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2단계 공사 지역에서 배수재 필터를 땅속으로 박고 있는 모습.
바다나 강을 메운 매립지에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예산을 들여 지은 국책 시설들은 지금껏 완공 이후 거의 예외 없이 ‘지반 침하’ 현상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감사원, 건설교통부, 국회 등 각 국가 기관들은 감사·조사·진단을 해왔다. 하지만 정확한 지반 침하의 원인이 속시원히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다보니 그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을 리 없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아주 ‘이상한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셈.
가라앉는 지반을 ‘땜 방식’으로 메우는 데 매번 많게는 수백억원의 추가 비용이 낭비됐으며, 이중 많은 부분이 국민의 혈세였다. 사실 추가로 투입된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당장이라도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심리가 더 큰 걱정. 시도 때도 없이 가라앉고, 꺼지는 도로와 활주로를 날마다 오가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지반 메우는 데 수백억원 낭비
문제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의 현실에서 매립지에 지을 국책 시설들이 아직 부지기수로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 현재 연약지반에 짓고 있거나 지을 예정인 국책 시설만 부산 신항만, 인천공항 2단계, 광양항, 목포 남악신도시, 인천 송도신도시, 군산 수송지구 택지 등이 있다. 과연 이들 시설들은 지반 침하 현상 없이 오랫동안 안전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 제2단계의 연약지반 다지기(개량) 공사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지반 침하의 위험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 업체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불량지반공사’ 공방은 올 10월 국정감사 때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와 농림해양수산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이 집중 거론하면서 수면에 떠올랐다. 당시 국회의원들의 집중 포화를 맞은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은 국감장에서 “불량 공사 여부를 가리기 위한 특별감사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고, 송광수 검찰총장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수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특감에 들어간 건설교통부는 각 시험기관들의 실험 결과가 이미 나와 있는데도 결과 발표를 계속 미루면서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으며, 검찰은 수사는커녕 내사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부산 신항만 공사의 관리·감독 기관인 해양수산부는 강 건너 불 보듯 이 일을 모른 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회를 떠들썩하게 한 불량 공사 공방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공방을 이해하려면 먼저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 2단계 공사에 사용되고 있는 연약지반 개량공법, 즉 PBD 배수재(排水材) 공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반을 단단하게 또 빠르게 다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하 곳곳에 스며 있는 물을 어떻게 밖으로 빼내는가 하는 것. 배수재 공법은 물을 잘 빨아들이도록(親水) 처리된 부직포(필터, 사진 참조)를 지하에 박아넣어 흙 입자는 걸러내고 지하수만 빨아올리는 공법으로, 이때 필터에 난 구멍 크기(유효구멍 크기, AOS)가 지역의 토질에 비해 너무 크면 흙 입자들이 배수재 속으로 들어가 구멍을 막음으로써 배수가 되지 않거나 효율이 낮아진다. 반대로 필터의 구멍 크기가 작으면 필터의 겉면이 흙 입자에 의해 막힘으로써 배수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필터의 구멍 크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필터를 땅속에 박아도 지하수는 배출되지 않고, 땅은 다져지지 않아 결국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거나 흙으로 메울 경우 지반이 침하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부직포로 된 필터(왼쪽 위, 가운데 위) 부분과 물이 빠져나가는 코어(왼쪽아래, 가운데 아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왼쪽부터 유효구멍 크기가 맞지 않아 문제가 된 A배수재와 캘린더링이 된 C배수재, 그리고 정상 배수재인 B배수재.
국회의원들이 지적한 내용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 2단계 공사에 사용된 A배수재가 시방서나 실시설계에서 제시한 기준보다 훨씬 큰 유효구멍 크기의 물품이라는 것. 즉 구멍 크기가 크다보니 물뿐 아니라 흙 입자까지 배수재 안으로 빨려 들어가 배수재 구멍을 막음으로써 배수가 안 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2001년 11월 시작된 부산 신항만 조성 공사는 민자부두의 경우 이미 지반 다지기 공사가 다 끝난 상태로 여기에 들어간 배수재의 길이는 2만8000km, 박은 깊이는 50m에 달했다. 민자부두의 바로 뒤편에 있는 93만평의 배후 부지 조성 공사에는 2만4500km의 배수재를 심는 작업(최대 50m)이 현재 한창 진행되고 있다. 과연 국회의원들의 지적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실제 확인 결과, 부산 신항만 민자부두와 배후 부지의 시방서에 나타난 필터의 유효구멍 크기 시험규격은 80㎛ 이하인 데 반해, A배수재 필터 를 생산하는 D회사의 제품설명서에 나타난 배수재 필터의 평균 구멍 크기는 120㎛로, 최대 최소 30㎛의 오차를 인정하더라도 구멍 크기가 훨씬 초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4km의 신활주로를 포함해 66만평 인천공항 2단계 공사의 경우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인천공항의 시방서에는 미국식 시험규격(ASTM D 4751)으로 유효구멍 크기를 50~90㎛로 규정하고 있다. D회사의 제품설명서에 나온 평균 구멍 크기로 본다면 배수재의 필터는 인천공항 공사에도 사용하면 안 되는 제품이다(상자기사 참조). 배수재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국회 건교위 조경태 의원(토목공학 박사, 열린우리당)은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에 사용된 A배수재 필터에 대한 자체 시험 결과 배수재 회사가 제시한 기준대로 128㎛가 나왔다”며 “다른 업체나 개인이 한 구멍 크기 실험에서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신항만 배후 부지 공사 현장의 내부 문건에 따르면 불량 배수재 사용에 따른 문제가 이미 각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공사 현장의 문제점을 서로 주고받은 e메일에는 배수재를 지하 50m 아래까지 설치했으나 30m 아래쪽은 배수가 중단됐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문건에는 부산 신항만 민자부두에도 배후 부지와 같은 배수재가 사용됐다는 내용뿐 아니라 배수 중단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면 문제가 일어나므로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글도 포함돼 있다. 시공회사 담당자들은 한 술 더 떠 배수가 중단된 이유가 배수재를 꽂는 간격이 잘못된 탓이라며 배수재 설치 간격을 1.5m에서 1.2m로 좁게 했다.
부산 신항만 공사 조감도.
이에 대해 조경태 의원은 “F시험소의 경우 자사의 보유 장비 대수로는 시험이 도저히 불가능한 결과를 허위로 발급한 것을 적발했다”며 “이로 미뤄볼 때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의 시험의뢰를 독점하고 있는 F시험소의 시험 결과가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실제 주간동아가 문건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2003년 6월의 경우 시험 가능한 횟수보다 120회를 상회한 것으로 드러났다. 건교부는 F시험소의 시험 결과 조작에 대해서도 현재 특감을 벌이고 있다.
구멍 크기의 문제와 함께 물을 잘 빨아들이도록 한 친수 처리가 안 된 것도 지적됐다. 해양수산위 이철우 의원(열린우리당)은 올 10월 국감 당시 “2004년 5월 이전까지 사용된 A배수재에는 친수 처리가 안 돼 지하에서 물을 빨아들이는 능력이 B배수재보다 현격히 떨어진다”며 직접 잉크를 들고 실험해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D사 측은 “A배수재의 경우 시험방법을 제대로 적용하면 시방에 맞는 결과가 나오며, 이러한 오해는 전문 분야를 너무 상식적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는 모든 배수재는 친수 처리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A배수재가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 2단계 공사뿐 아니라 물금·양산택지를 비롯해 거의 모든 현장에서 사용되었다는 점. 실제 필터 수입 통계를 보면 2002년부터 2004년 5월까지 수입된 필터 총 8만9400km 중 A배수재에 쓰인 필터는 전체의 70%에 해당하는 6만3200km에 달한 반면, 시방의 구멍 크기를 만족하는 B배수재 필터의 수입량은 11%인 1만600km에 그쳤다. 그나마 2002년까지는 오직 A배수재의 필터만 수입됐다. B배수재 필터는 A배수재 필터에 비해 가격이 10~20% 비싸지만(시기에 따라 다름), 좋은 배수력 때문에 연약지반 공사의 중심지인 싱가포르와 네덜란드 등에서 가장 폭넓게 쓰고 있는 배수재다. 싸다는 이유로 A배수재를 연약지반 공사에 쓰는 나라는 우리를 제외하고 거의 없는 실정이다.
F시험소 시험 결과 허위 가능성
이런 문제를 인식했는지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 2단계 공사의 시공사들은 올 5월 이후 A배수재 대신 C배수재를 쓰고 있다. C배수재에 쓰인 필터는 D사의 제품설명서에 나타난 유효구멍 크기만으로 본다면 B배수재처럼 시방서에서의 유효구멍 크기 시험규격을 만족하는 제품. 하지만 현재 C배수재는 더 큰 논란에 휩싸여 있다. 조경태 의원은 “C배수재 필터의 경우 A배수제 필터에다 곰보처리(캘린더링, 엠보싱, 도팅)를 해서 유효구멍 크기를 편법으로 작게 위장한 것”이라며 “이는 이미 90년대에 알려진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캘린더링이란 배수재의 필터 표면을 화장지와 같이 부분적으로 움푹 들어가게 처리한 것으로 한국토지공사 토지연구원은 1997년 9월 시험 시공 연구보고서에서 연약지반 개량 공사에 사용 불가 제품으로 평가했다. 토지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제조업체에서 원가를 낮추기 위해 중량이 작은 필터를 사용한 뒤 유효구멍 크기 규정에 맞추기 위해 필터 표면을 직경 1~2mm의 원형으로 녹여 필터의 간극(구멍 숫자)을 줄이는 캘린더링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캘린더링은 용융된 면적이 불투수성(물이 통과하지 못함) 되어 투수면적(물이 통과하는 면적)을 줄이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적시했다. 즉 전체적으로 구멍의 숫자는 줄어들지만, 구멍 크기는 그대로여서 흙의 입자가 배수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막힘 현상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부산 신항만의 경우는 최초의 시방서인 기본설계 단계에서 캘린더링 처리한 배수재를 사용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규정은 실시설계 과정에서 슬그머니 삭제되고 말았다. 마치 일반 법률이 수정할 수 없는 헌법 규정을 편의대로 삭제한 셈이다. 네덜란드의 배수재 생산업체 콜본드의 블래어 로스 박사는 “캘린더링 공정은 적은 비용으로 배수재를 제작하는 방법 중 하나로 유효구멍 크기 시험검사를 하면 충분히 통과하지만, 투수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효구멍 크기 특감 발표 미뤄
하지만 D사 측은 “현재 생산되는 C배수재는 한국토지공사가 실험한 캘린더링 제품과 완전히 다르며, 캘린더링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며 “C배수재는 캘린더링을 했다고 해서 투수성이 떨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 건교부는 유효구멍 크기에 대한 각 시험소의 검사 결과 보고가 완료됐는데도 특감 결과 발표를 계속 미루고 있어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다. 한 시험소 관계자는 “시험 결과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에 쓰인 A배수재의 경우 평균값이 120㎛ 이상으로 나오는 등 시방서 내용을 크게 만족시키지 못했다”며 “우리는 이미 모든 보고를 마쳤다”고 전했다. 건교부는 11월 말까지 마치려던 국회의원에 대한 특감 결과 보고를 이미 두 차례나 연기했으며, 시험소의 결과를 받고도 “판단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최종 특감 발표를 한 달 뒤인 1월 말로 미뤄놓은 상태다.
한편 올 2월부터 5월까지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에서 진행하던 배수재 관련 수사는 무혐의 처리된 후 국감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의 재수사 의지 표명이 있은 뒤에도 잠잠한 상태다.
과연 부산 신항만과 인천공항의 신활주로는 완공 후에도 단 한 번의 지반 침하 없이 제 구실을 다할 수 있을까? 매년 수백억원의 예산을 낭비하는 사회기반시설 ‘지반 침하’ 현상에 대한 토목 공학자들의 양심적이고 솔직한 ‘자기고백’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