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카 혜제를 죽이고 명나라 황제에 오른 영락제의 무덤 장릉(왼쪽). 장조카 단종을 죽이고 조선의 왕위에 오른 세조의 무덤 광릉.
명십삼릉은 명나라 황제 13명이 묻힌 곳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40여km 떨어져 있어 완리창청과 함께 하루 관광코스가 되고 있다. 풍수적 관점에서 명십삼릉을 보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아쉽게도 13릉 가운데 두 곳만 개방하고 있어 온전한 풍수답사가 불가능하다.
조선의 왕릉도 능 뒷산으로는 가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으나 규모가 작아 살짝 들어갔다 올 수 있는 데 반해, 중국의 능은 너무 커서 그렇게 하기 힘들다.
명십삼릉에 관한 책 ‘황릉의 비밀’(위에 난·양스 공저)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미리 읽어보고 여행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는 명십삼릉 터가 정해지기까지의 풍수적 과정도 소개되고 있다.
명십삼릉은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1360~1424)가 당시 최고의 풍수 술사로 알려진 요균경(寥均卿), 증종정(曾從政), 승려 인오영(人吳永) 그리고 예부상서 등을 보내 2년 동안(1407년 7월~1409년 5월) 베이징 주변을 돌아보게 한 뒤 잡은 자리다. 요균경과 증종정은 당나라 이래 대대로 풍수를 가학으로 이어온 요우(寥瑀)와 증문천(曾文)의 후손이다.
당시 터를 잡는 과정을 보면 황당한 장면들이 나온다. 처음에 이들은 완리창청 북쪽 도가영(屠家營)을 황릉 후보지로 정한다. ‘도가영’의 도(屠)는 ‘짐승을 잡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의 성씨는 주(朱)인데, 주(朱)와 돼지를 의미하는 저(猪)의 발음이 같아서 돼지(朱=猪)가 도가(屠家)에 들어가면 반드시 도살된다는 생각 때문에 취소한다.
두 번째 후보지는 창평(昌平) 서남에 있는 양산(羊山)이었다. 양과 돼지(朱=猪)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을 듯했다. 그런데 양산 뒤쪽에 사나운 짐승 이리(狼)의 글자를 딴 ‘낭아욕(狼兒)’이란 마을이 있어 문제가 된다. 돼지 근처에 이리가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자리가 후보지로 선택된다. 1409년 영락제가 직접 살핀 뒤 자신의 능으로 확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장릉(長陵)이다. 이후 이곳은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13명의 황제가 묻힌 능이 되었다.
명십삼릉의 터잡기 과정에서 황제의 성씨 주(朱)가 돼지를 뜻하는 저(猪)와 소리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돼지에 위협적인 글자가 들어간 지명을 피한 것을 보면 어리석은 터잡기 방법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풍수지리는 지리의 이점(地利)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이곳은 완리창청에서 멀지 않은 곳이면서 베이징의 북서쪽으로 북방 이민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통로였다. 이곳을 철저하게 방어하지 못하면 베이징은 위험하다.
황릉이 조성된 이후 이곳에 군대가 배치되어 황릉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북쪽의 이민족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즉 영락제가 좋은 무덤 자리로부터 찾았던 것은 튼튼한 국가 안보와 황실의 무궁한 번영이었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명당발복’이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풍수지리는 ‘지리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다.
명십삼릉을 정했던 영락제는 자신의 장조카이자 2대 황제인 혜제(惠帝)를 죽이고(일설에 의하면 그가 도망갔다고 함) 황제에 올라 황실의 권위를 강화했다. 역시 자신의 장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조선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켰던 수양대군 세조와 비슷하다. 두 임금 모두 풍수를 몹시 신봉했다. 그러나 이 둘의 무덤 터 잡기를 비교해보면 천양지차다. 조선 세조의 능(광릉: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서는 ‘지리(地利)’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릉을 답사하면서 언제나 느끼는 답답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