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이푸 교수. 타이완 태생인 그는 1979년 군복무 중 타이완에서 바다를 헤엄쳐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런 면에서 베이징대학의 린이푸(林毅夫) 교수의 예는 특이하다. 그는 현재 거의 유일하게 타이완을 방문하지 못하는 중국 학자다. 그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월북자’다. 중국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는 린이푸 교수는 82년 베이징대에서 정치경제학 석사학위를, 86년에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슐츠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농업경제를 연구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중국으로 돌아와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발전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된 그는 94년 베이징대에 중국경제연구센터를 창설해 지금까지 교수 겸 주임으로 재직중이다. 그는 9월 동아일보 부설 ‘21세기 평화연구소’가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 일본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및 현대한국연구소, 중국 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주최한 ‘동북아의 경제협력과 경제공동체 형성’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타이완 방문 신청 찬반 여론 들끓어
그가 일하고 있는 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센터는 미국에서 시장경제를 공부한 3명의 소장학자들이 중심이 돼서 만든 사실상 중국 최초의 시장경제 연구센터다. 올해로 설립 10년째를 맞는 이 센터는 중국 내 급진적 개혁 모델의 산실로 꼽힌다.
이런 린이푸 교수가 지난해 한 사건으로 인해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미국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동안에 타이완에 있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과연 그가 부친의 임종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중국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분단의 현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완 이란현 출신인 린이푸의 본명은 ‘린정이’다. 타이완대 진학 후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재학 도중 육군군관학교로 적을 옮겨 당시 타이완에서 화제가 됐다. 이른바 ‘펜을 집어던지고 종군한다’는 의미인 ‘투어비총지’한 모범적인 인물로 칭송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정치대학교 기업관리연구소로 파견돼 78년 석사학위을 받은 후 군으로 복귀, 중국 푸젠성과 마주보고 있는 최전선 진먼다오의 소부대 책임자가 됐다. 진먼다오는 지금도 간간이 총성이 울려 중국과 타이완을 긴장관계로 몰아넣는, 만일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전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최전선이다.
9월에 고려대, 와세다대, 베이징대가 공동주최한 ‘동북아의 경제협력과 경제공동체 형성’ 한중일 국제학술대회 모습(왼쪽). 린이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베이징대 캠퍼스.
그런 그가 망명한 지 20여년이 지난 뒤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타이완 방문을 신청한 것이다. 타이완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우선 타이완 정부의 대륙위원회, 국방부, 국가안전국 등 관계기관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논의에 들어갔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국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특히 법무당국과 군이 형사소추권을 둘러싸고 심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먼저 천딩난 법무부장은 린이푸가 군복무 중 탈영, 중국으로 망명했지만 타이베이에 돌아오더라도 형사법 80조상의 형사소추 기한이 이미 지나 기소 등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을 가진 대륙위원회의 차이잉원 주임은 전체 군 장병의 사기에 미칠 영향 등을 생각해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린이푸의 부친은 결국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미국 학술대회 참석 중 아버지의 부음을 접한 린이푸 교수는 손수 제문을 지어 아버지 영전에 바쳤다. 유명을 달리한 부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는 기사가 홍콩 언론을 통해서 전해지자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중국 내에선 ‘체제 변혁파’로 분류
하지만 결국 그의 귀향은 좌절되고 말았다. 부친의 임종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묘소 참배마저도 망명자인 그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돼버린 것이다. 한때 그는 귀국을 강행하려 했지만, 형사처벌의 가능성과 실종 위로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악화된 여론, 그리고 결정적으로 처벌을 우려한 가족들의 반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린이푸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으로 망명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혀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그는 “대륙인을 돕는 것이 바로 타이완인을 돕는 것이다. 대륙이 발전할 경우 첫번째 수혜 대상은 타이완”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굳은 신념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린이푸 교수의 평소 지론인 비교우위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신념이다. 중국이 가진 최대 경쟁력인 노동력과 농촌 시장을 활용하자는 비교우위론이 바로 그로 하여금 사선을 넘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국이 고성장을 지속하려면 중국경제의 비교우위 요소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노동력의 경우 선진국은 자본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지만 중국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의 경쟁력은 농촌이며, 농촌에 기술을 이전하면 경제가 발전하게 돼 있고, 관건은 어떤 기술을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주장을 통해 자신의 이론 체계를 확립했다.
여기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이론은 중국 경제학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시장경제 쪽으로 상당히 편중된 편이다. 그가 공부한 시카고학파는 현존하는 경제 유파 중 가장 시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내에서 그는 체제개혁이 보다 급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체제 변혁파’로 분류된다.
결국 린이푸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가장 시장경제적인 이론체계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타이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대륙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그가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다시 시장화되는 중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유파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인생유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린이푸의 신념도 현실적인 이념의 벽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결국 그는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묘소조차 참배하지 못했다. 그가 비록 중국과 타이완에 분단의 현실을 알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자신이 분단의 희생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송두율 교수와 관련한 논쟁이 린이푸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결론을 내지 않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