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비 경기에 몰두하고 있는 영국 대학생들.
명문 옥스퍼드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마이클 벨로프 학장이 영국 정부의 대학입학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1997년 집권 이후 더 많은 국·공립 고등학교 졸업자가 케임브리지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 등 명문대에 진학해야 한다며 ‘입학할당제’를 실시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 정책은 교육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며 명문대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 이른바 ‘영국판 고교등급제’ 논란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많은 게 사실.
우선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볼 수 있었던 영국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전체 학생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학생들은 국·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학생 수의 10%에 그치는 사립 중·고등학교 출신이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 등 명문대 입학생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노동당 정부가 탄생한 97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당시 ‘옥스브리지’(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을 합쳐 부르는 말) 신입생의 70%가 사립학교 출신이었다.
옥스브리지 신입생 77%는 국·공립으로
이에 ‘서민의 정당’을 앞세운 토니 블레어 총리는 명문대가 더 많은 국·공립학교 출신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를 위해 각 대학에 국·공립학교 출신의 입학률을 권고사항으로 지정해주었다. 올해 옥스브리지는 전체 신입생 중 77%를 국·공립학교 출신으로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올해 두 대학은 신입생의 55% 정도만 국·공립학교 출신으로 채웠다. 보수당 정부 시절의 입학률 30%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지만, 정부가 지시한 77%보다는 턱없이 낮은 비율이다.
영국은 중부지역에 위치한 버킹엄대학을 제외하고 모든 대학이 국립대학이다. 즉 버킹엄대학만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학교가 자율적으로 학비를 징수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학들은 정부 지원이 ‘생명줄’이다. 해마다 연구업적, 학생 실력 등 각종 지표로 평가받아 정부로부터 연구비 등 지원금을 받는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옥스브리지, 런던정경대학, 임페리얼 칼리지 등은 연구비 지원에서 상위 그룹에 속하는 명문대학이다.
정부가 주는 연구비 지원을 포기할 수 없기에, 명문대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더 많은 국·공립학교 출신을 선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이 아닌 ‘출신’에 따라 학생을 선발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 직면하면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벨로프 학장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명문대는 신입생을 어떤 절차로 선발하고 있을까.
먼저 옥스브리지의 신입생 선발 과정을 살펴보자. 영국에서는 보통 9월 말에 새 학기가 시작된다. 따라서 지원자들은 전해 10월경 입시원서를 제출한다. 이어 12월에 면접시험이 시행되고, 우리나라의 수학능력시험 격인 ‘에이레벨(A-level)’ 성적 결과는 입학을 얼마 앞둔 7월에 발표된다. 따라서 면접시험 때는 보통 ‘조건부 합격통보’를 받는 셈이다. 즉 에이레벨 성적이 우수할 경우 최종 합격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옥스브리지가 에이레벨 성적과 면접시험의 비중을 일절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는 지원자들 대부분은 에이레벨 시험에서 각 과목마다 최고점수인 A를 받는다. 때문에 면접시험이 당락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짐작될 따름이다.
옥스퍼드에 있는 블렌하임궁 전경.
전형 과정이 이렇다 보니 많은 돈을 내야 하는 사립학교 출신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한 반에 20명 내외의 학생, 보통 대학보다 많은 각 과목별 교사, 수영장과 푸른 잔디밭…. 영국의 사립학교들은 우수한 인력과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명문대 입시를 대비한 모의 면접시험도 수시로 치른다. 1년 학비는 평균 3000만∼4000만원이다. 사립학교에서 정교사로 일하는 한 영국인은 “내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사립학교 보내는 학부모 불만도 높아
그러나 명문대들은 국·공립학교 출신 선발 확대를 권고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 이들은 “정부 정책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정부 정책으로는 실력 위주의 선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질까봐 우려하고 있다.
벨로프 학장은 한술 더 떠 “정부가 현실에 맞지 않게 국·공립학교 출신 선발을 강요한다면 15년 이내에 사립대학으로 전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3세기에 설립되어 국왕에게서 많은 땅을 하사받은 옥스브리지는 그동안 재산을 잘 관리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사립대로 전환할 경우 마음대로 학비를 책정, 징수할 수 있어 정부의 지원이 끊기는 일은 별반 걱정할 게 못 된다.
많은 돈을 들여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사립중고등학교협의회 관계자는 “학생 개인의 실력을 보고 신입생을 선발해야지, 출신 학교를 보고 선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 정책을 환영하는 국·공립학교 학부모들은 아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독일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으로 온 한 남성은 “사립 중·고등학교의 막강한 위력은 영국이 여전히 귀족사회임을 방증하는 예”라고 평가했다. 영국은 17세기 명예혁명을 치른 후 사회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해왔다. 따라서 몇백 년 된 전통과 관습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사립학교들의 주요 업무란 귀족자녀를 받아 가르쳐서 옥스브리지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 학교는 21세기에도 그 업무를 계속 수행하는 셈이다. 물론 돈 있는 평민들도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으나, 그건 극소수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영국의 사립학교와 옥스브리지는 ‘현대판 귀족의 세계’로 남게 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당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서민 개방형’으로 변모할 것인가.
서울 강남의 중·고등학교들과 몇몇 유명 사립대학들은 ‘한국형 귀족사회’를 표방하고 나설 것인가. 영국이나 한국이나 이래저래 ‘돈’과 ‘교육’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