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를 누를 때마다 슬펐어요.”
오래전 서울에서 지방 대학으로 진학한 어느 대학생이 했던 말이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 공중전화나 일반전화로 집에 전화할 때 예전 습관대로 지역번호를 생략하고 버튼을 눌렀다가 엉뚱한 곳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 뒤 서울에 전화 걸 때마다 정신차리고 지역번호 ‘02’를 누르면서 ‘지방 거주’의 소외감을 새삼 느꼈다는 것이다.
일반전화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지리적 위치가 고정돼 있다. 발신자는 상대방이 어디에서 전화를 받는지 안다. 즉 유선통신에서 발화자(發話者)의 신체는 미디어가 놓인 물리적 공간에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무선통신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휴대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지금 어디야?”라며 첫마디를 뗀다. “전화받기 괜찮아?”도 예전에는 거의 하지 않던 말이다. 전화를 받을 만하니까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휴대전화 전원을 켜놓고 있다 해도 전화받기 곤란한 상황들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거나 시끄럽고 복잡한 거리에 있거나, 또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중이거나…. 전화를 받긴 했지만 길게 대화하기 어려워 “있다가 제가 전화드릴게요”라며 전화를 끊는 모습은 모바일 시대에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만큼 특정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접속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터지는 ‘애니(Any)’ ‘콜(Call)’이다.
문명은 기동성을 꾸준히 증진해왔다.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이동을 많이 하고 살았다. 직립보행을 하는 유인원의 경우 고릴라는 하루에 2km, 침팬지는 5km밖에 걷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수렵채집 시대부터 30km나 걸을 수 있었다. 휴대전화 로밍 서비스에서 ‘roam’은 ‘떠돌아다니다’ ‘방랑하다’라는 뜻인데, 이렇듯 인간의 ‘로밍’ 기질은 뿌리가 깊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짐’도 갖고 다녔다. 침팬지들도 물건을 운반할 수 있지만, 앞발로 물건을 들고 뒤뚱거리며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매우 한정돼 있다. 완전한 직립보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추가 S라인으로 세워져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인간은 여러 가지 물건을 휴대한 채 뛰어다닐 수도 있다. 손에 들 뿐 아니라 옆구리에 끼고,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이고, 목에 걸고, 허리에 차고….
인간이 그렇게 지녀온 휴대품 목록은 대단히 길다. 사냥도구, 음식(도시락), 무기, 배낭, 바구니, 가방, 액세서리, 깃발, 악기, 지팡이, 담뱃대, 가방, 지갑, 우산, 책, 신문, 애완동물, 시계, 카메라…. 20세기에 들어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물건들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무전기, 워크맨, 노트북 등이 그것이며 휴대전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휴대전화는 그동안 인간의 대표적인 휴대품이던 시계를 상당 부분 대체했을 뿐 아니라, 텔레비전 같은 비(非)휴대품도 그 안에 통합해냈다. 자동차(automobile) 보급과 함께 급격히 증가한 인간의 기동성(mobility)은 휴대전화(mobile phone)가 대중화되면서 가속화됐다고 할 수 있다.
모바일 혁명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공간적 제약을 허물어버렸다. 길거리 공중전화는 사용량이 급격히 줄어 처량한 신세가 됐다. 무선호출기가 한창 유행하던 1998년 78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며 절정의 이용량을 보였던 공중전화가 지금은 그 이용량이 10분의 1로 줄어 한국통신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휴대전화는 일반전화도 진작 추월했다. 이제 사람들은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겨도 바뀐 연락처를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친구나 애인 사이에서도 집 전화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졌을 정도로 모든 연락을 휴대전화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통한 위치 추적부터 시도 때도 없는 메시지 홍수
그러나 공간의 굴레에서 통신자의 신체를 해방시켜준 휴대전화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아무 데서나 휴대전화를 받아야 하고, 휴대전화 이용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돼 상대방이 어디 있는지 실시간 알아낼 수도 있다. 이는 실종자를 수색하거나 노약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배우자의 행적을 감시하거나, 기업에서 사원들의 외근 행선지를 모니터링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스템을 활용한 ‘위치 기반 서비스’라는 것도 등장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의 가게 광고가 날아오고, 난데없이 ‘비가 옵니다. 콜택시 불러드릴까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문명이 선사하는 탁월한 기동성은 결국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향유되고 있는 셈이다. 무선이 허락한 자유는 고도로 통합된 기계장치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다. 일상의 구석구석에 파고들면서 지구촌 전체로 확대되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그 촘촘한 그물은 마음이 오가는 말길인 동시에 신체를 가두는 밧줄이 아닐까?
오래전 서울에서 지방 대학으로 진학한 어느 대학생이 했던 말이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 공중전화나 일반전화로 집에 전화할 때 예전 습관대로 지역번호를 생략하고 버튼을 눌렀다가 엉뚱한 곳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 뒤 서울에 전화 걸 때마다 정신차리고 지역번호 ‘02’를 누르면서 ‘지방 거주’의 소외감을 새삼 느꼈다는 것이다.
일반전화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지리적 위치가 고정돼 있다. 발신자는 상대방이 어디에서 전화를 받는지 안다. 즉 유선통신에서 발화자(發話者)의 신체는 미디어가 놓인 물리적 공간에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무선통신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휴대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지금 어디야?”라며 첫마디를 뗀다. “전화받기 괜찮아?”도 예전에는 거의 하지 않던 말이다. 전화를 받을 만하니까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휴대전화 전원을 켜놓고 있다 해도 전화받기 곤란한 상황들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거나 시끄럽고 복잡한 거리에 있거나, 또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중이거나…. 전화를 받긴 했지만 길게 대화하기 어려워 “있다가 제가 전화드릴게요”라며 전화를 끊는 모습은 모바일 시대에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만큼 특정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접속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터지는 ‘애니(Any)’ ‘콜(Call)’이다.
문명은 기동성을 꾸준히 증진해왔다.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이동을 많이 하고 살았다. 직립보행을 하는 유인원의 경우 고릴라는 하루에 2km, 침팬지는 5km밖에 걷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수렵채집 시대부터 30km나 걸을 수 있었다. 휴대전화 로밍 서비스에서 ‘roam’은 ‘떠돌아다니다’ ‘방랑하다’라는 뜻인데, 이렇듯 인간의 ‘로밍’ 기질은 뿌리가 깊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짐’도 갖고 다녔다. 침팬지들도 물건을 운반할 수 있지만, 앞발로 물건을 들고 뒤뚱거리며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매우 한정돼 있다. 완전한 직립보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추가 S라인으로 세워져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인간은 여러 가지 물건을 휴대한 채 뛰어다닐 수도 있다. 손에 들 뿐 아니라 옆구리에 끼고,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이고, 목에 걸고, 허리에 차고….
인간이 그렇게 지녀온 휴대품 목록은 대단히 길다. 사냥도구, 음식(도시락), 무기, 배낭, 바구니, 가방, 액세서리, 깃발, 악기, 지팡이, 담뱃대, 가방, 지갑, 우산, 책, 신문, 애완동물, 시계, 카메라…. 20세기에 들어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물건들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무전기, 워크맨, 노트북 등이 그것이며 휴대전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휴대전화는 그동안 인간의 대표적인 휴대품이던 시계를 상당 부분 대체했을 뿐 아니라, 텔레비전 같은 비(非)휴대품도 그 안에 통합해냈다. 자동차(automobile) 보급과 함께 급격히 증가한 인간의 기동성(mobility)은 휴대전화(mobile phone)가 대중화되면서 가속화됐다고 할 수 있다.
모바일 혁명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공간적 제약을 허물어버렸다. 길거리 공중전화는 사용량이 급격히 줄어 처량한 신세가 됐다. 무선호출기가 한창 유행하던 1998년 78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며 절정의 이용량을 보였던 공중전화가 지금은 그 이용량이 10분의 1로 줄어 한국통신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휴대전화는 일반전화도 진작 추월했다. 이제 사람들은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겨도 바뀐 연락처를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친구나 애인 사이에서도 집 전화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졌을 정도로 모든 연락을 휴대전화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통한 위치 추적부터 시도 때도 없는 메시지 홍수
그러나 공간의 굴레에서 통신자의 신체를 해방시켜준 휴대전화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아무 데서나 휴대전화를 받아야 하고, 휴대전화 이용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돼 상대방이 어디 있는지 실시간 알아낼 수도 있다. 이는 실종자를 수색하거나 노약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배우자의 행적을 감시하거나, 기업에서 사원들의 외근 행선지를 모니터링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스템을 활용한 ‘위치 기반 서비스’라는 것도 등장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의 가게 광고가 날아오고, 난데없이 ‘비가 옵니다. 콜택시 불러드릴까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문명이 선사하는 탁월한 기동성은 결국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향유되고 있는 셈이다. 무선이 허락한 자유는 고도로 통합된 기계장치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다. 일상의 구석구석에 파고들면서 지구촌 전체로 확대되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그 촘촘한 그물은 마음이 오가는 말길인 동시에 신체를 가두는 밧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