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18일 금강산 관광 시작 5주년을 맞아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이 하남시 창우리 고 정주영 회장 묘역을 찾았다.
게스트 자격으로 평양골프장에서 라운딩한 열린우리당 C 의원은 “아태 부위원장이 한가한 자리가 아닌데, 환대가 대단했다. 이 부위원장은 3박4일 내내 직접 방문단을 안내했다. 남북 경협에 대한 의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개성, 평양 관광을 롯데관광이 한번 해보시오.”(이종혁 부위원장)
이 부위원장이 김기병 롯데관광 회장에게 개성 관광을 제의한 것은 8월29일 평양골프장에서다. 이 부위원장의 제안을 현장에서 들은 C 의원은 “이 부위원장이 개성뿐 아니라 평양 관광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롯데관광에 제의했다”고 전했다.
北 “어떻게 내칠 수 있느냐”
8월31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최용묵 현대그룹 경영전략팀장(사장), 윤만준 현대아산 대표이사 등 수뇌부를 이끌고 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식을 참관키 위해 금강산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틀 전까지 평양골프장에서 남측 인사들을 극진하게 대접한 이 부위원장은 금강산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부위원장뿐 아니라 아태 관계자들도 코빼기를 비추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높게 평가하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어떻게 내칠 수 있느냐”는 얘기가 현 회장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북으로 가는 길은 ‘아태’로 통한다. 인도적 지원이든 경협이든 아태를 거쳐야 한다. 골프장 접대에서 미뤄볼 수 있듯, 아태는 경협에 ‘목말라’하면서도 ‘경협의 동지’인 현대를 차갑게 대하고 있다. 고 정주영 회장이 터를 닦고, 고 정몽헌 회장이 꽃을 피운 현대의 대북사업이 현 회장의 표현대로 ‘기로에 선’ 것이다. 아태는 왜 ‘돈줄’인 현대를 홀대하고 있을까.
해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흥정을 붙여 값을 올리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인 비리로 대표이사직에서 쫓겨난 김 부회장의 거취를 빌미로 돈을 더 챙기겠다는 뜻이라는 것. 그러나 현대의 대북사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실리도 작은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김 부회장 개인에 대한 북한의 ‘의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리’보다는 ‘신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 처지에서 막힌 길을 뚫으려면 아태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이 화해한 뒤, 현 회장과 이 부위원장(아태)이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그룹 고위관계자는 “복잡한 3차방정식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3차방정식의 축은 현정은-김윤규-이종혁이다. ‘기로’를 벗어나기 위한 현대 측의 해법도 바로 이 3차방정식을 푸는 데 모아진다.
김 부회장이 누구인가. 김 부회장은 1989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와 함께 평양을 방문한 이후 16년 동안 대북사업을 맡아왔다. 이 부위원장은 물론이고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과도 친분이 닿는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통’이다. “김윤규가 입을 열면 아태 인사들마저 다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북한은 김 부회장을 크게 신뢰했으며 또 의존했다고 한다.
김 국방위원장은 7월16일 현 회장을 만나 개성 및 백두산 시범관광을 제의하면서 “김 부회장과 잘해보라”고 했다. 김 국방위원장과 현 회장의 면담도 김 부회장이 없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뿐인가. 김 부회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도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8·15 축전 때 정 장관과 김 위원장 간의 면담이 이뤄진 ‘고리’가 김 부위원장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김 부회장은 현대가(家)의 마지막 가신(家臣)이다. 그는 ‘근면’이 최고의 덕목이던 ‘정주영의 현대’에서도 특히 근면했다. 후배들은 그를 두고 ‘워크홀릭’이라고 말한다. 독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독선적이며 워크홀릭이다’는 평가는 내부에 적이 많고, 후배들의 인심을 얻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의 갈등을 ‘현정은호’ 출범으로 등장하게 된 ‘신흥 세력’과 ‘마지막 가신’ 간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경협 중단 가능성은 낮아
현대그룹의 현대아산에 대한 ‘감사’는 다소 이례적이었다. 계열사에 대한 정기 감사라지만, 감사의 첫 대상으로 현대아산이 결정된 것과 김정일-현정은 만남이 이뤄진 7월에 감사가 이뤄진 것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한 관계자는 “‘신흥 세력’이 현 회장을 부추겨 김 부회장을 ‘날렸다’는 시각은 사안을 좁게만 바라본 것”이라고 했다. 현 회장이 부추김을 당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2003년 10월 시아버지(정주영)와 남편(정몽헌)에 이어 현대그룹의 사령탑에 오른 뒤 “가정주부가 과연…”이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광폭 행보’를 보여왔다. 경영권을 위협하던 시숙부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정면 대결을 벌여 승리했고, 그룹을 안정궤도에 올려놓았다. 미니그룹으로 전락했으되, 현대그룹 임직원들은 정주영 회장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자랑으로 여길 만큼 그룹을 제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현 회장은 김 부회장의 ‘독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8월 김 부회장의 현대아산 대표이사직을 박탈한 뒤 김 부회장의 원직 복귀를 요구하는 ‘강수(强手)’를 받아야 했다. 현 회장이 침묵을 지키자, 아태는 금강산 관광 사업 축소를 통보하는 등 압박을 가해왔다. 현 회장은 이 ‘강수’를 ‘초강수’로 되받았다. 8월12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김 부회장을 비리 경영인으로 낙인 찍고는, “비굴한 이익보다는 정직한 양심을 선택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3차방정식의 또 다른 축인 아태가 현대와의 경협을 중단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태는 비정부기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론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조직이다. 김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 관리와도 무관치 않다. 현대아산에 따르면 북한은 8월 한 달간 금강산 관광 사업으로 3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가져갔다. 아태는 “김 부회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소리 높였으나, 그 뒤로는 현대그룹을 자극하는 걸 자제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아태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할 까닭도 명분도 없다”고 말했다.
3차방정식의 세 축은 모두 금강산 관광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현 회장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당신(고 정몽헌 회장)의 목숨과 맞바꾼 큰 뜻이기에 끝까지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김 부회장도 “대북사업은 정주영 회장이 1조5000여억원을 투자한 국가와 민족적 사업이다. 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은 통일신보 9월17일자에 기고한 ‘6·15 시대와 금강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주영 선생은 오늘의 김구”라며 “금강산 관광사업은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현정은-김윤규 화해가 일차 관문
파국으로 치닫는 듯하지만 결국 현대와 아태의 다툼은 ‘기 싸움’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언급했듯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이 갈등을 봉합하고, 현 회장과 이 부위원장이 담판을 지으면 방정식은 풀린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김 부회장을 대표이사직에 복귀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김 부회장의 개인 비리도 걸림돌이다. 현대아산은 김 부회장의 백의종군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이사직을 박탈하면서도 부회장 직함을 유지시킨 만큼 결심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 복귀는 없다”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그를 껴안을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김 부회장의 뜻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곁다리로 컨설팅하는 수준은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해결의 열쇠는 아태가 아니라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이 쥔 셈이다. 현 회장이 직접 썼다는 글을 통해 김 부회장의 비리를 만천하에 공개하며 ‘퇴로’를 막은 것을 두고 아마추어적이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은 과연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물밑에서 발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결과는 곧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