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팔경 정자 중 가장 큰 삼척 죽서루.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남산)에 닿고 싶네.
두타산에서부터 오십 굽이나 굽이친다고 해서 오십천인데, 죽서루에 오른 송강은 오십천 속에서 태백산의 그윽한 산 그림자까지 보고 있다. 가사문학의 대가다운 절창이다.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 … 매년 10월 ‘다례제’
두타산 산중에 살던 이승휴가 죽서루를 찾은 것은 관리들의 초청을 받아서였거나, 아니면 불법에 심취했던 그가 차 한잔 마시기 위해 죽서루 북서쪽 대숲 속에 있던 죽장사(竹藏寺)를 가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죽장사의 풍광은 이승휴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안축의 ‘관동별곡’에 나타나 있다.
웅덩이에 솟은 누각 수부(水府)에 임했고/ 담을 격한 선당(禪堂) 바위를 기댔네/ 스님을 좋아하는 참뜻 아는 이 없고/ 십 리에 뻗친 차 달이는 연기/ 대숲에 이는 바람에 나부낀다.
죽서루에서 보이는 산 그림자 담긴 오십천뿐만 아니라 대숲 너머로 피어오르는 죽장사의 차 달이는 연기(茶煙)도 시인 묵객들의 눈에는 한 폭의 그림이었으리라. 이승휴가 차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어린 시절 원정국사(圓靜國師)가 주석한 절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스님들의 차 살림 분위기가 평생 동안 각인됐지 않나 싶다.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자와 호 모두가 불교용어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산부(현재 경북 성주군) 가리현에서 태어나 12세 때 희종의 셋째 아들인 원정국사의 절로 가 명유 신서에게 ‘좌씨전(左氏傳)’과 ‘주역’을 배우고 14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종조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한다. 늦은 나이인 29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의 용계 옆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10여 년간 은거한다. 이후 지인들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 서기나 녹사 등 문서를 다루는 관직을 맡다가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따라나선다. 다음 해 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서장관으로 가는데,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인질로 가 있던 세자가 호복을 입고 곡을 할까 염려되어 고려식의 상복을 입도록 권유한다. 능력을 인정받아 충렬왕 때는 우사간을 거쳐 충청도안렴사가 되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좌천되고, 뒤에 전중시사에 임명된 뒤 충렬왕의 실정을 간언하다가 파직된다.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호를 ‘동안거사’라 하고, 삼척 구동으로 들어가 당호를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한 뒤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했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잠시 개혁정치에 동참하나 70세가 넘어서는 다시 야인으로 돌아와 대장경(大藏經)을 보았던 자신의 독서당인 용안당마저 간장사(看藏寺)라는 절로 만들어, 출가한 둘째 아들인 담욱(曇昱)이 머문다.
바로 그 간장사가 오늘날 두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은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천은사에서는 매년 10월에 ‘이승휴 선생 다례제’를 올린다고 하니, 다인 이승휴의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서 다시 동해시를 거쳐 삼척 시가지(태백 방면)에 들어서면 바로 죽서루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