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 황중환
모범 답안은 ‘드레스 셔츠’와 ‘얼굴’. 남편의 드레스 셔츠에는 아내와의 관계가, 아내의 얼굴에는 가족관계, 특히 고부(姑婦) 갈등의 진행 속도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올 봄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는 상견례 자리에서 매서운 눈초리의 시어머니를 보며 한숨을 쉬었을 터. 남편은 어버이날 전후로 아내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시댁에 가자고 ‘작업’했지만, 다녀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을 듯싶다. “(차분한 목소리로) 여보, 얘기 좀 해요. 어머님 왜 그러세요?” “당신! 선택해욧! 나야, 어머니야?”
지구가 멸망해도 개미, 바퀴벌레와 함께 살아남는다(?)는 고부갈등. 예전 시어머니는 일정 기간 어려움을 참으면 과거 급제자 아들을 길러낸 어머니로 명예를 얻고, 아들에게 효도 받고 며느리를 지배하며, 손자를 거느리는 ‘여자 가장’으로서 권위가 드높았다. 오죽했으면 사회학자 울프(Wolf)는 “가부장제 사회에선 시집온 젊은 여성은 자식(특히 아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한다”고 일갈했을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아들 출산 = 권력 획득’이라는 시어머니의 도그마는 ‘결혼 = 동등한 가족구성원’이라는 며느리들의 응전(應戰) 앞에서 빠르게 세포분열 중이다.
대한민국 신(新)고부갈등. 어버이날 직접 찾아뵀거나, 전화로 안부인사를 드릴 때 (시)어머니와 나눈 ‘멘트’를 떠올려보라. 그러면 다음 신고부갈등 유형 중 당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잘난 아들은 국가가 가져가고, 좋은 아들은 장모가 가져가고, 못난 아들은 평생 애프터서비스(A/S)해야 한다”는 시어머니들의 푸념도 되새김질하면서(각 사례에 대한 도움말은 48쪽 참조).
|“어떤 아들인데…”| 전형적인 ‘아들 집착형’. 가부장제 성격이 강한 나라나 지역일수록 아들과 시어머니 관계는 강화된다. 곱게 키워놓은 아들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내재된 경우다. “기껏 키워놨더니 며느리 치마폭에…”라는 말을 들었다면 이 유형이다.
시어머니 최성순(60대·이하 가명) 씨는 최근 서울가족문제상담소를 찾아 열변을 토했다. 장남인 아들이 어버이날이라며 찾아와 저녁을 먹던 중 그만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결혼 6개월 된 아들 부부가 ‘소꿉장난’하는 것 같아 “저녁 먹으러 와라” “저축은 어떻게 하니?”라며 ‘보살핌 멘트’를 날렸기 때문이라고 하소연했다. 시아버지는 그날 아파트 발코니에서 담배만 물고 있었다고 한다.
|“내 말 알아듣겠니?”| ‘세련의 극치’를 달리는 ‘엘리트’ 시어머니형. 맞벌이인 김지영(20대) 씨는 대학교수 시어머니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인 시아버지 때문에 요즘 입이 댓 발은 나와 있다. “잘사는 집으로 시집간다”는 주위의 부러움도 잠시, 가족행사 때마다 식당 예약도 난감하다. “이 집 음식 맛이 왜 이러니? 영~ 안 되겠네” 등 시어머니의 ‘세련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며칠 전에는 큰마음 먹고 만기 된 적금을 쪼개 명품 가방을 선물했다. 하지만‘역시나’였다. “바쁜데 어버이날은 무슨…. 근데 이거 바꿀 수는 있지? 약간 촌스럽다 얘.” 지영 씨도 남편만큼 유명 대학을 나와 남부럽지 않게 성장한 터라 여간 부담이 아니라며 전화 상담에서 털어놓았다.
지난해 바뀐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건네는 어머니 모습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속옷 빨아놓았다” | 부부 사이에 지나치게 밀착해 들어오는 ‘애정과잉형’ 시어머니로 인한 갈등. 맞벌이 아들 내외를 위한답시고 속옷 세탁은 물론 화장대, 장롱까지 청소해 며느리를 놀라게 한다. 불쑥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좋은 소식(임신) 없니?”라고 물어올 때는 오른쪽 머리가 욱신거린다.
영화 ‘올가미’의 시어머니 ‘진숙’(윤소정 분)과 며느리 ‘수진’(최지우 분). ‘아들 집착형’인 진숙은 온갖 방법으로 수진을 괴롭힌다.
|“깨작깨작 먹으면 복 나간다”| ‘문화 차이형’. 남자친구 부모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인사차 내려간 김소연(20대) 씨는 현관 앞에 들어서자마자 말을 놓는 ‘예비 시어머니’를 보고 언짢았다. ‘스스럼없이 대하시려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방에 들어선 순간, 쓰러지고 싶었다. 저녁상엔 소연 씨가 잘 못 먹는 생선회가 즐비했던 것. 긴장 속에서 조심조심 식사하던 중 예비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깨작깨작 먹어서 어디에 써먹겠노?” 이어 고추장과 된장으로 범벅 된 회 몇 점이 소연 씨 밥그릇에 쌓이고…. 결혼 후에도 호전되지 않았다. 예쁘고 정확하게 파를 썰고 있으면 “날 샌다”며 칼자루를 빼앗아갔다. 조용하고 깔끔한 성격의 소연 씨는 결국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사위! 언제쯤 올 거야?”| 사위와 장모 사이에 생기는 역(逆)고부갈등. 자녀 양육을 처가에 맡기면서 요즘 부쩍 늘었다. 공무원 최종환(40대) 씨는 얼마 전 ‘장모님을 피해’ 경기 용인시에서 고양시로 이사했다. 주말마다 ‘최 서방’을 찾는 장모와 부딪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3년 전 마땅히 아이 맡길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장모가 봐주겠다고 했을 땐 업고 다니고 싶었다. 주말에 경기 이천시의 처가로 내려와 아이도 보고 농사일도 거들어달라는 조건도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약속을 이행하고 최근 아이를 데려왔는데도 주말마다 처가의 ‘러브콜’은 계속됐다. 네 자매 중 맏이인 아내는 좋아하는 눈치. 하지만 주말에 가족끼리 조용히 쉬고 싶은 종환 씨는 주말이 되면 ‘우울 모드’로 바뀐다. 자주 만나다 보니 ‘백년손님 예우’는 간데없고 막내아들 대하듯 하는 장모의 말에도 기분이 언짢다. 결국 부부는 상담소를 찾았고, “시어머니가 주말마다 시댁에 오라면 어떻겠느냐”는 상담원의 말에 아내는 이사에 찬성했다.
직장인 김형진(30대) 씨도 요즘 지방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하소연한다. 일곱 자매인 처가 식구들은 주말마다 웬 행사가 그리 많은지. 큰처형 아들 운동회, 셋째처형 딸 생일, 다섯째 처제 조카 돌잔치…. 금요일마다 이어지는 장모님의 ‘기사 요청콜’도 짜증이다. “자네 몇 시에 데리러 올 텐가.”
|“넌 집이 가깝잖니”| ‘동서·시누이 비교형’. 시부모와 가까이 사는 배수진(30대) 씨는 명절 음식을 차리거나 김장할 때마다 부아가 치민다. 직장에 다니는 첫째 둘째 동서는 늘 ‘명절 지각생’, 시누이는 TV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장 보고 열심히 나물을 다듬는데, 해질녘 찾아와 거들 생각은 않고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는 형님을 보면 쓴웃음이 난다. “남 돈 받는 게 쉬운 일이니? 넌 들어가 쉬어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예상했던 터. 행사 종료 후 ‘카운터펀치’에 녹다운 된다. “셋째야, 너는 집이 가까우니 김치는 다음에 담가줄게. 둘째야, 셋째 것도 가져가라.”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코시안(Kosian)으로 대표되는 ‘다문화 가정’의 고부갈등도 서서히 증가 추세. 주로 시어머니가 일방적으로 한국 문화를 주입하려다 보니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한국 며느리’로 만들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외국인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살기 싫다며 남편과 상담소를 찾는다.
|“누나 노릇 하려고?” | ‘연상 며느리’가 왠지 불안한 시어머니로 인해 생기는 갈등. 남편보다 세 살 많은 이수향(30대) 씨는 얼마 전 남편과 ‘대판’ 싸우고 상담소를 찾았다. 전날 시부모의 기습 방문에 중국 음식을 시켰던 게 화근이었다. 벨 소리에 ‘동작 빠른’ 남편이 음식을 받았고, 거실 식탁까지 배달했다. 조금씩 미간이 찌푸려진 시어머니. 눈치 없는 수향 씨, 기름을 붓는다. “여보, 김치하고 물도 좀 꺼내줘.” 어머니의 직격탄에 ‘아차’ 싶다. “얘가 점점 누나 노릇하네.” 수향 씨는 그날 자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대로 살게 해주세요! 네?”| ‘세대차이형’. 연애기간이 짧았던 한은경(20대) 씨는 신혼기를 되도록 길게 갖고 싶은 마음에 출산계획을 미뤘다.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원 진학도 알아보고 있다. 입양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좋은 소식 없니” 하며 묻는 시어머니에게 입양 얘길 꺼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지난해 겨울,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낀 연휴에 열흘간 남편과 미국여행을 가겠다고 말했을 땐 ‘집중폭격’을 받았다. “대학원도 간다며? 언제 돈 모아 집 살 거니?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 언제 철들래?” 찜찜한 마음에 여행도 포기했다며 은경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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