보통 진분홍색인데 흰색을 발견했거든요. ‘미리내’(은하수의 옛말)로 정했어요.”
수입에 대해 묻자 소이부답(笑而不答), 말을 아꼈다. “하우스가 무너졌을 때 복구비(1억4000만원)를 모두 제 돈으로 댔어요. 뭐 그 정도로….” 지금 그는 도시 아파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토종 야생초를 외국의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종묘 수출 생각에 푹 빠져 있다.
친환경+문화예술로 명품쌀 마케팅
경기 가평군 피부호 씨
‘한옥마을’ 앞에서 부인 이영옥 씨와 ‘합격쌀’을 들고 있는 피부호 씨. 피씨가 건립한 한옥마을은 문화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평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집안의 장남인 피씨는 군 제대 후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쌀농사를 지으면서 버섯을 재배하고 과수원과 목장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이 발효되면서 앞으로는 쌀농사만 짓겠다고 결심했다.
“농사꾼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쌀은 우리 민족의 생명인데 그마저 외국에 의존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그는 멀리 내다봤다. 수입 쌀보다 고품질의 쌀을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 해답을 친환경 농법에서 찾았다.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2001년 오리농법을 시작했고, 2004년부터는 우렁이농법으로 전환해 쌀을 재배하고 있다. 우렁이농법으로 고독성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논의 잡초를 제거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우렁이의 배설물로 토질까지 높이는 효과를 얻었다.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경우 자치단체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까지는 우렁이를 100% 무상으로 지원받았지만 올해부터는 70%만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수확 후 건조, 저장, 도정, 포장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철저히 관리한다. 자연 바람을 이용한 상온 통풍방식으로 건조시키고, 가평군 종합미곡처리장(RPG)에서 그때그때 필요량만 완전미로 도정해 저온창고에 보관한다. 가평군 종합미곡처리장은 고품질 쌀 생산의 마지막 단계인 완전미 생산을 위해 그가 2003년 7억원(국고 4억원, 자비 3억원)을 들여 만든 공장이다.
생산에서 관리까지 체계적으로 접근한 결과 그의 ‘합격쌀’은 2003~05년 경기도 쌀 품평회에서 우수, 최우수, 대상을 받았다. 또한 지난해에는 ‘한국일보’가 주최한 대한민국 우수특산품 대상을 받으며 맛과 질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고품질 쌀을 생산한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는 “아무리 좋은 쌀을 생산해도 안 팔리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관건은 판로 개척이라는 것.
“웰빙, 웰빙 하는 요즘, 우렁이농법 등 친환경 농법으로 쌀을 재배하는 농가는 많아요. 그래서 친환경이라는 점만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지죠. 1600여 개나 되는 쌀 브랜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발로 뛰어다니며 판로를 개척하는 ‘명품 마케팅’이 필요해요.”
‘합격쌀’의 판매 방식은 일반 공판장 등의 유통과정을 거쳐 판매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고객층을 먼저 정한 뒤 ‘VIP 마케팅’을 펼쳤다. 가평군의 골프장, 기업체, 백화점, 명품 숍의 문을 수없이 두드리며 선물용 상품으로 손색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전박대 당하기도 여러 번. 다른 지역에서 판로를 개척한다는 것은 몇 배 더 힘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은 채 판로를 열어갔고, 그 결과 정부나 농협 수매에 의존하던 이전보다 수익률이 30% 정도 올랐다. 현재 생산과 유통을 포함한 ‘합격쌀’ 브랜드의 연 매출액은 3억원 정도.
그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브랜드 인지도를 구축하기 위해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소비자와의 정서적 교류도 시도했다. 또 하나의 마케팅 전략인 셈.
“비가 오면 농사꾼들은 쉬잖아요. ‘우중명절(雨中名節)’이죠. 5년 전인가, 친한 사람 열둘이 모여 ‘다락방(茶樂房)’이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차를 마시면서 뜻있는 시간을 보내자는 의도였죠. 지역 농가들의 협업을 이끌어내자는 생각도 있었고요. 저 혼자(농사 면적 6만6000㎡)만으로는 ‘합격쌀’ 브랜드를 유지하기는 힘들어요.”
이 모임을 통해 그는 서예, 미술, 음악, 사물놀이 등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전개하면서 농가 간 협업을 유도했다. 그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는 자연스레 쌀 판매에 접목됐다. 그는 “사람들의 입소문만큼 강력한 마케팅은 없다”며 “농업도 비즈니스”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성공 요인은 바로 생산과 마케팅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블루베리 시장 개척, 연 6억 버는 뚝심 농부
경북 영천시 진우권 씨
블루베리 묘목을 살피는 진우권 씨
“우리나라는 소득 대비 먹을거리가 10년 주기로 변화해왔어요. 1970년대 사카린, 80년대 설탕, 그리고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단 성분을 먹지 않는 경향이 생겼죠. 특히 컴퓨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현대인의 눈은 쉽게 피로해지고 칼로리가 낮은 음식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됐죠. 블루베리는 이러한 현대인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는 안성맞춤 과일이에요.”
블루베리는 외국에선 널리 알려진 과일이지만 진씨가 처음 묘목을 심던 2004년만 해도 국내에서는 재배 기술을 익힐 수 없어 시행착오도 많았다. 일본에서 구입한 300주의 묘목 가운데 3분의 2가 고사하는 아픔도 겪었다.
결국 진씨는 일본의 블루베리 재배 전문가에게 수천만원의 기술 이전비를 지급하고 2년간 진씨의 농장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블루베리 재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익혔다. “실패 이유는 블루베리가 pH 4.5의 강산성 토질에서만 자란다는 특성 때문이었어요. 우리나라 과일의 주종인 사과, 포도가 pH 6.7~7.5의 알칼리성 토질에서도 잘 자란다는 점과는 다르죠.”
그래서 캐나다와 독일에서 수입하는 피트머스라는 유기 퇴적물(거름의 일종)을 이용해 식재를 시작했고, 2007년 6월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이에 앞서 진씨는 ‘스몰킹 블루베리’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꾸준히 브랜드 이미지 광고를 통해 블루베리를 알렸다. 그 덕에 첫 판매를 시작한 날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2864명에 이르러 순식간에 제품이 동났다. 다음 해에 재구매한 고객 비율은 전체의 97%에 달했다. “전자상거래를 하다 보니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감성 교감이 없더라고요. 재래시장에서는 흥정도 하고 덤을 주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농가에서 재배되는 콩이며 옥수수를 덤으로 얹어 보내줬죠. 감사 전화는 물론 선물을 보내오는 고객도 생겼어요.”
그 덕에 매출은 지난해 5억원 이상, 올해는 6억원을 예상할 정도로 급증했다. 일본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왕실로의 수출도 확정됐다. 진씨는 올 7월 블루베리 가공공장도 열 계획이다. 이 공장에서는 블루베리 잼과 주스, 삼색송편, 블루베리 잎 녹차 등을 생산할 예정.
그는 “블루베리는 2~3년생을 심어 5년생이 될 때 수확을 시작하는데 그 사이 관상수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나수근 씨가 죽염 대나무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전남 나주시 박은숙·나수근 부부
“오늘이 큰아들 초등학교 졸업식이라 어수선합니다.” 나무와 황토가 어우러진 황토집에서 함께 일하는 할머니 두 명과 아침식사를 하는 박은숙(44) 씨, 남편 나수근(43) 씨의 마음이 급해 보였다. 아들 졸업식도 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부부의 아침식사를 재촉했다. 뜨끈뜨끈한 황토방에서 유자차를 마시며 듣는 그들의 삶은 황토 향처럼 은은했다.
“요즘 된장이 항암효과가 있고 건강식이라는 이유로 각광받고 있잖아요. 남편과 직접 콩을 재배해 된장을 만들고 있어요.”
지금은 된장, 간장, 죽염을 만들고 있지만 부부가 전통장에 처음 눈을 놀린 것은 대체의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다. 광주에서 14년간 건강식품 사업을 했던 부부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건강식품을 만드는 날을 꿈꿨다.
“일을 하면서 전통장이 약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전통장은 발효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전남 장성의 ‘발효 명인’을 찾아갔죠.”
지금은 돌아가신 기우경 옹(翁)은 흥선대원군이 마시던 ‘진고색주’를 재현한 발효의 명인. 부부가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하자 발효 비법과 간장 제조 기술을 기꺼이 전수해줬다. 그 뒤 “시골에서는 전망이 없다”며 극구 반대하던 친정 부모를 설득해 2001년 현재의 나주시 반남면으로 귀농했다. 자신도 있었다. 마한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반남고분 일대에 친정 부모가 내준 땅을 일궜다. 컨테이너에서 죽염메주를 만들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가며 메주를 띄웠지만, 습기와 온도 조절이 잘 안 돼 실패의 연속이었다.
“특수 된장과 간장도 만들었어요. 유황오리와 마늘, 죽염, 약콩 등을 넣어 만들었는데 제 맛이 안 나는 거예요. 2004년까지 정말 수백 번의 실험을 거듭했어요.”
실험 끝에 장맛이 나자 황토방을 만들었다. 황토는 온도와 습도 유지가 가장 중요한 전통장 발효에 제격이었던 것. 예상은 적중했다.
박은숙 씨와 남편 나수근 씨가 된장 맛을 보고 있다
39㎡, 155㎡ 황토방을 또 만들 만큼 여기저기서 된장 구입 요청이 쇄도했다. 2005년 15말의 콩으로 시작했지만 2006년 50말, 지난해에는 100말로 메주를 빚었다. 메주 1덩어리가 보통 2kg인 것을 감안하면 지난해에만 1000개의 메주를 띄운 셈.
본격적으로 장을 만들었지만 여느 개인 농가가 그렇듯 안정적인 고객 확보가 막막했다. 결국 박씨가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e-비즈니스 과정을 수강하면서 전자상거래에 눈을 떴고 ‘선한세상’이라는 브랜드도 론칭했다. 2007년에는 전통장 홈페이지를 선보였으며, 농업박람회에도 참여해 브랜드를 알렸다. 직접 재배하는 우리밀과 콩은 무농약 인증도 받았다.
“지난해 매출이 7000만~8000만원은 됐을 거예요. 그 돈으로 집 근처 밭을 사고 옹기도 늘렸어요. 무농약 콩을 많이 재배해야 (전통장을) 많이 팔죠.”
‘아직까지는 남는 게 없다’는 표정이지만 나씨의 얼굴엔 흐뭇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된장이 ‘히트상품’이 됐지만 사실 부부가 귀농하면서 처음 손을 댄 죽염이 맏이 같은 느낌이라고.
“원재료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담양에서 3년생 대나무를 선별해 사와요. 3년생이 수분 함유량이 적당해 흡수력도 좋거든요.”
대나무 마디를 잘라 소금을 빻아 넣고 황토로 밀봉해 1300℃ 가마솥에 10시간씩 8번을 구워낸 뒤 9번째에 비로소 녹여낸다. ‘선한세상’의 전통장이 짠맛이 덜한 것도 죽염 때문이라고. 최근의 웰빙(참살이) 식단에도 그만이란다. 요강까지 얼었다는 컨테이너에서 4년여 절치부심한 끝에 귀농 결실을 보고 있는 ‘대표님’이지만 지금도 마음은 한결같다.
“메주를 쑬 때 성공했던 방식으로 똑같이 해도 세 번 가운데 한두 번은 꼭 실패해요. 자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겠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봐요.”
110억원 한우펀드 조성 축산 新패러다임 개척
충남 예산군 씨알목장 김태종 대표
씨알목장에서 사육하는 한우들
“큰 회사도 아니고 원금을 담보할 만한 부동산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스타 농민’도 아니었죠. 그래서 사업자등록증 하나 들고 조목조목 필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한우예찬펀드는 자금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축산 농가에 무상으로 암송아지 2750두를 위탁해 기르도록 한 뒤 3년 이전에 이 위탁우(어미소)가 낳은 첫째, 둘째 송아지와 어미소를 팔아 수익을 낸다. 어미소는 축산 농가가 구입할 수 있도록 우선권을 부여해 축산 농가도 보호·육성할 수 있다. 운영 기간 3년에 목표 수익률은 연 9%. ‘한우예찬’은 2004년 김 대표와 한우 브랜드화 사업에 뜻을 모은 인근 7개 농가가 함께 설립한 ‘씨알목장’이 만든 한우 브랜드. 생육 및 경영 관리, 사육 조건, 운송과 도축, 가축 분뇨 처리 등 모든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2008년 7월 무항생제 축산물로 승인받았다.“‘한우예찬’은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국내 A클래스 가운데 상위권에 듭니다. 지난해 1등급 한우가 90%에 달했는데, 참고로 국내 전체 한우에서 1등급 출현율은 50% 정도입니다.”
한우의 육질은 3, 2, 1, 1+, 1++ 등급으로 나뉜다. 그중 1등급 이상을 고급육이라고 하는데, 꽃등심처럼 ‘꽃’자가 붙은 한우는 일반적으로 육질 등급 1+ 이상을 받은 고기다. 한우 품종이 단일하다는 전제 아래 1등급 출현율이 90%라는 것은 그만큼 소의 먹이나 관리, 출하 시기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방증이다.
이처럼 ‘한우예찬’이 짧은 기간에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출하 가격을 정하는 가격 보장 때문. 이로써 농가들은 시세에 신경 쓰지 않고 사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건강한 성장과 발육을 위해 국내 최초로 ‘섬유질 배합사료(TMR, TMF)’를 주고, 소가 먹고 싶을 때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자유채식이 방식’도 도입했다. “우리 농업은 저가 외국 농산물과 경쟁해야 하고, 소득 수준이 높아진 소비자들의 다양한 트렌드도 맞춰야 합니다. 생산 이후의 과정에 따라 소득이 달라지는 상황에 직면한 거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유통과 소비 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이해와 참여뿐입니다.”
김 대표는 서해안 간척지에 한우예찬 종합축산단지를 조성해 소들을 방목 형태로 사육하고, 분뇨를 이용한 퇴비공장을 세워 유기질 비료를 생산하는 한우종합목장을 건립할 예정이다. 아울러 10년 내에 한우예찬 레스토랑을 국내외에 선보여 한우를 수출할 계획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