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 후 2사단 재배치’를 주장하고 나섰으나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미국 내 강경파들은 미군 재배치는 북핵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주한미군 2사단의 후방 재배치 논란을 지켜보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노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애초의 강경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북핵 문제 해결 후 2사단 재배치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반대로 미국 정부는 “2사단 재배치 문제는 이전부터 논의돼왔던 것이므로 북핵 문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상황이 꼬이는 듯하자 급기야 고건 국무총리가 5월9일 사상 처음으로 미 2사단을 방문해 도로 확장 등 편의시설 제공을 약속하는 ‘새마을운동식’ 접근법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손길승 회장 등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일행의 2사단 방문에 이어 이제 정부가 직접 나서 미 2사단을 붙잡아놓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한미 정상회담 직후 채택될 공동성명에서 2사단 재배치 문제를 장기과제로 넘기기로 사전 합의했다는 소식이 우리측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2사단 재배치 논의를 일단 유예하는 조건으로 미국측에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기과제’ 사전 합의 소식 흘러나와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는 사실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 이후 반미 기류 속에서 불거진 문제도 아니고 노대통령 취임 이후 새롭게 제기된 이슈도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미 의회가 1989년 냉전종식의 분위기 속에서 ‘넌-워너 수정안’을 통과시키면서 3단계 주한미군 조정안을 마련할 때부터 예고되었던 사안으로, 90년대 초 미 의회의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됐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군체계를 해군과 공군 위주의 신속대응군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주한미군도 이 같은 전략 변화에 따른 조정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 미국의 한 군사 소식통은 “한반도 핵 위기가 불거진 상황에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가 전면에 떠올라 유감이지만 주한미군 재배치의 근본 목적은 해외 주둔 미군의 전반적 전략 개념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 역시 “최근 한국 정부가 2사단 재배치 문제를 놓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막후 협상을 벌이는 데 대해 미국 정부 내의 분위기는 다소 냉소적”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미 2사단 후방 배치 문제를 놓고 미 정부 내 강경파의 ‘노무현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최근 ‘북핵 딜레마’에 빠진 노무현 정부에게 ‘재배치 이전 한미 간 협의’라는 유인구를 던지면서 노대통령의 헛스윙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한국 내에서의 미군 철수 논란과 반미감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미국은 북핵 딜레마에 빠진 한국 정부의 처지를 활용해 향후 기지 이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포석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몇 차례에 걸친 미군 철수의 역사를 보더라도, 닉슨 대통령 시절이나 카터 대통령 시절 모두 미국이 한국 정부와의 협의 없이 철군을 단행함으로써 미군 철수 문제가 국내 정치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미군의 일방적 재배치는 국내 정치적으로 노대통령에게 부담스런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 역시 이런 점을 읽고 노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90년 내놓은 EASI에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 2사단 후방배치안을 포함, 동아시아 주둔 미군을 재조정해 군사능력 향상에 상응하는 만큼의 지상군 병력을 줄여 이 지역 전력의 내실화를 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지금처럼 비무장지대 코앞에 정예병력을 전진배치해 놓는 방식은 변화된 전략 개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일부 비판론자들은 2사단의 한강 이남 배치를 또 다른 맥락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들은 미국의 2사단 재배치론에는 2사단 병력을 북한의 장거리포와 다연장포 사거리에서 빼내려고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이를 통해 자국 해·공군이 북한을 공격하는 데 따른 장애물을 제거하겠다는 속내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비판론자들은 휴전선 일대에 집중배치되어 있는 북한의 장거리포가 유사시 서울과 수도권 내 미군시설을 ‘인질’로 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美 보수파 “한국 방어 능력 충분”
그러나 미국측 관계자들은 이러한 지적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미국 내 보수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케이토 연구소의 더글러스 밴도우 연구원은 “한국에서 미군이 환영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주둔할 필요가 없다”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이 자체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내 싱크탱크의 안보 전문가들 중에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지금까지의 전개 과정만을 놓고 보면 일단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2사단 재배치 문제만큼은 한국의 의도대로 갈등을 봉합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신호에도 여전히 워싱턴의 시각이 크게 달라졌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노대통령이 ‘북핵 해결 후 주한미군 재배치’를 언급한 4월11일 이후 한국언론을 통해 전달된 미 국방부 관계자의 반응은 대부분 “북핵 해결 이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2사단 재배치 문제가 지금 당장 시행될 사안이 아니라 한국과의 협의 하에 청사진을 만든 다음 몇 년에 걸쳐 추진될 사항인 만큼 ‘북핵’이라는 변수 때문에 이를 마냥 늦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설령 미국이 ‘북핵 해결 이후 재배치’라는 한국측 입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를 ‘북핵 해결’로 보아야 할 것인지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완전한 핵 동결 선언까지를 북핵 해결로 보고 2사단 재배치 논의를 재개할 것인지, 아니면 중유 공급 재개 단계에서 2사단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인지가 또 하나의 관건이라는 것.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워싱턴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한국 전문가들의 견해 역시 이러한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국방연구원 캐티 오 책임연구원은 “한미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미국의 2사단 재배치 논의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확대해석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연구원은 또 “2사단 재배치 문제를 무조건 북핵 문제와 연결지어 해석하려는 태도로는 미국이 한국 정부에 공감하게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한미군뿐만이 아닌, 독일 등에 주둔한 해외 주둔 미군 전반에 대한 재조정 과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북핵 문제와 연결짓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2사단 재배치 논의를 유예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2사단 이전을 위한 대체 부지 마련을 위해 수조원의 예산과 30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