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 부시 행정부에서 고위직에 임명된 인물들 가운데 화제의 주인공은 단연 존 볼튼 신임 주 유엔대사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때도 볼튼만큼 화제를 뿌리진 못했다. 물론 이는 라이스의 국무장관 발탁이 예견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 펼쳐질 볼튼 대 유엔, 미국 대 유엔의 싸움이 볼 만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으로 재직했던 1기 부시 행정부에서도 볼튼은 4년 내내 입만 열었다 하면 최소한 사흘짜리 기삿감이 되곤 하는 독보적인 뉴스메이커였다. 하기야 싸움닭치고 뉴스메이커가 아닌 사람은 없다. 라이스가 ‘문제 해결사’의 임무를 짊어진 장수라면, 볼튼은 갈고닦은 칼을 차고 유엔이란 전장에 뛰어든 ‘칼잡이’ 장수다. 화해의 깃발을 든 장수보다 피를 보러 가는 장수에게 이목이 더 집중되는 것은 정치판의 당연한 생리다.
그러나 볼튼은 진작에 국무부 2인자인 부장관 자리를 원했다. 이 자리에 가기 위해 애도 쓸 만큼 썼다. 그러나 라이스는 볼튼을 자신의 직속 부하로 원치 않았다. 그녀는 볼튼 대신 로버트 죌릭을 택했다. 죌릭이 경험 풍부한 전문직 외교관이라면, 볼튼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정략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볼튼이 매끈한 언사를 구사하는 전문 외교관이었더라면 북한을 ‘지옥 같은 악몽’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 덕에 북한으로부터 ‘피를 빨아먹는 인간쓰레기’란 악평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이란 핵무장 예방도 또 하나의 임무
보수 논객 로버트 노박은 한 칼럼에서 볼튼이 주 유엔대사로 가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볼튼이 국무부 부장관 자리를 놓치자 공화당 내 보수파 지도부는 백악관 정치참모 칼 로브에게 볼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러자 국무부 내 볼튼 적대자들 사이에서는 칼 로브가 볼튼을 유엔대사로 추천하도록 라이스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볼튼에게 유엔대사 자리를 주도록 (부시에게) 먼저 제안한 사람은 바로 라이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스가 볼튼을 유엔의 적임자로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뉴스위크’는 라이스가 볼튼을 유엔대사로 내세운 배경 중 하나로 국내 정치 문제를 언급했다.
‘라이스는 전임자 콜린 파월처럼 국무장관에서 밀려나는 운명에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행정부가 유엔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볼튼으로 하여금 공화당 보수파의 지지기반을 달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분석대로라면 볼튼의 주된 ‘뉴욕 임무’는 칼에 피를 묻히는 것, 즉 유엔의 개혁이다. 라이스는 구경만 하면 된다. 라이스에게는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 개선과 미국의 이미지 제고’라는 우선순위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 라이스가 유엔을 상대로 직접 칼을 뽑기보다는 볼튼이라는 대리인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국내 정치적 배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2기 부시 행정부가 다루어야 하는 굵직한 외교 현안 가운데 하나는 이란의 핵무장을 막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1기 때와 달리 이란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2월 유럽을 다녀온 직후부터다. 백악관이나 국무부 관료에게서 ‘이란이 핵을 포기할 경우 보상해준다’는 유럽의 구상을 지지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행정부 내 강경파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협상안 마련은 유럽을 설득시켜 이란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 보내려는 전략이다. 이란 문제를 유엔에서 기다리고 있는 볼튼의 손아귀에 쥐어주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볼튼은 적이 많다. 그러나 지지자들 또한 적지 않다. 우선 딕 체니 부통령이 그를 유엔대사로 적극 밀 정도로 그의 편이다. 볼튼의 ‘전투력’은 공화당 보수 우파 내에서 정평이 나 있다. 볼튼이 우파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주고, 우파는 뒤에서 볼튼을 지원한다. 워싱턴 정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여러 번 말썽을 일으켰던 볼튼의 ‘어록’이란 것도 사실은 공화당 우파의 속마음이 배어나온 것이다.
볼튼은 무엇보다 다국적기구로서의 유엔을 맹비난한다. 2000년 공영라디오방송(NPR)과 한 인터뷰에서 볼튼은 “내가 만약 유엔안보리를 다시 짠다면 상임이사국은 하나만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세계의 힘을 제대로 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한 나라가 어디인가”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볼튼은 “미국”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 “부시 행정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가 국제사법재판소 조약의 틀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을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튼의 이런 발언에 대해 뉴욕타임스 사설은 “아예 생각하기도 싫은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미국은 유엔에 분담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편다. 1997년 월스트리트 저널에 볼튼이 기고한 기사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미국은 법적으로 유엔에 분담금을 낼 이유가 없다. 조약이라는 것은 오로지 미국 내에서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만 법으로 존재하며, 국제관계에서의 조약이란 단순히 정치적 의무일 뿐이다.’
북미 관계에 대한 볼튼의 발언은 워싱턴 보수 강경파들의 속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볼튼이 99년 LA타임스에 쓴 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우리는 북한과의 정상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북한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 외교 관계 정상화라는 것도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볼튼은 미 제국 건설의 한 주춧돌이다. 부시가 명명한 ‘악의 축’의 외연을 넓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또 2002년 5월 헤리티지재단에서 행한 ‘악의 축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뿐만 아니라 리비아, 시리아, 쿠바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장본인이 바로 볼튼이다. 2003년 6월 이란의 핵개발 의혹을 공론화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5세 때 대선 자원봉사자로 활동
‘전투적인 네오콘’이라는 별명이 붙기는 하지만 볼튼이 네오콘의 정통적인 정치 철학에 꼭 부합하는 사람이냐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신보수주의의 대부인 어빙 크리스톨에 따르면 네오콘은 ‘현실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볼튼은 네오콘과 거리가 있다. 또 네오콘이 민주주의 전파라는 윌슨주의를 중시하는 데 비해, 볼튼은 이라크에서 미국이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내 정치철학은 자유 의지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라고 분명히 밝힌다. “나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은 그런 내 철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볼튼은 올해 56세다. 15세 때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정치판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워싱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8년부터.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와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공화당 지도부에서 볼튼을 밀어주는 주된 후원자였던 제임스 베이커가 레이건 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이 되었을 때, 베이커는 볼튼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얼마 뒤 볼튼은 미 국제개발처(USAID)의 고문 자리에 앉았다. 클린턴 행정부 때는 보수 싱크탱크인 미 기업협회(AEI) 선임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보수 이념 주창자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혔다.
말 많았던 2000년 미 대선의 플로리다 검표 때 볼튼은 AEI가 주최한 국제회의 사회자로서 서울에 있었다.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제임스 베이커를 법률 문제 책임자로 선임했다는 사실을 안 볼튼은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다고 했다(볼튼은 예일 대학 로스쿨 출신이다). 제임스 베이커는 볼튼에게 다음 비행기로 곧장 플로리다로 오라고 말했고, 볼튼은 플로리다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그는 검표가 끝나고 대통령이 결정될 때까지 플로리다에 있었다.
볼튼이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에서 일하고 싶어했음은 물론이다. 체니와 베이커에게 자신의 소망을 알렸고, 당시 콜린 파월 국무장관 내정자와 인터뷰를 했다. 볼튼이 ‘부시 제국’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골적인 표현을 결코 아끼지 않는 외교관이다. 그의 거침없는 표현이 늘 논쟁거리를 만들어냈다. 외교 무대는 간접화법과 외교 수사로 무장한 ‘꾼들의 정치판’이다. 볼튼은 그래서 더욱 볼거리를 제공한다.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으로 재직했던 1기 부시 행정부에서도 볼튼은 4년 내내 입만 열었다 하면 최소한 사흘짜리 기삿감이 되곤 하는 독보적인 뉴스메이커였다. 하기야 싸움닭치고 뉴스메이커가 아닌 사람은 없다. 라이스가 ‘문제 해결사’의 임무를 짊어진 장수라면, 볼튼은 갈고닦은 칼을 차고 유엔이란 전장에 뛰어든 ‘칼잡이’ 장수다. 화해의 깃발을 든 장수보다 피를 보러 가는 장수에게 이목이 더 집중되는 것은 정치판의 당연한 생리다.
그러나 볼튼은 진작에 국무부 2인자인 부장관 자리를 원했다. 이 자리에 가기 위해 애도 쓸 만큼 썼다. 그러나 라이스는 볼튼을 자신의 직속 부하로 원치 않았다. 그녀는 볼튼 대신 로버트 죌릭을 택했다. 죌릭이 경험 풍부한 전문직 외교관이라면, 볼튼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정략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볼튼이 매끈한 언사를 구사하는 전문 외교관이었더라면 북한을 ‘지옥 같은 악몽’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 덕에 북한으로부터 ‘피를 빨아먹는 인간쓰레기’란 악평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이란 핵무장 예방도 또 하나의 임무
보수 논객 로버트 노박은 한 칼럼에서 볼튼이 주 유엔대사로 가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볼튼이 국무부 부장관 자리를 놓치자 공화당 내 보수파 지도부는 백악관 정치참모 칼 로브에게 볼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러자 국무부 내 볼튼 적대자들 사이에서는 칼 로브가 볼튼을 유엔대사로 추천하도록 라이스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볼튼에게 유엔대사 자리를 주도록 (부시에게) 먼저 제안한 사람은 바로 라이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스가 볼튼을 유엔의 적임자로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뉴스위크’는 라이스가 볼튼을 유엔대사로 내세운 배경 중 하나로 국내 정치 문제를 언급했다.
‘라이스는 전임자 콜린 파월처럼 국무장관에서 밀려나는 운명에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행정부가 유엔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볼튼으로 하여금 공화당 보수파의 지지기반을 달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분석대로라면 볼튼의 주된 ‘뉴욕 임무’는 칼에 피를 묻히는 것, 즉 유엔의 개혁이다. 라이스는 구경만 하면 된다. 라이스에게는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 개선과 미국의 이미지 제고’라는 우선순위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 라이스가 유엔을 상대로 직접 칼을 뽑기보다는 볼튼이라는 대리인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국내 정치적 배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2기 부시 행정부가 다루어야 하는 굵직한 외교 현안 가운데 하나는 이란의 핵무장을 막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1기 때와 달리 이란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2월 유럽을 다녀온 직후부터다. 백악관이나 국무부 관료에게서 ‘이란이 핵을 포기할 경우 보상해준다’는 유럽의 구상을 지지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행정부 내 강경파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협상안 마련은 유럽을 설득시켜 이란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 보내려는 전략이다. 이란 문제를 유엔에서 기다리고 있는 볼튼의 손아귀에 쥐어주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볼튼은 적이 많다. 그러나 지지자들 또한 적지 않다. 우선 딕 체니 부통령이 그를 유엔대사로 적극 밀 정도로 그의 편이다. 볼튼의 ‘전투력’은 공화당 보수 우파 내에서 정평이 나 있다. 볼튼이 우파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주고, 우파는 뒤에서 볼튼을 지원한다. 워싱턴 정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여러 번 말썽을 일으켰던 볼튼의 ‘어록’이란 것도 사실은 공화당 우파의 속마음이 배어나온 것이다.
볼튼은 무엇보다 다국적기구로서의 유엔을 맹비난한다. 2000년 공영라디오방송(NPR)과 한 인터뷰에서 볼튼은 “내가 만약 유엔안보리를 다시 짠다면 상임이사국은 하나만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세계의 힘을 제대로 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한 나라가 어디인가”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볼튼은 “미국”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 “부시 행정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가 국제사법재판소 조약의 틀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을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튼의 이런 발언에 대해 뉴욕타임스 사설은 “아예 생각하기도 싫은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미국은 유엔에 분담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편다. 1997년 월스트리트 저널에 볼튼이 기고한 기사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미국은 법적으로 유엔에 분담금을 낼 이유가 없다. 조약이라는 것은 오로지 미국 내에서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만 법으로 존재하며, 국제관계에서의 조약이란 단순히 정치적 의무일 뿐이다.’
북미 관계에 대한 볼튼의 발언은 워싱턴 보수 강경파들의 속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볼튼이 99년 LA타임스에 쓴 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우리는 북한과의 정상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북한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 외교 관계 정상화라는 것도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볼튼은 미 제국 건설의 한 주춧돌이다. 부시가 명명한 ‘악의 축’의 외연을 넓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또 2002년 5월 헤리티지재단에서 행한 ‘악의 축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뿐만 아니라 리비아, 시리아, 쿠바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장본인이 바로 볼튼이다. 2003년 6월 이란의 핵개발 의혹을 공론화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5세 때 대선 자원봉사자로 활동
‘전투적인 네오콘’이라는 별명이 붙기는 하지만 볼튼이 네오콘의 정통적인 정치 철학에 꼭 부합하는 사람이냐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신보수주의의 대부인 어빙 크리스톨에 따르면 네오콘은 ‘현실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볼튼은 네오콘과 거리가 있다. 또 네오콘이 민주주의 전파라는 윌슨주의를 중시하는 데 비해, 볼튼은 이라크에서 미국이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내 정치철학은 자유 의지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라고 분명히 밝힌다. “나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은 그런 내 철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볼튼은 올해 56세다. 15세 때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정치판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워싱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8년부터.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와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공화당 지도부에서 볼튼을 밀어주는 주된 후원자였던 제임스 베이커가 레이건 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이 되었을 때, 베이커는 볼튼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얼마 뒤 볼튼은 미 국제개발처(USAID)의 고문 자리에 앉았다. 클린턴 행정부 때는 보수 싱크탱크인 미 기업협회(AEI) 선임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보수 이념 주창자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혔다.
말 많았던 2000년 미 대선의 플로리다 검표 때 볼튼은 AEI가 주최한 국제회의 사회자로서 서울에 있었다.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제임스 베이커를 법률 문제 책임자로 선임했다는 사실을 안 볼튼은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다고 했다(볼튼은 예일 대학 로스쿨 출신이다). 제임스 베이커는 볼튼에게 다음 비행기로 곧장 플로리다로 오라고 말했고, 볼튼은 플로리다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그는 검표가 끝나고 대통령이 결정될 때까지 플로리다에 있었다.
볼튼이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에서 일하고 싶어했음은 물론이다. 체니와 베이커에게 자신의 소망을 알렸고, 당시 콜린 파월 국무장관 내정자와 인터뷰를 했다. 볼튼이 ‘부시 제국’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골적인 표현을 결코 아끼지 않는 외교관이다. 그의 거침없는 표현이 늘 논쟁거리를 만들어냈다. 외교 무대는 간접화법과 외교 수사로 무장한 ‘꾼들의 정치판’이다. 볼튼은 그래서 더욱 볼거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