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의 메인카지노 출입구 전경
‘손목을 끊어도 소용없다’고 할 정도로 도박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어렵다. 알코올이나 마약처럼 도박 또한 중독 대상인 것이다. 이미 정신의학에선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으로 ‘병적 도박(pathological g·ambling)’이란 진단명을 사용하고 있다. 실직, 가정 해체, 파산, 범죄 등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도박중독은 어떤 중독 증세보다도 파괴력이 심각한 정신질환이다.
파산, 범죄 등 심각한 정신질환
이날 연수회에 참가한 G·A 회원들도 도박중독에서 비롯된 여러 고통을 호소했다. 50대 남성 A 씨는 “도박에 빠진 30년 동안 식구들에게 외식 한번 못 시켜준 채 행패만 부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차라리 죽어버리자며 제초제를 마신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단도박 모임에 나가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도박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룻밤 만에 꾼돈 500만원을 날려버렸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두 자녀를 둔 가정주부 B 씨는 “남편의 도박빚 때문에 빚잔치를 하고 보증금 500만원짜리 사글셋방으로 이사하던 날, 남편은 보증금을 몽땅 들고 도망가버렸다”며 울먹였다. 60대 여성 C 씨는 “카지노 중독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아들이 적금통장을 훔쳐가지고 가출해 마카오로 출국하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며 “어미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이지만, 차라리 아들이 죽어버리길 바랐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G·A 회원은 전국적으로 대략 1000명으로 추산된다. 경마, 경륜, 경정, 카지노 등 ‘합법적 도박장’이 늘어나는 만큼 이들 도박에 중독된 회원의 비중 또한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G·A 회원들에게도 ‘도박과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절반 이상의 회원들이 완전히 ‘단도박’하지 못한 채 도박장과 모임을 오가고 있다. 10년 넘게 G·A 모임에 나오고 있는 회원들도 상당수다. 18년째 G·A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모 씨는 “도박중독에 완치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꾸준하게 모임에 나와 서로 이야기 나누고 의지하며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언제 도박병이 재발할지 모릅니다. 그만큼 도박중독은 무섭습니다.”
강원랜드 메인카지노가 들어선 강원 정선군 사북리 마을. 장기투숙하는 도박꾼들이 몰려들자 20여 개의 모텔들이 들어섰다(위). 메인카지노와 차로 5분가량 떨어진 고한읍에 위치한 한국도박중독센터(가운데).4월16일 충남 공주에서 열린 ‘한국 G·A 전국연수’ 대회장.(아래)
그러나 이들 도박중독자를 구제하기 위한 치료 시스템은 전무한 형편이다. 특히 합법적 도박이 공기업 등을 통해 국가 주도로 이뤄지고 있음에도 국가가 도박중독 대책에 관심조차 두지 않아 이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사행사업자인 한국마사회, 국민체육진흥공단, 강원랜드는 각각 도박중독 상담시설을 부설기관으로 두고 운영하고 있지만 생색내기용에 그친다.
일단 예산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2004년 집행한 예산이 △한국마사회 부설 유캔센터 3억원 △국민체육진흥공단 부설 경륜경정클리닉센터 4억원 △강원랜드 부설 한국도박중독센터 13억2000만원 수준. 이들 3사가 지난해에 올린 매출액이 모두 합쳐 11조8012억 원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 액수다. 인력은 그야말로 소수이다. 지난해 유캔센터는 5명이 1187건을, 경륜경정클리닉센터는 4명이 1605건을, 강원랜드는 3명이 1600건을 상담했다.
예산 인력 부족 생색내기용 운영
부족한 상담인원은 도박중독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카지노 중독자인 D 씨는 “지난해 도박 충동을 절제할 수 없어 다급하게 한국도박중독센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상담예약이 밀려 있다며 일주일 뒤에나 오라고 했다”면서 씁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D 씨는 “도박중독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긴급 서비스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도박중독자는 충동를 잘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때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면, 도박장에 달려가 거액의 돈을 잃거나 자살이나 범죄행위 등 극단의 행동까지 벌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도박중독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부족도 도박중독 상담시설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경륜경정클리닉센터는 아예 ‘도박중독’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몰입고객’이란 표현을 쓴다. 이 센터 관계자는 “도박중독자나 몰입고객은 뜻은 같지만, 도박중독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센터 운영을 위탁받고 있는 국민체력센터 선상규 소장은 “센터의 목적은 단도박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경륜과 경정이라는 레저를 건전한 수준으로 즐기게끔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센터의 목적이란 설명이다.
도박중독 상담센터에서 일하는 한 상담사는 “손님이 오지 않도록 하는 가게 주인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며 사행사업자가 직접 운영하는 상담소의 한계를 지적했다. 유캔센터와 한국도박중독센터는 각각 한국마사회와 강원랜드 직원이 한 명 배치돼 업무를 총괄해 맡고 있으며 심리상담사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이처럼 예산이나 인력이 사행사업자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행사업자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도박중독 치료와 예방 활동을 펼치기에 한계가 있다.
4월1일 새로 개설된 경륜경정클리닉센터 논현지점의 상담 모습(위)과 논현지점에서 스크린 경륜을 즐기는 사람들.
스몰카지노가 있던 정선군 고한읍과 서울 종로구에 각각 사무실을 둔 한국도박중독센터를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7명 내외.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도박중독을 치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카지노 출입금지 조치를 해제하려는 것이다.
카지노 영업장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전당포를 이용하거나, 대리게임을 하는 등의 규칙 위반 사실이 적발되면 일정 기간 카지노 출입이 금지된다. 또 본인이나 가족의 요청으로도 출입이 금지된다. 그런데 이 금지기간이 지나 다시 카지노에 출입하기 위해선 이 센터에서 상담받은 실적이 있어야 하는 것. 규칙 위반으로 출입금지된 경우엔 딱 한 시간만 상담받으면 ‘오케이’다. 센터가 도박중독 치료가 아닌, 카지노 출입허가를 위한 관문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5700여명이 출입금지 조치됐고, 이중 절반이 금지 조치를 해제받았다.
강원랜드 측은 “가족 요청으로 출입금지된 경우 가족 동의가 있어야만 재출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규정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 이 센터 관계자는 “가족을 협박해 동의를 얻어오는 사람, 아내와 이혼했으니 금지 조치를 해제해달라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또 출입금지와 해제 권한은 전적으로 강원랜드에 있다. 때문에 센터는 내담자(來談者)가 심각한 수준의 도박중독자임을 잘 알면서도 그런 내담자의 출입금지 해제를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센터 관계자는 “고위험군에 속하는 고객들의 카지노 출입 현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면 지속적으로 추적하면서 상담받도록 유도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상담하러 왔다 유혹에 빠져
도박중독 상담시설이 사행사업장과 같은 공간에 있는 점도 상담시설의 제 기능을 해치는 요인이다. 유캔센터와 경륜경정클리닉센터는 경마·경정·경륜 장외발매소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경기 분당에 있는 유캔센터 본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한국마사회 장외발매소 분당점 건물로 들어가 5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1층 로비에서는 스크린을 통해 경마 경기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정보에서 베팅까지 휴대폰 하나면 일사천리~’라는 큼지막한 문구가 새겨진 휴대전화 베팅 서비스 홍보물이 게시되어 있다. 벽에 붙은 ‘층별 안내도’에는 1층부터 4층까지 현급지급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내용이 ‘친절하게’ 적혀 있다.
때문에 도박중독을 상담하러 왔다가 오히려 도박 유혹에 더 빠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경마중독자인 E 씨는 “상담받으러 센터를 오갈 때마다 말들이 세차게 달려나가는 스크린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유혹을 피하기 위해 경마가 열리는 주말에는 상담 예약을 하지 않곤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 같은 도박중독 상담시설이 아예 설치되지 않은 장외발매소도 부지기수다. 특히 지방 도시의 장외발매소는 도박중독 치유시설 면에서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다. 한국마사회는 서울, 경기,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등 전국에 29개 장외발매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상담소가 있는 곳은 분당과 용산 지점 딱 두 곳이다. 과천 경마장에 있는 상담소는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만 문을 연다. 나머지 지역에서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최소한의 치료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셈이다. 경륜 장외발매소는 15개, 경정 장외발매소는 10개인데, 경륜경정클리닉센터는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안과 당산지점에서만 상담소를 운영하다가 올해 4월부터 경기 일산, 인천, 대전 유성 등 5개 지점에 새로 상담소를 열었다.
이처럼 사행사업자가 운영하는 도박중독 상담시설이 부실하자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행산업을 걱정하는 의원모임(공동대표 손봉숙 의원)을 비롯한 각계에서는 독립된 도박중독 치유시설을 건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설치 추진 중인 사행산업감독위원회 산하에 치유시설을 두자는 안도 나오고, 사행산업자가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도박중독 치유 재원으로 납부하도록 법적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도박중독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10년째 단도박 모임에 나가고 있는 F(여) 씨는 “평생 노력해도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는 게 도박중독이기 때문에 치유 센터 건립이 얼마나 도움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라며 “그러나 국가가 도박사업을 장려해 도박중독자를 양산한 만큼 도박중독자 치유와 예방에 나서야 하는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