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006년 가을과 겨울의 패션 트렌드 색은 검정이다. 프라다(왼쪽)와 샤넬 패션쇼.
광학적으로 설명하면, 프리즘에 의해 굴절되어 보이는 태양광선의 가시광선 모두가 흡수되고 전혀 반사되지 않을 때 그 물질은 검게 보인다. 검은색은 이렇게 단순하지만, 인간이 맨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검은색의 종류만 수백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 색이 갖는 의미가 다양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의 납량특집 드라마에 등장하는 저승사자는 우리의 전통 상복이 흰색인 데 반해,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애도의 뜻은 흰색으로 표현하면서 죽음 자체를 상징하는 색은 검정이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에서 검은색은 죄악, 죽음, 질병, 마법 그리고 불행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은 죽음의 모습으로 적을 위협하기 위해 자신을 검게 칠하곤 했다. 서양에서는 16세기부터 영국 왕실에서 상복 색깔로 검은색이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재위 때 공식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갑작스런 상가 방문에 대비해 사무실에 정장 한 벌이나 최소한 넥타이 하나 정도는 검은색을 준비해놓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한편 17세기 중반 영국의 청교도들은 금욕의 상징으로, 흰색 칼라를 제외하고는 경건하고 소박하며 검소한 색상으로 여겨진 검정 일색의 의복을 착용했다. 이러한 종교적 엄숙성은 얼마 전까지 가톨릭 사제들이 외출할 때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세속적으로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의무적으로 입었던 검은 수단에서도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검정이 분노·공격·반항의 표식으로서 실존주의·무정부주의·허무주의 등과 연계되기도 했고, 20세기 말의 펑크 그룹들과 고스(Goth)족들은 폭력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우아하고 세련된 패션 아이템으로 검은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여성 패션과 관련해서 검은색이 주는 가장 강력한 인상의 하나는 파워와 섹시함일 것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직업 영역에 뛰어들면서 생긴 ‘파워드레싱’이라는 용어는, 이젠 더 이상 그 초창기처럼 각진 어깨와 칼라로 딱딱하면서 남성적인 테일러드 슈트(tailored suit)를 연상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잘 재단된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성이 보여주는 절제된 카리스마는 거역하기 어려운 힘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고위 사무직 면접 때는 검정이나 그와 비슷한 색상의 정장을 입는 것이 암묵적 합의처럼 되었다.
완전히 반대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나라에도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파티 문화가 생활의 일부로 정착하려면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파티 하면 아직 검정드레스가 가장 멋진 색상으로 떠오른다. 다른 색들은 그 다음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팜므 파탈은 물론, 주부들이나 짱구만화 속에서도 검은색 섹시 속옷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그러나 누구나 검정 속옷만 입으면 섹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시즌의 가장 강력한 트렌드 색상이 검은색이긴 하지만 상가에 입고 가는 그 검은색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올해의 검은색은 울, 벨벳, 모피, 실크 등의 다양한 소재와 갖가지 장식으로 어우러져 수백 가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소하고 미묘한 차이로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 그것이 패션과 인생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