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남옥선(54·서울 구로1동) 씨가 요즘 자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행복’의 근원은 6월2일 문 연 롯데마트 구로점. 일주일 새 벌써 세 번이나 쇼핑을 다녀올 만큼 대형할인점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거든요. 그 동안은 동네 슈퍼랑 알뜰장터만 이용했어요. 근데 걸어서 5분 거리에 할인점이 생겼잖아요. 가보니까 물건도 많고, 싸고, 너무너무 편리하고…. 세 번 갔지만 아직 구경도 다 못했어요.”
무엇보다 남 씨를 즐겁게 하는 건 ‘끼워 팔기’. 샴푸 하나를 사면 한 개를 더 받는 식의 ‘혜택’에 겨워 이것저것 생필품을 사들이느라 손이 바쁘다.
“애들은 과소비하는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지만, 사놓으면 언젠가 쓰지, 버리나요.”
남편과 함께 장을 보게 된 것도 큰 변화다.
“한꺼번에 (물건을) 많이 사니까 혼자 다 들고 갈 수 없잖아요. 또 24시간 영업이라 저녁 먹고 산책 겸 해서 슬슬 걸어가 보기도 괜찮고요. 남편도 좋아해요. 못 보던 새 상품들 하며, 가격이 다 써 있으니까 그거 비교해보는 거 하며…. 이래저래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나요.”
남 씨는 “할인점 문 연 뒤 딴 가게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도 남 씨가 동네 슈퍼를 찾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 씨 가족은 서울 시민치고는 참으로 늦게 대형할인점의 ‘맛’을 본 셈이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 중소도시 상권마저 할인점이 싹쓸이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한 ‘시장’의 기능을 넘어 가족·지역 주민 간 커뮤니케이션 센터로서의 구실까지 자임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할인점이다.
대형할인점이 이 땅에 처음 선보인 것은 1993년이다. 신세계그룹이 서울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낸 것. 이어 뉴코아백화점의 킴스클럽, 외국계 할인점인 프라이스클럽(현재의 ‘코스트코’) 등이 문을 열었다.
주부 이미희(41·경기도 안산) 씨는 94년 경기 광명시에 거주할 당시 처음 대형할인점을 접했다. 철산주공아파트 단지 옆 상업지구에 나산클래프 1호점이 문을 연 것이다.
“한마디로 신기했죠. 일단 너무 크고, 온갖 물건이 다 있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동네 아줌마들이랑 아이 들쳐 업고 곧잘 다녔어요. 그때는 신선식품보다 휴지, 가공식품, 옷 같은 걸 주로 많이 샀지요.”
이 씨의 말대로 초창기 대형할인점은 서구의 그것처럼 공산품을 싼값에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아직 ‘가격 비교’ ‘계획 소비’ 등의 쇼핑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었다.
폭발적 성장의 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한 푼이 아쉬웠던 소비자들은 비로소 대형할인점으로 눈을 돌렸다. 신세계 경영지원실 노은정 과장은 “이때부터 싼 물건을 찾아 몰려다니는 현상이나, 생필품 위주의 계획 소비·대량 구매가 일반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97~99년에는 마크로, 월마트, 까르푸 등 외국 유명 할인점들의 한국 상륙이 잇따랐다. 롯데그룹도 ‘롯데마트’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10, 20대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회사원 박리디아(36·서울 서초동) 씨는 “유럽 할인점은 생필품과 인스턴트식품 위주다. 우리나라는 신선식품이 중심인데, 그것이 가족 고객을 끌어모으는 데 큰 구실을 한 듯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할인점들은 친절한 서비스와 ‘원스톱 쇼핑’에 중점을 둔 마케팅, 우리 식생활에 맞는 다양한 신선식품 구비로 외국의 ‘창고형’ 할인점을 압도하는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할인점 쇼핑은 아직 ‘주부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족 문화’로 자리 잡게 한 결정적 사건은 셔틀버스 폐지였다. 이마트 산본점 방종관 점장은 “새 운송수단이 필요해진 주부들이 쇼핑에 남편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라 말한다.
“많은 물건을 실어나르려면 차가 필요하죠. 승용차는 대개 한 집에 한 대뿐이니까, 또 운전 못하는 주부들도 많으니 자연스럽게 남편들이 ‘쇼핑 보조원’으로 나서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낮보다는 밤, 주중보다는 주말에 손님들이 확 몰리기 시작했죠.”
홈플러스 마케팅팀 관계자도 “고객들의 평균 객단가를 보면 4만원 안팎이다. 대충 비닐봉지 두 개 분량인데 혼자 들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평일 매출의 50% 이상이 오후 6시부터 오전 1시 사이에 발생한다는 점이 그 가장 뚜렷한 증거”라는 설명이다.
2003년 말부터는 웰빙 열풍이 휘몰아쳤다. 신선한 먹거리,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생활 트렌드는 소비 트렌드와 직결된다. 웰빙 트렌드 역시 다양한 새 소비 영역을 창출했고, 이에 기꺼이 동참한 남성들은 아내의 먹거리 쇼핑에도 이전보다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주5일 근무제 확산의 영향력도 컸다. 이전에는 그나마 “피곤하다”며 도우미 구실을 거부했던 남성들의 핑곗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쇼핑 즐기는 남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것도 큰 변화다. 과거에는 ‘쫀쫀하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시각이 대종을 이뤘다면, 이제는 센스 있고 현명한 쇼핑 센스를 지닌 남성이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아이 실은 카트를 도맡아 밀며 아내와 다정히 쇼핑을 즐기는 남성의 모습은 어느새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의 대명사가 됐다.
롯데마트 구로점의 네일숍(왼쪽)과 홈플러스 동대문점 문화센터에서 요가 수업을 받는 고객들(가운데). 장난감 차 모양의 유아용 좌석이 달려 있는 롯데마트 구로점의 쇼핑카트.
밥 먹고, 책 보고, 머리 손질까지… 주부들에겐 스트레스 해소처
할인점이 주요 상권을 장악하면서 사람들의 생활 패턴도 큰 변화를 맞았다. 일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김지영(38) 씨는 “요즘 아이들은 ‘쇼핑’ 하면 할인점밖에 모른다. 3학년 아이들에게 교과과정에 따라 재래시장에 대한 설명을 하면 하나같이 ‘그게 뭐냐’는 반응들이다. 할 수 없이 ‘집 근처 재래시장에 대한 조사를 해오라’는 숙제를 내면 끝내 못 찾았다며 빈손으로 오는 아이가 3분의 1”이라 말한다.
이렇게 갓난아이 시절부터 카트에 실려 다니다, 어느 정도 커선 어린이용 카트를 직접 몰고 다니는 아이들을 ‘카트 베이비’라 부르기도 한다.
가족 쇼핑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할인점의 ‘메인 스트림’은 주부들이다. 남편들 중에는 “도대체 할인점이 뭐 그렇게 좋다고 열심히 쫓아다니느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도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래시장보다 물건 값이 더 비쌀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부들의 생각은 분명하다.
주부 강미혜(38·서울 부암동) 씨는 “이전에는 ‘싸서 간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주부들에게 할인점은 스트레스 해소처”라고 말한다.
“주부들이 반바지 입고 화장 안 하고, 애 둘 데리고 들어가서도 귀부인 대접 받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겠어요. 아이들 떠들어도 눈총 안 받죠, 하루 종일 죽치고 있어도 뭐라 그러는 이 없죠. 또 놀이방에 푸드 코트까지 있으니 어린아이 둔 주부들한테는 더 이상의 사교장이 없지요. 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요.”
아이들이 커서 초등학생이 되면, 할인점은 ‘주차 대기소’로 그 용도가 바뀐다. “그때쯤엔 남편 차를 빼앗아서라도 직접 모는 주부들이 많아지거든요. 아이들 학원 순례를 시켜야 하니까요. 그럴 때 할인점은 정말 편리한 대기 장소예요. 주차료 안 받는 데다 사이사이 쇼핑하고, 식사하고, 미용실이며 네일숍에 서점까지, 시간 보낼 데가 참 많잖아요.”
주부 황금희(43·서울 정릉동) 씨는 “일산 살 때 처음 할인점에 가서 온갖 식재료며 신선한 생선이 가득한 걸 보고는 마치 내 삶이 격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 계획 쇼핑을 다짐해도 자꾸 과소비를 하게 되더라고요. 정릉으로 이사 올 때도 ‘주변에 할인점이 없으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에요. 생활의 큰 즐거움이 사라진 느낌이에요.”
홈플러스 동대문점의 푸드 코트에서 저녁식사 메뉴를 고르고 있는 고객들.
자영업을 하는 박종택(38·경기 반월) 씨는 “백화점은 사방이 꽉 막힌 데다 괜히 격식을 따지는 것 같아 숨이 막히고 불편하다. 재래시장은 더 짜증난다. 하지만 할인점은 이것저것 구경할 것도 많은 데다,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나들이하는 것을 무척 좋아해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는 편”이라고 했다.
회사원 이영수(37·서울 여의도) 씨는 “주전부리를 좋아해서인지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한 할인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시식 코너에서 아이와 맛에 대해 품평을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죠. 카트를 밀며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때론 지겨울 때도 있지만, 또 쇼핑 끝난 뒤 푸드 코트에서 이것저것 먹을 생각을 하면 기분이 금방 좋아져요.”
지난해 결혼한 회사원 허만섭(36·서울 공덕동) 씨는 아직 신혼인 아내와 데이트 삼아 주말 쇼핑을 즐긴다. “롯데마트 서울역점이나 이마트 용산점을 갑니다. 이번 주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고를 수 있다는 게 좋고, 힘들여 번 돈으로 아내와 여유 있는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게 느껴지고요.”
허 씨는 “제품이 잘 구비된 할인점에서 쇼핑을 하다 보면 삶이 업그레이드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면에서 건물 내부에 좋은 할인점을 갖춘 최신 주상복합아파트 등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한다.
회사원 전순영(48·경기 김포) 씨에게 할인점 방문은 어느새 대학생, 고등학생이 된 두 자녀와의 거의 유일한 바깥나들이 기회다.
“그 나이쯤 아이들은 부모랑 다니길 싫어하게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일요일 오후 쇼핑은 오래전부터 굳어진 일종의 ‘공식 코스’라 툴툴거리면서도 잘 따라와요. 쇼핑 후 할인점 내 식당에서 외식을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죠. 우리 부부에겐 더없이 소중한 시간입니다.”
강신공(57·서울 일원동) 씨 가족은 주말마다 3대가 함께 쇼핑을 즐기는 경우. 일요일 저녁이면 강 씨 부부와 큰딸 내외, 손자, 미혼인 딸들까지 7~8명의 대부대가 이마트 양재점이나 하나로마트 양재점으로 출동한다. 가족 모두 일주일 한 번 있는 나들이를 즐기는 편이어서 밖에 나가 있던 자녀들도 “오늘 7시에 출발할 예정”이라는 부모의 전화를 받으면 곧장 집으로 들어올 정도다. 일요일 저녁이면 그렇게 할인점에서 산 생선회, 스테이크 등으로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린다.
하지만 추세가 그렇다 해서 모두가 ‘함께 쇼핑’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맞벌이 주부 이미수(37·서울 평창동) 씨는 남편과 함께 쇼핑 다니기 싫어 기를 쓰고 운전면허를 취득한 경우다. “들어간 지 10분만 지나면 벌써 ‘다 샀냐’ ‘나가자’ 보채고, ‘이건 왜 사냐, 저것도 사지 마라’ 하는 통에 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하도 짜증이 나 혼자 다니기로 했죠. 기동력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운전면허도 땄고요. 요즘은 토요일이나 일요일 밤 혼자 나가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는 게 제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책이에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할인점을 좋아하고 대량 구매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할인점이 중소점포 등 지역경제에 끼치는 나쁜 영향이 못마땅하거나, 쓸데없는 과소비와 낭비를 부추긴다고 생각해 부러 발을 끊은 이들도 있다. 회사원 박종서(43·서울 여의도동) 씨는 “할인점 물건이 싸다는 건 대형 유통업체가 그만큼 중소기업이나 농민, 어민들을 찍어 눌러 싼값에 납품을 받는다는 뜻 아니냐”며 “그 자체가 부도덕하게 느껴지고, 또 카트 가득 물건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의 탐욕이 왠지 싫어 할인점을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득 수준이 높거나 일찍이 온라인 쇼핑에 눈뜬 이들도 할인점을 멀리하기는 마찬가지다. 회사원 이형오(42·서울 홍제동) 씨는 “채소, 과일은 집 근처 유진상가에서 사고 음료수나 생필품은 인터넷 쇼핑몰을 활용한다. 공산품의 경우 할인점 제품은 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백화점 등 다른 경로를 이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혹자는 “겨우 할인점 쇼핑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 가족나들이라니 서글픈 느낌이 든다”는 말도 한다. “오죽 갈 곳이 없고 함께 즐길 일이 없으면 그 복작대는 데서 돈 쓰고 부대끼는 일이 여가냐”는 것이다. 그러나 할인점이 마치 ‘또 하나의 가족’처럼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끔은 혹 우리 가족이 ‘돈 벌고 그것을 함께 소비하는 행위’에만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