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글로 먹고사는 나로서는 느닷없이 발휘되는 직업정신의 기민함에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얼마 전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볼 때도 그랬다. ‘상냥한’을 ‘성냥한’이라고 잘못 표기한 전광판의 자막을 보면서였다. 50억원이나 들였다면서 정작(그토록 중요한) 자막 하나에 들일 공은 없었나, 그렇다면 50억원 운운한다는 건 허장성세 아닌가(기억하건대 오자는 한 번 더 있었다), 서둘러 탄식하느라 한참이나 당대에 다시 없을지도 모를 오페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디에 가건, 아주 피곤할 때조차 세리(稅吏) 같은 쫀쫀함은 여전히 발휘된다. ‘엘리베이터’가 ‘에레베이터’라고 적혀 있는 공연장에선 맞춤법에 맞지 않게 표기하고도 태연한 극장측의 무신경에 미칠 것 같고,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요’라는 푯말 앞에선 “‘요’는 연결형 어미고, ‘오’는 종결형 어미니까 ‘마시오’가 맞지 않나? 국어도 안 배웠나?” 혀를 찬다. 사실 요즘 제대로 표기한 우리말을 보는 건, 과장한다면 연예인 심은하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턱도 없는 일이라, 온통 피곤과 원망이 혈전처럼 맺혀 있는 내 머릿속이 불쌍할 따름이다. 사람이나 장소의 가치와 의미가 단지 맞춤법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잘못된 표기를 보면 미인의 이 사이에서 불타는 고춧가루를 본 것처럼 영 맛이 가고 마니, 그건 우리 어머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요즘 언어 용렬하고 헛헛 … 무례한 아이들 모습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그랬다. 무지막지하게 틀린 맞춤법과 오자의 만행 앞에서 나는 거기 식사하러 갔다는 것도 잊고 지배인을 불렀다. 연필로 메뉴판 위에 교정을 본 다음, 이런 오자는 이 호텔의 수치며, 다음에 여기 들를 때는 이 모든 오류가 바로잡혀 있기를 바란다고, 교장 훈시하듯 지껄였다. 그러나 나의 반응에 진정 ‘회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은 그다지 없다.
그래도 ‘내 곁을’을 ‘내 겨츨’로 발음하는 거개의 가수들을 보면 울화가 뭉클뭉클 선지피처럼 치밀어 오른다. 아니, 그게 구개음화도 아니고 단지 연음이 될 뿐인데, 어떻게 ‘내 겨틀’이 ‘내 겨츨’로 둔갑하는 걸까?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 작사가, 스튜디오 녹음기사와 세션맨 모두 어쩌면 그렇게 무식할까를 성토하다 보면 그 노래가 주는 서정성과 메시지는 나에겐 이미 삼월이 풀 뜯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 나는, 사과껍질을 너무 두껍게 깎는 바람에 먹을 게 적어진 어리석은 거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전철 위칸에 부착된 옛날 국어교과서의 어느 한 페이지로 만든 포스터는 아예 보지 말았어야 했다. 책가방을 멘, 아주 고전적인 이름의 영희가 “하이 철수, 방가방가, 하이룽” 하고 인사하는 게 정녕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개탄하는 우국적 포스터를 보며 나는 웃었다. 그러나 우리말이 천하게 기호화한 건, 그게 누구 탓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녕하세여’라는 인사는 적어도 인터넷 안에서는 ‘안녕하세요’보다 힘이 세다. ‘냉무’ ‘강추’ ‘그리구염’ ‘무쟈게’는 또 어떤가. 누구는 요즘 인터넷 용어들이 보여주는 그 어지러운 프리즘은 말 자체의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큰 거부감은 없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언어란, 단어 자체의 의미가 주는 힘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진정 나를 분개하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꼬인 상황이라기보다 대개 조사나 토씨 하나 그르치는 따위의 자잘한 말실수 때문일 때가 많다. 언젠가 여자친구는 내가 “그나마 네가 있어서 좋아”라고 말했더니 “그나마? 그나마? 내가 그나마밖에 안 돼” 하며 울었다. 내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에겐 그 말이 주는 인색한 의미가 당연히 섭섭했을 것이다.
말도 사랑과 같아서 끝없이 생겨나선 사전 속에 굳은 자취를 남기기도 하고 도태돼가기도 한다. 정지용이나 박상륭, 김현승, 이문구가 남긴 우리말의 담대한 질박함이나 고졸한 아름다움은 피하지방까지 감동시키지만, 세태의 변화 속에서 생긴 요즘 말을 듣고 있자면 다 쓸어 난지도에 갖다 버리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차를 ‘뽑는다’, 휴대전화가 ‘터진다’, 카드를 ‘긁는다’, 오늘 내가 ‘쏜다’, 연예인이 ‘뜬다’ 같은 말의 어감은 왜 이토록 용렬하고 헛헛한가? 이 모든 게 근거 없는 시대의 한 특성이라고 해도 그걸 우리말 사전에 끼워주고 싶은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건, 편하기 때문에 상대의 나이가 어떻건 비존칭으로 말하겠다고 우기는 무례한 아이들 같으니까.
어디에 가건, 아주 피곤할 때조차 세리(稅吏) 같은 쫀쫀함은 여전히 발휘된다. ‘엘리베이터’가 ‘에레베이터’라고 적혀 있는 공연장에선 맞춤법에 맞지 않게 표기하고도 태연한 극장측의 무신경에 미칠 것 같고,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요’라는 푯말 앞에선 “‘요’는 연결형 어미고, ‘오’는 종결형 어미니까 ‘마시오’가 맞지 않나? 국어도 안 배웠나?” 혀를 찬다. 사실 요즘 제대로 표기한 우리말을 보는 건, 과장한다면 연예인 심은하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턱도 없는 일이라, 온통 피곤과 원망이 혈전처럼 맺혀 있는 내 머릿속이 불쌍할 따름이다. 사람이나 장소의 가치와 의미가 단지 맞춤법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잘못된 표기를 보면 미인의 이 사이에서 불타는 고춧가루를 본 것처럼 영 맛이 가고 마니, 그건 우리 어머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거 없는 요즘 언어 용렬하고 헛헛 … 무례한 아이들 모습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그랬다. 무지막지하게 틀린 맞춤법과 오자의 만행 앞에서 나는 거기 식사하러 갔다는 것도 잊고 지배인을 불렀다. 연필로 메뉴판 위에 교정을 본 다음, 이런 오자는 이 호텔의 수치며, 다음에 여기 들를 때는 이 모든 오류가 바로잡혀 있기를 바란다고, 교장 훈시하듯 지껄였다. 그러나 나의 반응에 진정 ‘회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은 그다지 없다.
그래도 ‘내 곁을’을 ‘내 겨츨’로 발음하는 거개의 가수들을 보면 울화가 뭉클뭉클 선지피처럼 치밀어 오른다. 아니, 그게 구개음화도 아니고 단지 연음이 될 뿐인데, 어떻게 ‘내 겨틀’이 ‘내 겨츨’로 둔갑하는 걸까?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 작사가, 스튜디오 녹음기사와 세션맨 모두 어쩌면 그렇게 무식할까를 성토하다 보면 그 노래가 주는 서정성과 메시지는 나에겐 이미 삼월이 풀 뜯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 나는, 사과껍질을 너무 두껍게 깎는 바람에 먹을 게 적어진 어리석은 거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전철 위칸에 부착된 옛날 국어교과서의 어느 한 페이지로 만든 포스터는 아예 보지 말았어야 했다. 책가방을 멘, 아주 고전적인 이름의 영희가 “하이 철수, 방가방가, 하이룽” 하고 인사하는 게 정녕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개탄하는 우국적 포스터를 보며 나는 웃었다. 그러나 우리말이 천하게 기호화한 건, 그게 누구 탓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녕하세여’라는 인사는 적어도 인터넷 안에서는 ‘안녕하세요’보다 힘이 세다. ‘냉무’ ‘강추’ ‘그리구염’ ‘무쟈게’는 또 어떤가. 누구는 요즘 인터넷 용어들이 보여주는 그 어지러운 프리즘은 말 자체의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큰 거부감은 없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언어란, 단어 자체의 의미가 주는 힘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진정 나를 분개하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꼬인 상황이라기보다 대개 조사나 토씨 하나 그르치는 따위의 자잘한 말실수 때문일 때가 많다. 언젠가 여자친구는 내가 “그나마 네가 있어서 좋아”라고 말했더니 “그나마? 그나마? 내가 그나마밖에 안 돼” 하며 울었다. 내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에겐 그 말이 주는 인색한 의미가 당연히 섭섭했을 것이다.
말도 사랑과 같아서 끝없이 생겨나선 사전 속에 굳은 자취를 남기기도 하고 도태돼가기도 한다. 정지용이나 박상륭, 김현승, 이문구가 남긴 우리말의 담대한 질박함이나 고졸한 아름다움은 피하지방까지 감동시키지만, 세태의 변화 속에서 생긴 요즘 말을 듣고 있자면 다 쓸어 난지도에 갖다 버리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차를 ‘뽑는다’, 휴대전화가 ‘터진다’, 카드를 ‘긁는다’, 오늘 내가 ‘쏜다’, 연예인이 ‘뜬다’ 같은 말의 어감은 왜 이토록 용렬하고 헛헛한가? 이 모든 게 근거 없는 시대의 한 특성이라고 해도 그걸 우리말 사전에 끼워주고 싶은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건, 편하기 때문에 상대의 나이가 어떻건 비존칭으로 말하겠다고 우기는 무례한 아이들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