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인 클라우즈’는 샤를리즈 테론의 영화다.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그녀가 ‘이온 플럭스’에 출연하든, ‘노스 컨츄리’나 ‘몬스터’에 출연하든 웬만한 영화라면 그녀의 이름이 감독의 이름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러브 인 클라우즈’는 샤를리즈 테론의 영화다.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그녀가 ‘이온 플럭스’에 출연하든, ‘노스 컨츄리’나 ‘몬스터’에 출연하든 웬만한 영화라면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감독의 이름 석 자를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러브 인 클라우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4년 전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호주 출신 존 듀이건 감독의 이름 대신 샤를리즈 테론의 매혹과 유혹의 서사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작 ‘몬스터’에서 거구의 창녀로 분했던 샤를리즈 테론은 팔색조의 아름다움으로 공작의 날개를 단다. 물론 페넬로페 크루즈와 연인인 스튜어트 타운센드가 뒤를 받쳐주지만, 샤를리즈 테론의 기운은 압도적이다. ‘길다’라는 이름. 그 유명한 리타 헤이워드의 ‘길다’를 연상케 하는 그녀는 때론 팜므파탈로 때론 맹목적인 사랑과 거부할 수 없는 순수함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뇌리에 강렬한 기억의 압침을 꽂는다.
영화는 전쟁서사를 바닥에 깔고 첫 장면부터 운명과 자유, 의지와 시대의 양심 등의 대문자를 부르짖지만, 아니다. 잘 살펴보면 이 영화의 핵심은 에로스이고 리비도다(그런 면에서 원제목 ‘헤드 인 더 클라우즈’보다 영화는 국내 개봉명인 ‘러브 인 클라우즈’가 훨씬 잘 어울린다). 영화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기묘한 동거를 주축으로(그러니까 ‘줄 앤 짐’의 뒤집힌 버전이라 할까) 세 번의 기막힌 에로틱한 관능의 이벤트를 벌인다.
우선 길다(샤를리즈 테론)와 미아(페넬로페 크루즈)의 격한 여-여 댄스. 동성애적 느낌을 풀풀 풍기는 이 춤 장면은 웬만한 이성애자들의 구애 댄스를 시시하게 만든다. 금발과 흑발의 대결과 조화. 차갑고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먹는 것 같은 느낌으로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를 핥고 탐닉한다. 미아가 스페인 내전에 간호사로 종군하려 하자 길다는 그녀와 격렬한 키스를 나눈 후 입술을 물어뜯어 피가 나게 한다. 이별의 상처를 가격하는 방식으로 헤어지는 길다야말로 샤를리즈 테론, 그녀답다.
다음은 스튜어트 타운센드와 샤를리즈 테론의 만남에서 밀회의 라인에 벌어지는 격렬한 정사 장면들. 1933년부터 시작한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기나긴 애증의 역사를 스튜어트 타운센드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더듬어간다. 케임브리지대학 학생이던 가이(스튜어트 타운센드)의 방에 몰래 스며들었던 길다는 결국 파리에서 사진작가가 된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길다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었지만 사랑의 불씨를 품은 두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구대에서 벌이는 첫 정사신에서 길다는 팀워크를 이루는 주일학교를 생각하라며 숫총각을 리드한다. 이후 목욕탕에서 오직 넥타이 하나만을 걸친 채 사랑의 유희를 벌이는 격한 정사 장면은 샤를리즈 테론과 스튜어트 타운센드가 실제 연인이다 보니 현실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동성애, 스리섬, SM 등 금기의 성애 노출
그러나 길다는 한 남자에게만 만족하는 여자가 아니다. 가이와 함께 살면서도 길다는 스페인 출신의 스트립 댄서 미아와 동성애로 묶인 연인 사이를 유지한다. 가이에 대한 질투로 잠시 길다를 유혹했던 미술상과 사귀는 미아.
어느 날 집에 돌아온 길다는 목욕탕에서 홀로 숨어 흐느끼는 미아의 등에 난 채찍 자국을 발견하곤 남자에게 그대로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펼쳐치는 샤를리즈 테론의 격한 가학과 피학의 퍼포먼스는 가히 이 영화의 압권이다. 남자의 얼굴 위에 하이힐을 포개고 거칠게 남자의 두 손을 기둥에 묶는 그녀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의 포스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러브 인 클라우즈’가 딱 여기까지만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 스리섬, 가학·피학 코드 같은 금기의 성애 모두를 관음증적인 포장 안에 은근히 배치해뒀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은 비틀거리고 길다를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는 빈약하고 정형화돼 있다. 갑자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는 두 연인의 슬픈 운명이 뒤를 따르는 후반부는 특히 더 작위적이다. 존 듀이건 감독은 1940년대 파리는 드가의 발레하는 무용수가 나오는 낭만과 빛의 땅으로 채색하지만, 왠지 길다가 찍는 사진처럼 인위적이며 공허한 기표 이상에서 더 나아가질 못한다. 그래서 ‘러브 인 클라우즈’의 절반 정도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연상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잉글리쉬 페이션트’같은 대 로망을 기억하게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를 보다 보니 오히려 옛것은 시간의 역사 위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러브 인 클라우즈’는 ‘카사블랑카’를 다시 한 번 외치지만, 시절은 지나버렸고 지금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빌’을 만들어내는 시대 아닌가. 아무래도 관능과 시대의 결합을 통한 미학적 에로티시즘 시도의 승자는 이안 감독의 ‘색, 계’에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