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대학 사회가 맡아오던 정치적 실천의 기능은 정치권 참여로, 현실 비판의 기능은 현실주의적 논리로,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은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전도되었다.
최근 들어 사람들의 복장을 뒤집는 뉴스의 중심에 대학, 혹은 대학 구성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국적 이탈자 그룹 중 대학 교수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연구원의 연구비를 전임교수들이 착복했다는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그리고 입시를 둘러싼 갈등에서도 대학이 보여주는 모습은 ‘학문의 전당’의 이념과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이다. 또 대학이 재벌에 몸을 낮추는 것은 요즘 사회의 ‘트렌드’라고도 할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상아탑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서는 대학이 상아탑인 척이라도 하던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다. 대학 사회의 현실을 아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어쩌면 한국의 대학 사회가 부패하는 큰 원인은 교수에 대한 사회적 가치 부여가 너무 높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교수가 가장 지도적인 여론 형성층으로 신뢰받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아온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많은 부분 한국 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대학 사회의 긍정적 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학 사회가 맡아오던 정치적 실천의 기능은 정치권 참여로, 현실 비판의 기능은 현실주의적 논리로,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은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전도되었다. 학생은 등록금 단위로 환산되고, 학교 당국자들의 주요 소임은 ‘펀드’를 끌어오는 것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한국의 대학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이 더 이상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고, 특히 계급 재생산의 중요한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학 사회가 내부적으로도 계급적, 성적, 지역적으로 위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대학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대학은 점점 더 한국 사회의 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기구가 되어가고 있다.
학벌이 계급이라는 말처럼,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계급 재생산의 장이다. 이는 성적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법으로 지역 안배와 성적 할당을 규정해놓아도 대학 사회의 계급적, 지역적, 성적 위계화를 교정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이것은 대학이 내부적인 자정과 교정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논리에 얽히고 계급생산의 장으로 변해
비정규직 교수, 연구원과 전임교수들 사이의 차별과 격차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차별을 시정하려는 주체가 더 이상 ‘대학’이 아닌 ‘국가’가 되고 있고, 거꾸로 국가의 개입에 대해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사수하기 위해 몸소 나서는 것이 특권을 지닌 전임교수들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스스로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와 싸우는 모습, 이것이 한국 대학이 보여주고 있는 현주소인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기능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일부 대학 사회가 이른바 ‘국가’ 기구나 하물며 동사무소 정도의 합리성과 투명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수 임용에서 연구비까지 대학 사회의 특권층(이는 주로 전임교수들로 이루어진다)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리와 모순에 대해 최소한의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대학 내의 소수자인 비정규직이 기댈 곳이 ‘국가’뿐인 것이 요즘 대학의 현실이다.
실상 대학은 단일한 집단의 단일한 정체성으로 대표될 수 없다. 대학은 정규직 교수, 비정규직 연구원,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 일용직 노동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해관계와 권력의 복합체다.
대학의 자율성을 말한다면 과연 누구의, 어떤 집단의 자율성과 목소리를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 현재 대학 사회에서 대학 구성원들 내의 마이너리티들이 ‘대학’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더 많은 개입을 통해, 특히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마이너리티들의 개입을 통해서만 진정 자율적이 될 것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의 복장을 뒤집는 뉴스의 중심에 대학, 혹은 대학 구성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국적 이탈자 그룹 중 대학 교수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연구원의 연구비를 전임교수들이 착복했다는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그리고 입시를 둘러싼 갈등에서도 대학이 보여주는 모습은 ‘학문의 전당’의 이념과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이다. 또 대학이 재벌에 몸을 낮추는 것은 요즘 사회의 ‘트렌드’라고도 할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상아탑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서는 대학이 상아탑인 척이라도 하던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다. 대학 사회의 현실을 아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어쩌면 한국의 대학 사회가 부패하는 큰 원인은 교수에 대한 사회적 가치 부여가 너무 높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교수가 가장 지도적인 여론 형성층으로 신뢰받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아온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많은 부분 한국 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대학 사회의 긍정적 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학 사회가 맡아오던 정치적 실천의 기능은 정치권 참여로, 현실 비판의 기능은 현실주의적 논리로,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은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전도되었다. 학생은 등록금 단위로 환산되고, 학교 당국자들의 주요 소임은 ‘펀드’를 끌어오는 것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한국의 대학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이 더 이상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고, 특히 계급 재생산의 중요한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학 사회가 내부적으로도 계급적, 성적, 지역적으로 위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대학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대학은 점점 더 한국 사회의 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기구가 되어가고 있다.
학벌이 계급이라는 말처럼,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계급 재생산의 장이다. 이는 성적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법으로 지역 안배와 성적 할당을 규정해놓아도 대학 사회의 계급적, 지역적, 성적 위계화를 교정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이것은 대학이 내부적인 자정과 교정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논리에 얽히고 계급생산의 장으로 변해
비정규직 교수, 연구원과 전임교수들 사이의 차별과 격차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차별을 시정하려는 주체가 더 이상 ‘대학’이 아닌 ‘국가’가 되고 있고, 거꾸로 국가의 개입에 대해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사수하기 위해 몸소 나서는 것이 특권을 지닌 전임교수들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스스로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와 싸우는 모습, 이것이 한국 대학이 보여주고 있는 현주소인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기능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일부 대학 사회가 이른바 ‘국가’ 기구나 하물며 동사무소 정도의 합리성과 투명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수 임용에서 연구비까지 대학 사회의 특권층(이는 주로 전임교수들로 이루어진다)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리와 모순에 대해 최소한의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대학 내의 소수자인 비정규직이 기댈 곳이 ‘국가’뿐인 것이 요즘 대학의 현실이다.
실상 대학은 단일한 집단의 단일한 정체성으로 대표될 수 없다. 대학은 정규직 교수, 비정규직 연구원,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 일용직 노동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해관계와 권력의 복합체다.
대학의 자율성을 말한다면 과연 누구의, 어떤 집단의 자율성과 목소리를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 현재 대학 사회에서 대학 구성원들 내의 마이너리티들이 ‘대학’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더 많은 개입을 통해, 특히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마이너리티들의 개입을 통해서만 진정 자율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