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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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화해 못한 우리 시대 얼굴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10-29 1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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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업과 화해 못한 우리 시대 얼굴

    밀착사진을 확대한 김우영의 b컷 사진

    패션모델과 사진작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은 대개 이런 것이다.

    패션모델은 자유롭게 포즈를 취하고, 사진작가는 “O.K!”를 연발하며 뮤즈의 영감이라도 받은 듯 셔터를 누른다. ‘촬영에의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사진작가도, 패션모델도 행복해 보인다.

    현실의 촬영 현장은 어떨까.

    촬영을 의뢰한 에디터는 외국 잡지 몇 쪽을 죽 찢어와서 사진작가에게 “이렇게 찍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시안’이라고 부른다.

    ‘성격 좋은’ 사진작가라면 에디터의 말대로 ‘시안’을 그대로 ‘카피’하려 애쓴다. 사진작가의 머리는 구도와 조명이 달라지지 않는지 시안과 렌즈를 번갈아가며 들여다보느라 복잡하다. 에디터는 시킨 대로 진행이 되는지 다시 눈을 부릅뜬다. 간혹 사진작가가 ‘내 사진’ 운운하며 고집을 피운다면, 에디터는 다시는 그에게 촬영을 의뢰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자리에서 고함과 욕설이 오갈 확률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적인 사진, 즉 광고나 잡지의 화보 촬영을 하는 사진작가라면 반드시 한두 번씩은 겪는 일이다. 한 사진작가는 “이는 거의 폭력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옷도 카피(혹은 수입품)니 모델 포즈도 카피하고, 사진도 카피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물으면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그래서 사진작가들은 에디터, 혹은 광고주가 선택하는 단 한 장의 A컷 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B컷 사진을 찍는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B컷 사진들이 생기고, 사진작가가 제안한 A컷 사진이 에디터에 의해 B컷이 되어 서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사진작가들은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에디터에게 모범답안 A컷과 자신의 A컷을 함께 제안해본다. 사진작가의 의도가 받아들여지면 다행이지만, 상업적인 효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에디터가 모범답안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진작가에게 B컷은 ‘잘못 나온 사진’ 혹은 ‘테스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10월23일부터 내년 1월16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패션사진 B-b컷으로 보다’는 이 같은 의미를 가진 B컷 사진을 보여주는 전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는 30, 40대 초반 사진작가 8명이 참여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B컷 사진들은 ‘버려진 사진’이 아니다. 상업적인 A컷과 화해하지 못한 또 다른 A컷이고, 사진작가에게 남아 있는 상흔이며, 한 사회의 인습과 상상력의 한계이기도 하다.

    순수미술 작가이기도 한 김우영의 전시작들은 이번 전시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밀착 인화(에디팅을 위해 필름 사이즈로 인화한 사진) 사진을 거대하게 확대하기도 하고 필름을 비닐에 확대한 사진을 걸기도 했다.

    상업과 화해 못한 우리 시대 얼굴

    변순철의 b컷 패션사진.

    그는 모 잡지의 표지로 영화배우 고수를 찍었고 찡그린 표정의 사진을 A컷으로 제시하나, 에디터는 “아무래도 웃는 얼굴이 좋겠다”고 말해 이 사진은 B컷이 되었다. 담배 피는 인물 사진은 최근의 금연 분위기 때문에 B컷이 되었다. 사진작가의 A컷이 모델의 특성과 작가적 상상력이 하나의 스타일로 극대화된 이미지라면, 에디터의 A컷은 소비자가 그 이미지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로 결정된 것이다.

    또 다른 참여작가 변순철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는 젊은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작품 중 하나는 머스커닝햄 무용단의 한 여자 무용수가 자신의 벗은 가슴을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현대무용과 관련된 사진이 아니라 미국의 한 패션 잡지의 12쪽 분량의 화보로 촬영한 사진 중 하나인데, 잡지 에디터가 “잡지에 공개하기엔 너무 강렬하다”는 이유로 B컷으로 남겨진 것이다.

    “이 사진은 패션사진의 경향이 옷의 실루엣이나 스타일을 보여주던 데서 하나의 컨셉트, 내러티브 중심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패션사진은 화려한 옷과 늘씬한 모델에서 나오는 뭔가 다른 사진으로 인식되는데, 패션사진도 인물사진일 뿐이다. 따라서 그 창조성은 인문학과 철학, 영화와 미술, 사회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한국 패션사진의 문제로 다양성의 부재를 이야기하며 원인의 하나로 서구 패션사진에 대한 맹목적 모방을 든다. 그래서 모든 패션잡지가 매월 비슷비슷한 사진을 담고, 트렌드엔 가속도가 붙으며, 한두 명의 사진작가가 소진될 때까지 그 모든 사진을 찍은 뒤 폐기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것은 원래 서양에서 태어난 한국 현대미술이나 한국영화의 운명과 닮아 있다.

    한 사진작가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패션사진 작가는 트렌드를 잘 따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사회에 대한 긴장된 시선을 담아낸 이들이다. 우리나라 패션 사진계에도 현대미술이나 영화처럼 점점 더 진지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평했다.

    큐레이터 민병직씨는 “패션사진에 대한 인식의 한계 때문에 B컷이 된 사진, 작가들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 우연한 효과를 가진 B컷, 지나친 선정성으로 인해 B컷이 된 사진들이 공개된다. 이들은 각각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관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가 열리는 대림미술관은 서울 통의동 청와대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유리 건물로 사진 전시를 위해 지어졌다. 2002년 개관 이후 ‘사진과 패션모델의 변천사’ , ‘다리를 도둑맞은 남자와 30개의 눈’ 등 패션사진에 대한 기획전을 여러 차례 마련한 바 있다. 문의 02-720-0667



    문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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