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일 중국 옌지에서 열린 다종언어 정보처리 국제학술회의(오른쪽). 미국 성공회를 은퇴한 안마태 신부는 중국 단둥에서 ‘안마태계산기개발공사’를 운영하고 있다.
정보처리와 언어학 분야 전문가가 모인 이 자리에서 작지만 매우 뜻 깊은 시연회가 열렸다. 세벌식 자판으로 유명해진, 안마태 신부(72)가 개발한 중국어 자판 입력법 ‘안마태 정음수입법(正音輸入法)’의 시연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공들여 개발한, 한글을 발음기호 삼아 중국어를 쉽게 입력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중국인 여직원이 한글로 된 자판을 피아노 치듯 세 손가락으로 동시에 두드리자 순식간에 모니터 화면에 한자가 떴고 스피커에서는 중국어 발음이 튀어나왔다. 중국어를 컴퓨터에 입력하려면 한글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데, 이렇게 단번에 입력되니 신기했다.
뜻글자인 한자를 입력하는 일은 쉽지 않다. 수만 개의 글자 중 필요한 글자 하나만을 찾는 일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안 신부는 이 문제를 낱개의 글자로 풀기보다 글자가 모여 형성된 단어로 풀었다. 시제와 조사가 없어 문법이 복잡하지 않은 중국어에서는 단어만 알면 문장 연결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리글자 한글이 한자 발음기호 구실
방법은 이렇다. 한어병음(漢語倂音)에서처럼 한 낱말을 소리나는 대로 입력하되, 그 발음기호로 영어 대신 한글을 이용한다. ‘등소평’이라는 이름을 입력해보자. 鄧·小·平이라는 글자 하나하나를 찾아내 입력하는 대신, 그것의 중국식 발음인 ‘덩샤오핑’을 한글로 친다. 그럼 모니터에 ‘鄧小平’이 뜬다.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인 한자의 발음기호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에 ‘鄧小平’이라는 낱말이 입력돼 있기에 가능하다.
안 신부가 개발한 ‘안음(安音) 3.0’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대표적인 반응이 ‘중국의 역사를 바꿔놓을 작품’이라는 표현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인의 뒷다리를 잡은 대표적인 장애물이 한자였기에 당연한 반응이라 하겠다. 그가 개발한 방식으로 입력할 경우 영어보다 적어도 3배 이상 빠르다고 하니, 중국에서 또 하나의 문자혁명이 시작될 수 있을 듯하다.
안 신부의 관심사는 원래 세벌식 한글 자판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방식이었던 만큼 표준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상공자원부가 기술표준원에서 제정한 KS 5601 두벌식 표준 자판에 별문제가 없다며 세벌식을 평가절하하자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중국어 자판을 개발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중국어 자판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개발하려 했다. 실제로 중국인 학생이 개발하겠다며 자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어 자판 같은 고난도 작업은 학생 한두 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1994년 그는 중국 단둥으로 건너가 ‘단둥안마태계산기개발공사’라는 회사를 차리고 중국어 자판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6만5000단어 수록… 중국 제패 야심
그가 단둥에 둥지를 튼 것은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어서다. 당시 그는 미국 기독교연합회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평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그는 북한에서 개발한 음성인식기가 꽤 높은 수준임을 확인했다. 또한 북한에 소프트웨어 분야의 인재와 한글 연구가가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중국어 자판 개발을 북한의 조선컴퓨터센터에 맡겼다. 물론 총감독은 그가 맡았다. 개발자금을 대고 방향도 지도했다. 그렇게 개발에 착수한 지 11년 만인 2005년 ‘안음(安音) 1.0’이라는 첫 작품을 내놨다. 그 속에는 1만3000개의 단어가 들어 있어 중국어 소사전이라 할 만했다.
1년 뒤 6만5000개의 단어가 들어간 ‘안음 2.0’을 선보인 데 이어, 그해 6월 업그레이드형인 ‘안음 3.0’을 발표했다. 6만5000개의 단어가 들어 있으니 웬만한 중국어는 한글로 다 표기할 수 있다. 한글을 사용해 중국어를 입력할 수 있는 자판은 그렇게 완성됐다.
몇 년 전, 필자는 장편소설 ‘천지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휴대전화를 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뻗어나가는 벤처기업가를 다룬 이야기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꿈은 남달랐다. 한글을 중국어 발음기호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휴대전화에 내장한 뒤 그것을 중국에 수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어려운 한자에 시달리는 중국인에게 디지털시대 문자인 한글을 이용해 편하게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한글로 중국을 제패하겠다는 야심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잊혀가던 그 꿈이 연로한 한 전문가의 집념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제 중국인이 한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휴대전화 문자를 보낼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알파벳보다 3배 이상 빠르다고 하니 한글이라 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세종대왕이 600년 뒤에 올 디지털시대를 예견하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아직도 비웃음거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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