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중개인은 “내가 미리 고용한 아르바이트생들이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을 테니 9시 전에만 오면 된다”고 했지만, 이 씨는 집에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어서 세놓기도 좋고, 바로 옆에 경전철인 스카이트레인 역이 있는 데다, 최고의 주택건설업체로 평가받는 보사(Bosa)가 짓는 것이어서 전망 좋은 위층만 확보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큰 차익을 남기고 분양권을 전매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웨스트우드 플레이스’라 이름 붙여진 아파트 현장에 도착한 이 씨는 줄지어 늘어선 인파에 놀라고 말았다. 중개인이 하루 100캐나다달러(이하 달러)씩 주고 고용한 아르바이트 대학생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가 보다. 간신히 40번대 초 순번을 배정받은 이 씨는 원하던 위층 확보에 실패했고,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다른 기회를 찾기로 했다. 이날 분양한 물량은 모두 162가구. 한인 중개인들은 그중 35~40%를 한국인들이 분양받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실수요자는 10% 정도. 나머지는 모두 분양권 전매를 노리는 사람들이었다.
고층 아파트 분양 새벽부터 줄 서기
이 씨는 이미 부동산 투자로 짭짤한 재미를 본 적이 있다. 2002년 다운타운 콜하버 지역 아파트를 78만 달러에 사 올 5월 110만 달러에 팔았다. 또 같은 해 서리시 남쪽에 있는 단독주택을 86만 달러에 사 최근 중국인 이민자에게 125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불과 3년 사이에 집 두 채를 사고 팔아 71만 달러라는 거금을 움켜쥔 것이다. 1달러당 원화를 840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돈으로 약 6억원에 이르는 돈이다.
캐나다 부동산 경기를 낙관하는 이 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밴쿠버 다운타운의 고층 아파트 한 채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토론토의 고층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입주해 살기 위해 고층 아파트 맨 꼭대기층을 전부 사용하는 이른바 ‘팬트하우스’ 한 채를 각각 구입했다.
부동산 매입을 투기로 죄악시하던 영주권자 윤모 씨도 최근 들어 생각을 바꿨다. 그는 한국 건설업체가 들어와 서리시 북쪽에 짓고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의 투자는 일종의 ‘묻지 마 투자’에 가깝다. 자신이 3년 전 산 단독주택 값이 35만 달러에서 60만 달러로 급등하자 그로 인해 생긴 여유자금을 활용, 다른 집을 사들인 것이다. 즉 3년 전 30만 달러 초반대로 형성됐던 감정평가액이 요즘 들어 60만 달러 가까이 올라가자 감정차익 30만 달러에서 65% 수준인 20만 달러 정도를 담보대출 형태로 얻어 이를 부동산에 투자한 것. 한마디로 지금 사는 집을 담보로 잡혀 다른 집을 산 것이다.
밴쿠버 스카이트레인 역 인근에 있는 고층 아파트 건설 현장. 분양 당시 한국 교민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몇 시간 만에 다 팔려나갔다.
분양을 받기 위해 현장에 나간 윤 씨는 요즘 한인 사회에 일고 있는 부동산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파트 위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와 계약을 하는가 하면, 한 부부가 6채의 아파트를 그 자리에서 사들이는 경우도 봤다. 36층 타워의 24층에 있는 방 2개짜리 아파트를 30만9000달러에 계약한 윤 씨는 입주 시점인 2년 6개월 후 이전에 분양권을 전매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명 건설회사에 다니다 명예퇴직한 2년차 영주권자 송모 씨는 전직의 이점을 살려 아예 부동산 투자가로 나섰다.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주택을 사 단기 자금을 운용하고, 교외의 개발 예상지를 사 때를 기다리는 등 ‘짧고, 긴’ 투자전략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는 것. 실제로 송 씨는 2년 전 밴쿠버에 오자마자 아파트와 우리 식 연립주택인 타운하우스를 두 채씩 구입해 한 채당 8만~10만 달러의 시세차익을 보고 팔았다. 지금은 밴쿠버 외곽지역인 메이플리지와 미션, 칠리왝시 인근을 다니며 개발 예정지를 점찍느라 분주하다.
밴쿠버 중심 주거지인 잉글리시베이 해변 전경.
이 같은 결과는 과열 양상을 띠던 부동산 경기가 서서히 둔화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는 것이어서 큰 주목을 받았다. BC부동산협회 데이브 바클레이 회장은 지금의 열풍을 “전체적으로는 소비자들의 낙관 심리 확산과 함께 부동산을 투자의 방안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전문가 예상 깨고 가파른 상승
BC신용협동조합중앙회(CUCBC)는 최근 한 보고서를 통해 낮은 모기지 금리, 이민자 및 캐나다 내 유입인구 증가, 지속적 경제성장, 소비자들의 경기낙관 심리 등이 부동산 열풍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본토에서 꾸준히 유입되고 있는 신흥부자들이 주인이 요구하는 가격보다 더 높은 값으로 집을 사 가격 인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밴쿠버 도심 전경.
경력 17년의 베테랑 부동산 중개인인 한희선 씨는 지금의 캐나다 부동산 시장을 “소비자로 하여금 집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상투를 잡을까 망설이느라 투자를 미뤘다가는 1년도 못 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기 십상이니 누가 몸이 달지 않겠냐는 것이다. 입주 전까지 총 분양가의 10~15%만 내면 되는 결제방식과 3~4% 수준의 낮은 모기지 금리, 20세 이상 자녀에게 증여할 경우 ‘선물(gift)’로 보고 양도소득세를 물리지 않는 세제 등도 사람들로 하여금 손쉽게 집을 사게 만들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밴쿠버에 부동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점을 2000년쯤으로 본다. 진원지는 버나비시에서도 비선호 지역 중 하나이던 에드먼드 스카이트레인 역 부근의 ‘아카디아’ 고층 아파트. 아카디아 등장 후 주변이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열풍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다운타운 외곽이 고밀도 주거지로 개발되면서 폭발적 수요를 나타냈다. 다운타운의 일부 아파트는 분양 개시일 3일 전부터 진을 치는 텐트족까지 등장하는, 캐나다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부동산 열풍의 ‘원조’ 아카디아 아파트는 지금, 분양가 28만 달러의 2배가 넘는 60만 달러대의 시세를 형성하고 있다.
50여명의 한인 중개인들이 함께 모여 설립한 하나부동산. 요즘 캐나다 한인사회에서는 부동산중개인 되기 붐이 일고 있다. 광역 밴쿠버에서만 200여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는 2년 전에 비해 58%포인트나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개인들은 캐나다 부동산 시장에서 한국인은 ‘개미군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파트 등 60채에 이르는 주택을 소유한 전문 투기꾼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보통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한인들은 중소형 아파트 두세 채를 소유하고 있는 정도가 고작이라는 것이다. 분양가가 100만~900만 달러에 이르는 대형 주택 매물은 주로 미국인 갑부나 이란인 거부, 중국 본토에서 넘어오는 신흥부자들을 주 고객으로 삼고 있다.
영주권자나 유학생 부모가 아닌, 캐나다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한국인들의 부동산 투자는 말은 많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눈먼 뭉칫돈’이 편법으로 들어와 골프장, 호텔 등 덩치 큰 부동산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부동산 매입을 보는 캐나다 사회의 시각은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투기로 죄악시하기보다는 몇십 채를 사든 세금만 제대로 내면 정당한 투자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1가구 1주택자가 집을 팔 경우 세금이 없지만, 2주택자가 두 번째 집을 팔 경우 내는 양도소득세는 집값의 28%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캐나다인들도 부동산이 ‘장난’이 아니라는 점을 서서히 인식하면서 ‘투자’ 내지 ‘투기’에 상당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싼 집을 사 리모델링해 파는 주택 개량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과열상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거품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아직 끝이 아니다”고 말한다.
헬뮤트 패스트릭 CUCBC 수석경제연구원은 최근 ‘밴쿠버 선’지와 한 인터뷰에서 “현재는 가격 거품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거품 붕괴 운운 또한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최근 5년간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 여력은 충분하다”면서 “주택 가격은 올해 약 10%, 2006년에는 8%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부동산 중개인협회 조지 파후드 씨 또한 “밴쿠버 부동산 값이 상승세라고는 하지만 북미주 기타 주요 도시와 비교했을 때 상승률은 7위에 불과하다. 호주의 시드니보다 가격 오름폭이 작다”며 큰 기대를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