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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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禮’ 정립한 예학의 태두

저서 ‘가례집람도설’에 다구 구체적 설명 … 형조참판 끝으로 낙향해 제자 양성에 힘써

  • 정찬주/ 소설가

    입력2005-05-20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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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禮’ 정립한 예학의 태두
    나그네가 서원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사계 김장생 선생이 제자를 양성한 ‘돈암서원’이다. 돈암서원은 우리나라 3대 서원 중 하나이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예외적으로 보존되었던 곳이지만, 그런 역사적인 이유보다는 다분히 개인적인 사연이 있어서다.

    차례(茶禮)를 지내면서 왜 차가 올려지지 않을까 하고 어린 시절에 늘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10여년 전 어느 날 예를 다룬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예학의 태두 김장생의 ‘가례집람’ 강의를 듣다가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차례(朔望茶禮)’ 때는 신주 오른쪽에는 술잔을, 왼쪽에는 찻잔을 놓는다는 대목에서 “아, 그래서 차례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가 됐다. ‘가례집람도설’의 ‘제기도(祭器圖)’에는 찻잔과 다선(茶), 다탁(茶托), 다완(茶碗) 등 다구들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계 선생이 평소에 차 살림을 했으며 차에 대한 지식이 깊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제사에 대한 사계 선생의 정의는 참으로 명쾌하기만 했다. 사계 선생이 일찍이 향리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오늘 집안의 개가 새끼를 낳아 불결한데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제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폐할 수 없는 일이니 제사를 지내도 불가함이 없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또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묘호란 때는 노구 이끌고 의병 모아



    선생을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선생의 말을 의심스러워하자 선생은 “앞사람은 정성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내고자 하지 않았고, 뒷사람은 정성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이다. 예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계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아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조선인 사정에 맞게 예학을 정립했다. 명종 3년(1548)에 한양에서 태어나 10대에는 송익필에게서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 계휘의 권유로 20세 무렵에는 이이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후 사계는 ‘창릉참봉’이 되고,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뒤 품계가 낮은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정산현감’이 되어 백성들의 피란길을 도왔으며, ‘호조정랑’이 되어서는 명나라 원군의 식량조달을 담당했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전부’가 되고, 2년 후 ‘익산군수’로 나갔다가 북인이 득세하자 사직하고 연산으로 내려간다. 정묘호란 때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양호호소사’를 맡아 의병을 모으고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혔다. 후에는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한 달 만에 낙향하여 예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한다. 물러난 학자였지만, 서인의 영수 격이 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사계의 저서는 거의 예학에 관한 것으로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이 있고, 제자로는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나그네는 유생들이 사계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응도당’ 앞에서 차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일반 가정에서 차례 때 차 대신 물을 올리는 것은 그만큼 차가 귀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문무왕이 수로왕의 제사 때 차를 올리라고 한 것이나 ‘조선왕조실록’에 차가 제물로 올려졌다는 기록이 수없이 나오는 만큼, 더구나 지금은 차가 대중화돼가고 있으니 차례 때는 물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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