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4년 반. 그가 한국을 ‘재독(再讀)’한 시간이다. 학습 중 그는 단 한 번의 인터뷰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정도로 침묵을 고집했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밴 습관에 따라 한국에서 나온 모든 미디어를 섭렵했고,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직무는 물론 미국에 두고 온 가족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바로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유명세를 탄 이현정(48) 글로벌마케팅실 상무 얘기다.
이 상무를 만나본 사람은 깔끔한 정장과 단정한 화장 뒤에 숨은 장난기를 쉽게 감지해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끝간 데 모를 ‘호기심’이다. 이 상무는 그렇게 탐구한 한국 사회를 ‘대한민국 진화론’이라는 두툼한 학습보고서로 펼쳐냈다. 한국인이라면 뜨끔할 대목이 적지 않지만, 그는 “평범한 아줌마의 솔직함”이라고 둘러댄다.
- 그간 너무 오래 침묵했는데….
“2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어요. 무임승차 혜택을 누린 제가 발칙하게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보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죠. 그런데 찬찬히 연구해보니 뭔가 신선한 주제가 나올 가능성이 보여 책 쓰기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한국적 시각과 국제적 시각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장점을 살려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25년 전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이 상무는 졸업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산업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에 ‘승승장구’로 요약된다. AT·T, 벨연구소,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등 미국 굴지의 통신회사들을 거쳤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 과정까지 마쳤다.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좀이 쑤신다’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해 30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초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이 돼 한국으로 복귀했다.
한국 인재들 잠재력 크지만 경직되고 획일
- 한국에 와서 까마득한 후배들을 다시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더군요. 그러나 잠재력은 컸지만 너무 경직됐고 획일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이들만 탓하기엔 똑같은 교육, 획일화된 사회구조가 지나치게 견고하다고 봐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화된 가치’가 있어야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더라고요.”
- 많이 지적된 문제인데, 아직도 크게 부족한가요.
“다양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예요. 인재를 규격화된 틀에 집어넣어 양성할 수는 없거든요. 다양성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경쟁력으로는 중진국까지라면 몰라도 그 이상 올라가기는 절대 불가능해요. 영어만 앵무새처럼 잘해봐야 소용없거든요.”
- 하지만 한국의 변화도 매우 빠른 편 아닌가요.
“맞아요. 하지만 국제적 시각에서 보면 아직도 형편없이 부족해요. 인종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사회 내부의 다양성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한번 보세요. 학교에서 조금만 색다른 아이는 바로 ‘왕따’를 당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에요. 우리 내부의 비주류를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진짜 새로운 것은 비주류에서 나오거든요.”
- 미국 인터넷 기업들의 CEO들은 상당수가 이민 1세대라고 지적했는데, 한국의 인종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에요. 인종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해요. 더 큰 문제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혀 훈련이 안 돼 있다는 점이에요. 개방적이라는 미국과 유럽도 인종문제에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어요. 우리는 더 폐쇄적인 데다 경험도 부족한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 특히 인종문제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을 듯한데요.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국제적인 인재를 모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인재는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고, 필요하면 수입해 쓸 수도 있어야 해요. 미국을 보세요. 국제적 인재를 싹쓸이해가고 있잖아요. 그거 보면 얄밉지 않으세요? 미국 인터넷 산업을 보면 외국인 소수민족 1세대가 주도하지 않는 회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예요. 5000만명에서 100명 뽑아 쓰는 것과 50억명에서 100명을 선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죠.”
한국어가 어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하다고 고백한다. 문화적 차이 때문이란다. 그는 영어가 남녀차별이나 높임과 낮춤이 우리말보다 덜한, 평등한 언어라고 평가한다. 한국 문화를 마스터해야만 한국어가 자연스러워지는데, 열린 문화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국제적인 인재인가요.
“남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기회)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우리 문화구조상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기준이기도 해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데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그들은 처음 파리 살롱에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했어요. 하지만 새로운 것은 변두리, 비주류에서 나오죠. 우리처럼 표준편차 제로(zero)인 사회에서는 미리부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문제예요.”
- 비교가 가능한 실력도 있을 텐데요.
“물론이에요. 그러나 수치화된 실력은 제조업과 생산 중심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비교 기준이에요. 쉽게 말해 효율성과 생산성의 10%, 20% 향상이 그런 기준이죠. 인터넷 기업 이베이를 보세요. 다른 기업에 비해 조금 잘한 기업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이잖아요. 21세기 경쟁에서는 기존 공식을 뒤집는 역발상 인재가 필요해요. 주류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 말씀이 매우 실용적이고 일관적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외국 이주민 노동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들을 수용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천재도 한국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미국 친구들도 많이 무식해요. 하지만 미국은 무식이 애교로 인정될 만큼 당분간 굶어 죽을 일은 없는 나라예요. 그러나 우리의 무식은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열을 내는지도 모르겠어요.”
2003년 1월 국내 언론은 그가 삼성의 여성 임원으로 등용됐다는 소식을 ‘드디어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뚫었다’는 식의 다소 흥분된 어조로 보도했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인재들이 유리천장을 뚫었다. 이현정 상무 같은 여성이 갈수록 많아지는 사회, 그것이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진화론’의 핵심 아닐까.
이 상무를 만나본 사람은 깔끔한 정장과 단정한 화장 뒤에 숨은 장난기를 쉽게 감지해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끝간 데 모를 ‘호기심’이다. 이 상무는 그렇게 탐구한 한국 사회를 ‘대한민국 진화론’이라는 두툼한 학습보고서로 펼쳐냈다. 한국인이라면 뜨끔할 대목이 적지 않지만, 그는 “평범한 아줌마의 솔직함”이라고 둘러댄다.
- 그간 너무 오래 침묵했는데….
“2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어요. 무임승차 혜택을 누린 제가 발칙하게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보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죠. 그런데 찬찬히 연구해보니 뭔가 신선한 주제가 나올 가능성이 보여 책 쓰기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한국적 시각과 국제적 시각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장점을 살려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25년 전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이 상무는 졸업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산업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에 ‘승승장구’로 요약된다. AT·T, 벨연구소,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등 미국 굴지의 통신회사들을 거쳤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 과정까지 마쳤다.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좀이 쑤신다’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해 30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초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이 돼 한국으로 복귀했다.
한국 인재들 잠재력 크지만 경직되고 획일
- 한국에 와서 까마득한 후배들을 다시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더군요. 그러나 잠재력은 컸지만 너무 경직됐고 획일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이들만 탓하기엔 똑같은 교육, 획일화된 사회구조가 지나치게 견고하다고 봐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화된 가치’가 있어야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더라고요.”
- 많이 지적된 문제인데, 아직도 크게 부족한가요.
“다양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예요. 인재를 규격화된 틀에 집어넣어 양성할 수는 없거든요. 다양성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경쟁력으로는 중진국까지라면 몰라도 그 이상 올라가기는 절대 불가능해요. 영어만 앵무새처럼 잘해봐야 소용없거든요.”
- 하지만 한국의 변화도 매우 빠른 편 아닌가요.
“맞아요. 하지만 국제적 시각에서 보면 아직도 형편없이 부족해요. 인종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사회 내부의 다양성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한번 보세요. 학교에서 조금만 색다른 아이는 바로 ‘왕따’를 당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에요. 우리 내부의 비주류를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진짜 새로운 것은 비주류에서 나오거든요.”
- 미국 인터넷 기업들의 CEO들은 상당수가 이민 1세대라고 지적했는데, 한국의 인종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에요. 인종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해요. 더 큰 문제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혀 훈련이 안 돼 있다는 점이에요. 개방적이라는 미국과 유럽도 인종문제에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어요. 우리는 더 폐쇄적인 데다 경험도 부족한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 특히 인종문제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을 듯한데요.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국제적인 인재를 모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인재는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고, 필요하면 수입해 쓸 수도 있어야 해요. 미국을 보세요. 국제적 인재를 싹쓸이해가고 있잖아요. 그거 보면 얄밉지 않으세요? 미국 인터넷 산업을 보면 외국인 소수민족 1세대가 주도하지 않는 회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예요. 5000만명에서 100명 뽑아 쓰는 것과 50억명에서 100명을 선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죠.”
한국어가 어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하다고 고백한다. 문화적 차이 때문이란다. 그는 영어가 남녀차별이나 높임과 낮춤이 우리말보다 덜한, 평등한 언어라고 평가한다. 한국 문화를 마스터해야만 한국어가 자연스러워지는데, 열린 문화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국제적인 인재인가요.
“남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기회)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우리 문화구조상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기준이기도 해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데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그들은 처음 파리 살롱에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했어요. 하지만 새로운 것은 변두리, 비주류에서 나오죠. 우리처럼 표준편차 제로(zero)인 사회에서는 미리부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문제예요.”
- 비교가 가능한 실력도 있을 텐데요.
“물론이에요. 그러나 수치화된 실력은 제조업과 생산 중심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비교 기준이에요. 쉽게 말해 효율성과 생산성의 10%, 20% 향상이 그런 기준이죠. 인터넷 기업 이베이를 보세요. 다른 기업에 비해 조금 잘한 기업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이잖아요. 21세기 경쟁에서는 기존 공식을 뒤집는 역발상 인재가 필요해요. 주류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 말씀이 매우 실용적이고 일관적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외국 이주민 노동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들을 수용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천재도 한국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미국 친구들도 많이 무식해요. 하지만 미국은 무식이 애교로 인정될 만큼 당분간 굶어 죽을 일은 없는 나라예요. 그러나 우리의 무식은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열을 내는지도 모르겠어요.”
2003년 1월 국내 언론은 그가 삼성의 여성 임원으로 등용됐다는 소식을 ‘드디어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뚫었다’는 식의 다소 흥분된 어조로 보도했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인재들이 유리천장을 뚫었다. 이현정 상무 같은 여성이 갈수록 많아지는 사회, 그것이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진화론’의 핵심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