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0월30일 당사에서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칼을 너무 일찍 빼 엉켜버렸다.”10월30일 열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 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놓고 한나라당 내에서 쏟아진 지적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11월2일 대선자금에 대한 무한 사정을 제안한 이후 이 전 총재의 입장이 어색하게 돼버렸다.
“나 때문에 국민과 많은 한나라당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대국민 사과에 나섰지만 검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또 대국민 사과에 나서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처지다. 더구나 검찰의 수사 확대는 정치적 사과로 면피하려던 이 전 총재를 코너로 몰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노대통령의 강공이 예상됐는데도 이 전 총재가 굳이 국민 앞에 나서 기자회견을 한 배경을 놓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미묘한 이 시기에, 그것도 선명한 한나라당 로고를 배경으로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10월9일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던 최돈웅 의원의 기자회견 때 당직자들이 커튼으로 한나라당 로고를 가렸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최의원은 노발대발했다. 당의 로고는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돌아온 이 전 대표가 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낳기에 충분하다. 최병렬 대표의 한 특보는 “뭔가 의도나 계산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을 연출한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의 설명은 간단하다.
“함께 선거를 치렀던 당원들이 잡혀가는데, 총재가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느냐. 또 회견장소도 당초 옥인동 마당을 생각했지만 너무 좁은데다 대안이 없어 당사를 이용했다.”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주문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이어진다. 이 전 총재는 정치적 책임은 물론 법적 책임까지 지겠다고 나섰다. 검찰의 소환 요구가 있으면 응하겠다는 입장은 ‘올인’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전 대표는 정작 SK 비자금 사전 인지 여부, 측근 개입, 대선자금 전모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 때문에 뇌관은 감춘 채 정치적 수사만 늘어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전략적인 회견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왜 서둘렀나” 회견 배경에 관심
10월20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회창 전 총재와 환영 나온 한나라당 의원들.
비자금 정국을 맞아 한나라당 사무처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최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는 그럼에도 아무런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이번 회견을 통해 당내 사무처 및 당원들에게 “흩어지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했다. 또 “유사시 내가 나설 수 있다”는 강한 암시를 준 흔적도 엿보인다. 재정국 한 관계자는 “이 전 총재의 회견을 본 후 상황에 끌려가는 당의 현실을 보았다”고 개탄했다.
일부 언론은 이 전 총재의 이런 움직임을 정계복귀론으로 연결한다. 내년 총선 후 책임총리제, 개헌 등과 같은 굵직한 정치 현안들과 연동해 일고 있는 정계복귀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당내에서는 민감한 화두로 굴러다녔다. 특히 최병렬 체제에 의문을 표하는 인사들과 이 전 총재의 직계 인사들은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 전 총재 복귀 시나리오를 갈고 닦고 있었다. 이 전 총재의 특보그룹은 ‘자유를 위한 행동’이란 조직을 만들어 ‘이회창 사단’의 정치세력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정계복귀 가능성을 일축한다.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 때 사회를 보았던 이종구 전 특보는 “공항에 사람들이 모이니 영국에서 귀국하던 DJ하고 비교되고, 당사에 나가니 옛날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일 뿐 정계복귀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 전 소장도 이 전 총재의 복귀와 관련, “지금으로서는 가능성 0%”라는 입장이다. 이 전 총재 자신이 전혀 생각이 없다는 게 옆에서 지켜본 유 전 소장의 소감이다. 그러나 유 전 소장의 말에는 함정이 있다. 그는 “지금으로서는…”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그러면서 그는 “(비자금)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유 전 소장이 말한 ‘상황’은 검찰의 수사에서 출발한다. 검찰은 현재 원칙대로 수사한다는 입장이다. 안대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검찰 출입기자들과 만나 “수사팀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며 수사에 성역이 없음을 강조한 것은 이 전 총재도 필요하다면 조사하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검찰은 3일 대선자금 수사 확대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검찰로서는 이 전 총재에 대한 수사가 매우 부담스러운 눈치다. 검찰 주변에서는 만일 이 전 총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정치적 대응 여건을 만들어놓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즉 이 전 총재를 소환 조사할 경우 “노무현 대통령도 조사하라”는 압력이 검찰에 가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전 총재측은 검찰의 수사 방향과 수위를 봐가며 대응책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유 전 소장은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되면 경우에 따라 또다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 검찰의 수사 결과를 서너 가지로 압축, 대응논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 속에는 (감옥 갈) ‘각오’까지 포함된다. 죽기를 각오해야 살 길이 열린다는 ‘사즉생(死卽生)’의 전법이다.
이 전 총재의 전 특보였던 L씨는 “상처 없이 이 정국을 빠져나가긴 어렵겠지만 무리한 압박이 가해질 경우 결국 이 전 총재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패했지만 그는 1000만명이 지지한 대선후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전 총재측은 노대통령의 다음 ‘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재신임과 비자금, 대선자금으로 점증되는 정치공세가 결국 정치자금으로 연결돼 폭발할 것으로 분석한다. 그 경우 이 전 총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지난 대선 당시 검은돈에 손을 댄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전 총재가 전면에 나서 비자금 정국의 병풍역을 맡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정계복귀가 아니라 과거 동지들을 지켜달라는 명분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대통령이 가는 길에 따라 이 전 총재측의 입장도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이 전 총재와 측근들이 고도의 줄타기에 나섰음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앞에 펼쳐진 정치지형은 매우 험난해 보인다. 그를 지켜줄 사람도 많지 않고 힘도 없어 보인다.
이 전 총재는 10월28일 와병중인 김윤환 전 민국당 대표를 방문, 2000년 16대 총선 공천 배제 등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청했다. 그러나 김 전 대표의 한 측근은 “화해하기에는 김 전 대표의 병이 너무 깊다”고 말했다. 화해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줄타기에 나선 이 전 총재의 행보도 때늦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