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장학회 설립 100주년 행사장에서 만난 서만술 총련 부의장(왼쪽)과 김재숙 민단 단장.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중정)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해외공작 역량의 대부분을 일본에 투입했다. 중정과 안기부가 벌인 대공투쟁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 민단이었다. 한 민단 관계자의 말이다.
“만경봉호가 도쿄항에 들어오면 수백, 수천 장의 전단을 싣고 달려갑니다. 안기부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고, 으레 우리 일이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보세구역 밖이긴 하지만 가능한 한 만경봉호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전단 뭉치를 던져 올리는 것이지요. 전단이 뭉치째로 떨어지면 만경봉호 선원은 이를 우리에게 되던집니다. 그러나 뭉치가 운 좋게 ‘탁’ 하고 터져, 전단이 갑판 위에 흩어지면 선원들은 한 번씩 읽어봅디다. 그것을 노리고 열심히 팔매질을 합니다. 그러다 일본 경찰차가 달려올 것 같으면 부리나케 도망가는 것입니다. 안기부 요원들은 도쿄 지리를 몰라서 그런 일은 할 엄두도 못 냈지요….”
민단과 총련 간의 길고 긴 이 싸움은 민단이 한판승을 굳혀가는 형세다. 그러나 민단은 총련에 굴복을 강요하지 않는다. 민단의 정몽주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총련에서 주장한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모습이 무엇이었는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사회복지가 이뤄져 고루 잘사는 조국이, 총련이 주장한 우리 조국의 미래 아니었는가. 60년간 길고 긴 싸움 끝에 이러한 모습을 이룬 쪽이 남쪽인가 북쪽인가. 나는 남쪽이라고 자신한다. 북쪽은 전제독재가 펼쳐지고 주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의 민주화를 가져다준 것은 재벌이라고 하는 매판 자본가였다. 경제 부흥 없는 민주화는 없다는 것을 한국은 보여주었다. 나는 총련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한다. 정치적인 민주화를 먼저 시도했으면 한국은 경제발전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이 주장한 조국의 모습을 이룬 것이 남쪽이라면, 이제는 남쪽을 조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민단과 총련을 막론하고 재일교포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이기 때문에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한다.”
민단과 총련 안 따지고 혼인하는 사람 증가
총련은 사방으로부터 얻어맞고 있다. 그들과 가까웠던 기업인들과 은행들이 불경기 속에서 줄줄이 무너짐으로써 이들의 대북투자는 사실상 중지된 상태다. 이렇게 힘의 축이 기울자 오히려 민단과 총련의 만남이 잦아졌다. 만나서도 힘겨루기를 하며 대결하던 국면이 완화되었다. 동포 중에는 민단과 총련을 따지지 않고 혼인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시위대의 구호 속에 일본 항구에 들어온 만경봉호. 과거 민단은 만경봉호에 전단을 뿌리며 투쟁했다.
장학회는 대한제국 정부가 ‘관비와 사비를 막론하고 일본에 간 유학생은 국가가 관리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주일 한국공사관에 재일 유학생을 위한 숙소를 만들어, 학비 지원과 재일유학생 감독을 위해 이만규란 인물을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과 함께 이 기구는 친일요원 양성소로 바뀌었다. 조선총독부가 산하에 ‘유학생 감독부’를 만들어 직접 재일 유학생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1911년). 그러자 기숙사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의 참여 등으로 항거했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기숙사 학생 전원(70여명)을 퇴사 조치하고, 숙소의 감독을 맡고 있던 일본 육군 대위 아라키(荒木捨作)를 해임했으며, 조직을 ‘장학부’로 개칭했다.
41년 장학부는 큰 변화를 맡게 되었다. 일본의 공해(公害)문제 역사에서 수은 중독에 의한 ‘이타이이타이병(病)’과 함께 유명한 것이 카드뮴 중독으로 인한 ‘미나마타병’이다. 미나마타병은 규슈(九州)에 있는 일본질소 공장에서 발생했는데, 일본질소는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 1873~1944)가 설립한 회사다. 노구치는 원래 전기공학을 전공했는데, 24년 한반도에 진출해 부전강·장진강·허천강 발전소를 세운 데 이어 압록강에 수풍발전소를 건설해 떼돈을 벌었다.
41년 노구치는 3000만엔(지금 가치로는 300억엔, 약 3000억원으로 추산)을 사회에 환원했는데, 이중 2500만엔이 노구치연구소 창설기금으로 쓰이고, 500만엔은 ‘조선에서 번 돈을 조선에 환원한다’는 원칙 아래 재일조선인 장학기금으로 배정되었다. 노구치의 희사를 계기로 장학부는 ‘조선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때 장학재단 총재로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지로(南次郞)가 임명되면서 조선장학회는 친일 장학생 양성소로 더욱 고착화되었다.
45년 해방과 함께 이 장학회는 재일조선인에게 운영권이 넘어오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조선’으로 시작되다 보니 총련계가 운영권을 잡게 되었다. 총련계는 재단이 갖고 있던 부동산 중 일부를 팔아 활동자금으로 썼는데, 이에 민단과 한국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하며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 조선장학회는 민단계의 한학동(韓學同)과 총련계의 조학동(朝學同)으로 나눠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원활히 운영되는 장학회는 이미 통일”
사태가 커지자 일본 문부과학성의 학생과장인 니시다(西田龜久)씨가 개입했다(1956년). 이로써 중재가 이뤄져 민단과 총련, 그리고 일본 측에서 각 세 명씩 총 9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표는 민단과 총련에서 한 명씩 나와 두 명이 맡기로 했다. 일본인이 이사로 참여하나, 장학금 수혜자는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한정되었다.
그 후 조선장학회는 민단과 총련을 가리지 않고 소정의 자격을 갖춘 학생에게 똑같이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단계가 월등히 커지면서 최근에는 85% 정도의 장학금을 민단계 학생이 수령해가게 되었다. 민단의 우세는 장학금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노구치 시타가우
조선장학회가 원활히 운영되다 보니 장학회 일이라면 민단과 총련은 모두 두 손 들어 환영하게 되었다. 2000년 11월24일 창립 100주년을 맞은 장학회는 고대사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때 민단에서 김재숙 단장이, 총련에서는 병중인 한덕수 의장을 대신한 서만술 부의장이 참석했는데(한덕수 의장은 그 이듬해 사망했다), 이것이 공식석상에서 민단과 총련 대표가 함께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시작돼 노구치의 희사를 받아 덩치를 키우고 한때는 민단과 총련으로 갈려 대립을 거듭했으나, 지금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조선장학회. 이 재단의 민단 측 대표인 고계환 대표는 “조국은 물론이고 재일교포 사회조차 아직 통일되지 않았지만, 조선장학회만은 이미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제 누가 뭐래도 우리 민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국은 대한민국이다. 조국의 통일도 조선장학회처럼 슬기롭게 이뤄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