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딤 페렐만 감독의 영화 ‘인 블룸’은 15년 전 미국 코네티컷 주의 한 전원마을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그린 내용이다.
‘인 블룸’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1년 전이다. 제1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고 바딤 페렐만 감독이 깜짝 초대돼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열혈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의 전작 ‘모래와 안개의 집’이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제니퍼 코넬리와 벤 킹슬리가 주연을 맡았던 ‘모래와 안개의 집’은 현대 자본주의의 극악한 특징 중 하나인 ‘없는 자와 없는 자(무산자와 무산자)’ 간의 유혈 대립을 그린 내용이다. 자본주의는 카를 마르크스의 얘기와는 달리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싸움, 이른바 노자(勞資)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를 대리하는 ‘조금 없는 자’와 있는 자에게서 억압받는 ‘아주 없는 자’ 간의 대리전으로 운영, 유지된다. 있는 자는 결코 싸움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래와 안개의 집’이 뛰어났던 진짜 이유는 그 같은 사회경제학적 주제를 서정적이고 수려한 영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비극적 서정미의 극치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현실의 삶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차라리 처연하고 아름다울 때가 있다면, 바딤 페렐만의 영화는 그런 순간들을 보여주었다. 영화팬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불행한 것은 ‘모래와 안개의 집’ 같은 작품이 국내에서는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이며, DVD로 나오긴 했지만 그나마 잘 팔리지 않았다. 200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음악상 후보에 오른 작품인데도 그랬다. 오히려 그래서 더 그랬다. 이번 신작 아닌 신작 ‘인 블룸’도 아마 비슷한 운명을 걸을 것이다.
15년 전과 현재의 시간 사이 극적인 반전
안 그런 척해도 바딤 페렐만은 사회현실에 대해 늘 날이 서 있는 감독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에 비해 ‘인 블룸’은 좀더 그런 티를 낸다. 15년 전 미국 코네티컷 주의 한 전원마을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그린 내용이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연상시키는데, 굳이 고르자면 ‘엘리펀트’에 가깝다).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복용하며 17세 나이로 저지를 수 있는 말썽은 다 저지르는 다이애나(에반 레이첼 우드 분)가 주인공이다. 그녀에게는 둘도 없는 단짝친구 모란(에바 아무리 분)이 있다. 모란은 다이애나와 달리 ‘범생이’다. 알고 보면 착한 구석이 있는 다이애나와 알고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일탈을 꿈꾸며 살아가는 모란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골 생활이 지루하기만 하다. 둘은 언젠가 고향을 벗어나는 게 꿈이다. 하지만 그런 꿈도 어느 날 벌어진 끔찍한 사고로 풍비박산이 난다. 바로 같은 반 마이클이라는 학생이 저지른 대형 살인극의 희생양이 되기 때문이다.
‘인 블룸’의 반전은 당대 최고의 반전 영화로 불렸던 ‘식스 센스’를 능가한다. 식스 센스의 반전이 ‘쇼킹’하다면 ‘인 블룸’의 반전은 미학적 완성도를 갖췄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줄거리만 들으면 영화는 언뜻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너무 일반적이다. 콜럼바인이든 버지니아테크든 심지어 9·11사태에 대한 이야기로도 연결된다. 영화가 지나치게 일반론에 기대면 재미가 없어진다. 독창성이 떨어진다. 바딤 페렐만은 영리하게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며, 영화 ‘인 블룸’은 그래서 종반 즈음 가서는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인 블룸’의 반전(反轉)은 당대 최고의 반전 영화로 불렸던 ‘식스 센스’를 능가한다. ‘식스 센스’의 반전은 쇼킹하다. 하지만 ‘인 블룸’의 반전은 미학적 완성도를 갖췄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문학적 상상으로나 가능한 이야기를 바딤 페렐만 감독은 영상으로 이뤄냈기 때문이다. 페렐만 감독이 이야기꾼으로서 얼마나 대단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가 영상예술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토리의 미학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원작인 로라 카시스키의 소설을 대조해 읽어봄직하겠지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다.
문학을 동원한 로라 카시스키든, 영상을 이용한 바딤 페렐만이든 참혹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하나의 사건처럼 이어붙인 건 그만큼 두 가지를 뒤바꾸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콜럼바인에서 버지니아테크에 이르는 이유 모를 사건들, 우리 사회가 양산해낸 수많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살인자)들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 누가 우리 인생에서 꽃이 만개하는 시절을 빼앗았는가. 그건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우리들 삶에 과연 꽃이 만개하는 때가 있기나 했던 것인가.
결론의 반전을 이야기하지 못해 답답하지만(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영화는 두 가지 중층의 반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여주인공 다이애나와 친구 모란 가운데 실제 총을 맞은 사람은 누구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총격사건이 벌어진 과거와 15년이 지난 현재의 시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는 일종의 맥거핀(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속임수. 히치콕 영화에 자주 쓰였다)이다. 이 점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