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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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의 가풍은 차 한 잔이 전부라네

  • 입력2005-09-09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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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승의 가풍은 차 한 잔이 전부라네

    나옹선사의 영정이 봉안된 신륵사 조사당(왼쪽). 나옹선사 부도.

    지금 나그네가 가고 있는 신륵사는 나옹선사가 열반한 곳이다. 나그네는 일찍이 나옹선사의 그림자를 좇아 만행한 적이 있다. 선사가 흘린 향기로운 발자국을 줍고 다녔던 것이다. 오대산 북대 미륵암에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라고 시작하는 ‘토굴가’가 나옹선사의 선시라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가 하면 나옹선사가 출가한 문경 사불산 묘적암에서는 현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이 누에고치처럼 암자 문을 닫아걸고, 자결할 각오로 용맹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뤘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옹선사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차살림을 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 회상(會上)에 머물 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공이 나옹에게 준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에서 과자 먹으니 해마다 어둡지 않은 약이네(하략)’라는 전법게에도 차(茶)가 나오고, 나옹선사가 남긴 유일한 다시(茶詩)도 중국 승려들의 차 따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차나무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없고/ 내려온 대중 산차(山茶)를 딴다/ 비록 터럭만한 풀도 움직이지 않으나/ 본체와 작용은 당당하여 어긋남이 없구나.

    확실히 중국의 고승 위산과 앙산이 차를 따면서 ‘본체와 작용’을 놓고 선문답한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나옹이 지공 회상에 머물 때 지은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나옹의 법명은 혜근(惠勤). 그는 스물한 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느껴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한다. 동네 어른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것. 나옹은 요연선사 밑에서 정진하다 여러 절을 거쳐 25세 때 회암사로 가 4년 만에 대오(大悟)한다. 이후 나옹은 자신을 인가(印可)해줄 스승을 찾아 중국 연경 법원사로 가 인도승 지공을 만난다. 지공에게서 인가받은 나옹은 다시 임제 법맥을 이은 자선사의 처림(處林)을 친견한다. 그때 처림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대도(大都·연경)에서 지공 스님을 뵙고 옵니다.”

    “지공은 날마다 무슨 일을 하는가.”

    “천검(千劍·지공의 가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나옹의 가풍)을 가져오게.”

    이에 나옹은 깔고 앉은 방석을 들어 처림을 후려쳤고, 처림은 마룻바닥에 넘어지면서 소리쳤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나옹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처림은 크게 웃으며 나옹을 방장실로 안내한 뒤, 차를 권했다. 선사가 차 한 잔을 권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고, 또한 제자가 스승에게 헌다(獻茶)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나옹은 스승 지공의 제삿날에 다음과 같이 읊조리곤 했던 것이다.

    이 불효자는 가진 물건 없거니/ 여기 차 한 잔과 향 한 조각을 올립니다(不孝子無餘物 獻茶一香一片).

    나그네는 신륵사에 도착하여 조사당으로 먼저 간다. 열린 문 사이로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진영(眞影)이 보인다. 나그네는 차 한 잔을 대신하여 고개를 숙이고 합장한다. 스님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 주위의 솔숲에서는 범패 같은 솔바람 소리가 청아하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나와 처음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다 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또 우회전해 42번 국도를 타면, 여주대교를 건너게 되고 신륵사 주차장에 이른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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