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SK그룹 신년교례회에서 최태원 SK㈜ 회장과 관계사 CEO들이 개정된 SKMS(SK Management System)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위) 2월22일 SKC의 미국 조지아 공장을 방문한 최태원 회장이 현지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위부터)
그러나 밖의 소란스러움에도 SK 주요 임원진의 태도는 담담하다. 2004년 매출 17조3997억원, 영업이익 1조6163억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을 올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26.8%의 비교적 안정적인 우호지분을 확보한 때문만도 아닌 듯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주주들의 심판을 기다릴 뿐”이라는 자세다. 그 핵심에는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는 씨알을 통해 열매 맺은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1월, 최태원 회장은 새로운 ‘지배구조개선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리고 기업의 3대 주체에 대한 △혁신의 주체로서의 이사회 △혁신의 지원자로서의 대주주 △혁신의 감시자로서의 이해관계자라는 역할 모델을 제시했다. “가장 선진적 지배구조라 평가받는 제너럴일렉트릭(GE)를 능가하는 모델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소버린은 물론 SK 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온 참여연대, 대다수 소액주주들의 반응은 반신반의, “결국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겉핥기식 개혁이 아니겠느냐”는 쪽에 더 가까웠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경영학)가 지난해 3월 “내년(2005년) 주총이 사실상 ‘빅쇼’가 될 것”이라 말한 배경 또한 그이유일 것이었다. 거기에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SK가 혁신적 변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사회와 주주 요구, 그 이상의 개혁
그러나 2005년 3월 현재, SK는 사회와 주주들에게서 요구받았던 그 이상의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나름대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약속한 대로 사외이사 비중이 70%에 달하는 이사회를 구성, 오너의 권한을 제한하고 경영의 주요 결정에 사외이사들이 실질적 역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구태의연한 재벌’의 면모를 일신하는 데 성공한 것. 사외이사로만 감사위원회(3인)를 구성했으며, 계열사 간 거래를 감시하는 투명경영위원회도 사외이사가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했다. 경영권의 무게중심이 이사회로 넘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SK가 ‘GE, 그 이상의 지배구조와 투명성 확보’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매달렸는지는 SK와 GE의 이사회를 비교한 내부 자료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표 참조).
2004년 12월10일 최태원 회장이 서울 용산 KTX 역사에서 열린 ‘사랑의 바자회’에 참가해 임직원들과 함께 물건을 팔고 있다.1월28일 ‘신입사원-최고경영자와의 대화’ 시간에 참석한 최 회장.(위부터)
현재 SK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사회 업무 지원을 위한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다. 황규호 전무 등 8명이 포진해 회사 주요 현안과 배경 등을 사외 이사들에게 실시간 브리핑한다. 사무국 관계자는 “사외이사 한 사람이 받는 보고서가 한 달에 A4용지 500~600쪽 분량”이라며 “매일 따로 20여쪽의 회사 관련 동향 보고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SK이사회의 2004년 공식·비공식 회의와 경영참여 활동은 총 121회. 정기이사회 14회, 투명경영위원회 등 전문위원회 29회, 경영설명회 28회, 사외이사 미팅 13회, 세미나·공장 방문 37회 등이었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이틀에 한 번꼴로 모인 셈이다.
그러나 시스템이 마련됐다 해서 절로 내실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외이사인 김태유 서울대 교수(자원공학)는 “SK가 여러 불행한 사태로 사회의 지탄을 받던 상황이라 책임감이 말할 수 없이 컸다. 더구나 국내에 없는 모델을 새로 창출하는 것이다 보니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과 같은 막막함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인 서윤석 이화여대 교수(경영학)는 “초기엔 집행 임원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도 없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중요한 결정마다 일일이 이사회가 나서 자료를 요구하고 실무자와 토론하며 때로는 딴지까지 거는 형국이니 임원들로선 ‘오히려 스피드 경영에 방해가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만도 했으리라는 것. 서 교수는 “그러나 사외이사들의 노력이 기업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러한 불편함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밝혔다.
사외이사들이 이렇듯 주어진 몫을 다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 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달에 두 번씩 사외이사들 앞에서 최 회장이 직접 화이트보드에 써가며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좋은 예. SK 측은 “이사회 경영을 존중한다는 뜻과 함께 이사회가 실질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고경영자가 솔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서린동 사옥 25층의 최 회장 집무실을 사외이사들에게 내준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사회 업무 지원 사무국 운영
사외이사인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는 “최 회장은 토론할 때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데 몰두하기보다 사외이사들이 합의된 결론에 이르기까지 주로 경청하는 자세를 보인다”고 귀띔했다. 서윤석 교수는 “최 회장에게서 이른바 ‘총수’로서의 권위의식이나 선민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태유 교수 또한 “최 회장이 ‘사외이사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는 무엇이든 다 제공하라’는 지시를 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SK의 이사회 중심 경영은 그룹의 계열사로도 확산되고 있다. SK텔레콤은 2월22일 이사회를 열어, 사내이사는 현재와 같이 4명으로 유지하되, 사외이사는 4명에서 7명으로 확대키로 결정했다.
2004년 10월28일 중국 현지에서 열린 SK㈜ 이사회 모습.
외부 전문기관을 활용한 내부 통제 시스템 구축은 SK의 계열사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SK는 국내 최초로 미국 상장법인에 적용되는 ‘샤베인-옥슬리법’ 수준의 내부통제 시스템을 올 3월부터 본격 가동한다. 이는 SK텔레콤, KT, 포스코 등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보다 1년 앞선 것이다. SK텔레콤 또한 국내 최초로 외부감사인(회계법인)을 위한 전용 감사실을 만들어 ‘상시감사체제’에 들어갔다. SK네트웍스의 경우 2004년 말 내부감사 인력을 8명 보강, 총 18명으로 대폭 늘려 주유소 매장 등 국내외 업무의 감사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SK의 감사시스템 개발업체 선정의 경우 회사 결정을 사외이사진이 뒤엎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회사가 제시한 업체가 SK 사태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A회계법인이었던 것. 서윤석 교수는 “회사가 ‘투명성 확보를 위해 공개 입찰을 하라’는 이사회 결의를 즉각 수용해주었다”고 밝혔다. 2004년 10월28일 이사회 때는 사외이사들이 최 회장 등 사내이사 3명을 회의장에서 나가도록 했다. 소버린이 최 회장 퇴진을 겨냥해 임시주총 개최를 요청한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인 만큼 이해 당사자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SK는 ‘재벌’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기업 형태에 대해서도 근원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이와 관련 2004년 10월 SK그룹에 대해 ‘주식 네트워크’에서 ‘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하는 네트워크’로의 이행을 선언하기도 했다. 각 계열사가 SK의 이름과 기업 정신은 공유하되, 이사회와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투명하고 독자적인 경영을 해나가며, 최 회장은 지주회사 격인 SK㈜의 대표이사만을 담백하게 수행한다는 것. SK의 한 계열사 임원은 “회사 밖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가 ‘회장님의 재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최근의 조직개편안이나 자회사 설립 등도 모두 우리 전문경영진이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 회장 충분한 능력·비전 갖춰”
최 회장과 친분이 있는 이들은 “회사뿐 아니라 사람(최 회장)도 바뀌었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 과묵하고 나서기를 싫어하는 인물로 알려졌던 최 회장의 감춰진 열정적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 2004년에만 직원 대상 강연을 20차례 했으며, 직급을 막론한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가져 거리감을 없애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다. SK의 한 부장은 “최 회장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는 직원들이 크게 늘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직원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거나 현지 공장을 예고 없이 방문해 격려하는 등의 ‘감성 경영’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이전 같으면 다른 임원을 보냈을 자리에 직접 참석해 회사의 비전을 열심히 설명하는 등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다. SK텔레콤의 한 임원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아울러 모든 일을 직접 챙겨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의 발로일 것”이라고 말했다.
SK 이사회는 정기주총에 앞서 임기 만료를 앞둔 최 회장을 다시 이사로 추천했다. 에너지 전문가인 김태유 교수는 “최 회장이 대주주이어서가 아니다. 지난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전문경영인으로서 충분한 능력과 비전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특히 에너지 산업 중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해외유전개발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어서 특단의 경영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자질과 리더십을 갖춘 오너 경영인이 있다면 그를 선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SK의 한 사외이사는 “최 회장 속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내 노력으로 기업 가치가 상승하면 이대로 갈 것이고 최선을 다해도 어렵다면 못 가는 것’이란 결심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그는 “경영을 잘해야만 최고경영자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