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시험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서울 한 재수학원의 학생들.
종로학원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학원의 입학상담 관계자는 “재수에 대한 문의는 보통 12월 말에 많이 들어오는데 올해는 일찍부터 ‘선행학습반은 없느냐’고 물어오는 고3 학생이나 학부모가 많다”고 전했다.
재수 열풍은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서울 중대부고 3학년 강혜령양(18)은 “우리 반 학생 33명 중 15명 정도는 재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연일 ‘재수생 강세’라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너도나도 재수하면 성적이 오를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됐다”고 털어놨다. 평소 모의고사 때보다 수능 때 성적이 떨어진 학생들의 경우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재수를 권유하고 있다는 게 강양의 이야기다. 인천 인명여고의 이승진양(18)은 “내년에 새롭게 적용되는 7차 교육과정 공부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영어 교과를 의무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후배들보다 외국어 영역은 불리하겠지만 수리 영역은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재수생 강세’, ‘고4는 필수’, ‘재수는 필수’, ‘재수생 열풍’.
수능 성적표를 조심스레 확인하는 여학생.
수시모집 비율 높아질수록 점수 편차 커져
재학생 중 일부 상위권 학생들은 수시모집에 합격해 수능을 보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다. 또 ‘재수생 강세’에 대한 천편일률적 언론 보도가 고3 학생들의 재수 열풍을 부추기고, 재수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는 비판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 강동구 H고의 이모 교사(35)는 “언론과 재수학원이 합작해 ‘재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며 “재수생 강세의 허상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재수생 강세’가 수치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도 수능부터다. 97년도의 경우 재학생의 평균점수(174점)는 재수생의 평균점수(163.33점)보다 10점 정도 높았다. 98년도 수능의 경우도 남녀 재학생의 평균점수가 재수생보다 각각 1.58점, 19.51점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99년도 수능부터 재수생의 성적(242.7점)이 재학생 성적(239.8점)보다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재수생 강세는 이후 계속 이어져 2004년도 수능에서는 재수생의 평균점수와 재학생의 평균점수 차가 인문계 27.4점, 자연계 46.3점, 예체능계 26.1점 정도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99년 이후 재수생의 점수와 재학생의 점수는 점점 편차가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눈여겨볼 대목은 재수생과 재학생의 수능 성적 편차가 커지는 만큼 재학생의 수시모집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인적자원부 대학학사지원과 정봉문 사무관은 “2002학년도 29%, 2003학년도 31%, 2004학년도 39%를 수시모집으로 선발했다. 수시모집으로 일부 상위권 학생들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재학생들의 수능 평균점수는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양화된 대학입시제도’는 재학생들이 수능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예를 들어 서울대 수시모집에서 인문계는 과학탐구 영역을 반영하지 않고, 자연계는 사회탐구 영역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재학생들은 몇 과목만 골라 전략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재학생들의 수능 총점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반면 재수생의 경우 수시모집에 응시할 기회가 없어 수능에 전력투구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조지민 연구위원도 “수능이 쉬워진 99년도부터 재수생들이 조금씩 점수로 앞서기 시작했다. 수시모집 비율의 확대와 의대 진학 열풍, 상대적으로 쉬워진 시험 등 다양한 요인이 ‘재수생 강세’ 현상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재수생과 학부모들이 재수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번호표를 받으려고 장사진을 이룬 모습.
한 사설입시기관이 조사한 재수생의 성적 상승에 관한 조사결과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가 2002학년도 수능을 치른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인문계의 경우 380점대 이상의 학생들은 82%가 성적이 올랐으나 320~339점대 학생들은 28%가 성적이 떨어졌다. 또 자연계 같은 점수대의 경우 30%가 성적이 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예체능계열의 경우에는 240~259점대 학생들의 48%가 성적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재수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사를 주도한 중앙학원의 김영일 원장은 “중·상위권 학생이 자발적 의지를 갖고 재수할 경우 성공할 확률이 높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이 부모의 강요에 억지로 재수할 경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올해 재수생들의 성적 상승도를 조사하고 있는 김원장은 “무조건 재수를 맹신하기보다는 일단 대학에 진학한 뒤 ‘반수’를 고려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유병화 고려학력평가연구소 실장도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재수를 너무 쉽게 선택하도록 몰아가는 분위기는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잇따른 ‘재수생 강세’ 보도에 일부 재수생들은 허탈감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 J학원 최모군(19)은 “초강세를 보인 재수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다”며 “지난해에 비해 20점이 오르긴 했지만, 다른 학생들도 모두 점수가 올라 지원할 만한 학교는 작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다. 같은 학원 김모양(19)은 오히려 지난해에 비해 수능 점수가 두 등급이나 떨어졌다. 김양은 “지난해 합격했던 학교도 포기하고 재수를 시작했는데 점수가 오히려 큰 폭으로 하락했다”며 “1년간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 재수하느라 시간과 돈만 낭비한 꼴”이라고 자책했다.
대성학원의 이영덕 평가실장은 “수능에서 ‘재수생 초강세’라는 표현은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려대 45%, 서강대 50%, 이화여대 53%, 성균관대 45%, 부산 동아대 50%, 조선대 50% 등 중·상위권 대학들이 수시모집으로 상당수의 학생을 선발하는 데다 최근 상위권 재수생들의 경우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포진한 재수생과 다양한 수준의 학생이 골고루 섞여 있는 재학생의 수능 점수를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현행 입시제도는 재학생에게 훨씬 유리한 제도가 아니냐”는 게 이실장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