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 장승업. 그는 해가 이울 무렵 조선 말기 화단에 피어난 분꽃에 비견되는 화가다. 짙은 분내음과 다채로운 색을 지닌 분꽃은 땅거미 질 무렵이기에 더욱 화사하게 빛나는 꽃이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면 시계에서 사라진다.
올해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이 타계한 지 105주기가 되는 해다. 또 그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올 4월에 개봉된다. 이래저래 장승업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의 폭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에 활동한 화가인데도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들과 동시대 인물이지만 예술가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알려주는 일화 등이 자주 회자될 뿐이어서 신비화된 감도 없지 않다. 직업화가로서 조선 말기 화단의 말미를 장식한 화가인 점, 근대화단의 두 거목인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이 그의 제자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문하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화의 계보가 형성된 점 등이 오원에 대한 과대포장의 여지를 갖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의 화화사적 의의와 위상은 부정과 긍정의 양 측면이 공존한다.
오원은 정식 시험을 통해 화원이 된 것이 아니며 스스로 화가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생애가 말해주듯 오원은 제도권이 아닌 자유인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최남선은 왕자이건 부호이건 그림을 부탁하는 이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리고 싶지 않을 때 거절했던 오원의 태도를 고결한 지조로 상찬하고 있으나, 실제 그의 현존작품을 보면 적지 않은 그림이 사람들의 주문요청에 따라 그려진 듯하다. 민화 계열의 그림이나 도자기 표면장식 그림을 그렸다는 구전도 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김용준은 ‘국초의 안견과 후기 초두의 단원 김홍도와 아울러 3대 거장으로 우열을 다툴 만한 천재’로, 최순우는 ‘천재적인 조형력과 시골티 벗은 짙은 개성’으로, 최완수는 ‘문인화가 가지는 문기와 서권기까지 기량으로 처리함으로써 문인화의 이념미(理念美)조차 회화적인 차원으로 소화해 버린 것’으로, 안휘준은 ‘조선 말기의 우리나라 회화를 꽃피운 최대의 거장’으로, 이구열은 ‘천운과 시운이 따른 천부의 화가’이나 ‘시대의식은커녕 대체로 타의성이 많은 중국화풍 추종으로 일관한 것’으로, 유홍준은 ‘추사 이후 주눅 들어 있던 화원, 즉 직업화가의 승리’로 보고 있다.
일자무식으로 글자를 모르며 스승이 누구인지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오원이지만 그의 그림에는 역대 중국 대가들의 화풍과 필치가 그야말로 난무한다. 서로 상반되며 함께 다루어질 수 없는 남북종화(南北宗畵)의 두 화풍을 함께 원용하는가 하면, 과거만이 아닌 그와 동시대 중국 화가들의 그림을 남보다 빠르게 수용하기도 했다.
유숙(1823∼1873)이 그의 스승으로 전해지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그림을 일괄해 살필 때 주제나 소재, 나아가 필치와 구성 등 화풍에서 선배화가의 영향이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의 장기였던 도석인물화에서는 일찍이 김명국(1600∼1663 이후) 등 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여러 화원들의 선종화 계열, 그리고 조영석(1681∼1761)의 ‘수노인’이라고도 불리는 남극노인의 도상, 아울러 김홍도의 잘 알려진 ‘신선도 8곡병’ 등의 도석인물과 동물그림에서도 선배화가의 영향이 엿보인다. 천진스런 눈매에 다리가 기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가늘고 긴 사슴은 김홍도와 연관지을 수 있으며 아래로 처진 스산한 나뭇가지 표현은 심사정(1707∼1769)을 비롯하여 최북(1712∼1786 이후)·김홍도·유숙을 거쳐 오원에게도 이어진다.
사실 오원이 국제급 화가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의 화풍이 중국적이란 점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점은 뛰어난 기량과 필력, 다양한 화풍의 거침없는 구사 등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오원의 중국적 화풍은 결국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점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이른바 민족의 고유색이나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 또 개성의 측면에서는 답이 궁해진다.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것은 중국의 여러 대가들이기 때문이다.
오원의 산수화는 수묵담채와 청록산수를 오락가락하며, 남종문인화와 이른바 장식적인 북종산수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나아가 기법이나 화풍에서 명청대(明淸代) 개성주의 화파와 그와 동시대 상해파까지 두루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의 산수화는 다양하고도 다채롭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산이곡’(眉山梨谷)은 주문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겠으나 소를 탄 목동이나 노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은 아가씨의 등장 등 풍속적 소재가 돋보인다. 수채화를 방불케 한 기법으로 화면 넓은 부분을 물들인 점 등은 그의 산수화에서는 드물지만 담채 위주의 채색기법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 면모다. 예외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용우(1902∼1952)나 김기창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같은 화풍은 오원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영모화에서는 여러 종류의 동물과 꽃, 나무를 함께 그린 영모절지화라는 일종의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을 먼저 들게 된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이 분야 그림이 가장 번창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사인물과 영모를 함께 한 병풍도 현재 작품으로는 오원 이전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속도감이 돋보이는 활달한 필치, 닭과 매 등 동물들이 취한 자세나 특징을 잘 간파한 그림에서는 표현주의적인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다. 매 그림의 정형을 이룩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몫이다. 나아가 말 그림에서 보인 그의 필력은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견줄 대상을 찾기 어렵다.
반면 오원의 인물화는 마치 그의 모습을 전해주듯 고사(高士)나 신선풍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어 현실감이 떨어진다. 이는 신비스럽고 신령스러운 것을 찾았던 당시 중인층의 미감을 대변한다. 특히 얼굴 표현에서는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변화가 적다.
이동주는 오원에 대해 ‘조선시대 모든 화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지필을 주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게 할 때 단연 첫번째 위치를 점하는 인물’로 천명한 바 있다. 그의 일탈적인 삶-신혼 첫날밤 부인을 버린 것, 술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 어명에도 불구하고 왕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점-과 함께 활달한 필치, 분방한 구도, 다양한 장르의 넘나듦 등 조선에서는 드물게 호쾌하고 어엿한 그림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뛰어난 기량과는 별개로 그만의 독자성, 즉 고유색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부정적이다. 이 점이 그의 한계이자 조선 말기 화단의 비극이기도 하다.
올해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이 타계한 지 105주기가 되는 해다. 또 그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올 4월에 개봉된다. 이래저래 장승업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의 폭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에 활동한 화가인데도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들과 동시대 인물이지만 예술가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알려주는 일화 등이 자주 회자될 뿐이어서 신비화된 감도 없지 않다. 직업화가로서 조선 말기 화단의 말미를 장식한 화가인 점, 근대화단의 두 거목인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이 그의 제자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문하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화의 계보가 형성된 점 등이 오원에 대한 과대포장의 여지를 갖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의 화화사적 의의와 위상은 부정과 긍정의 양 측면이 공존한다.
오원은 정식 시험을 통해 화원이 된 것이 아니며 스스로 화가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생애가 말해주듯 오원은 제도권이 아닌 자유인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최남선은 왕자이건 부호이건 그림을 부탁하는 이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리고 싶지 않을 때 거절했던 오원의 태도를 고결한 지조로 상찬하고 있으나, 실제 그의 현존작품을 보면 적지 않은 그림이 사람들의 주문요청에 따라 그려진 듯하다. 민화 계열의 그림이나 도자기 표면장식 그림을 그렸다는 구전도 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김용준은 ‘국초의 안견과 후기 초두의 단원 김홍도와 아울러 3대 거장으로 우열을 다툴 만한 천재’로, 최순우는 ‘천재적인 조형력과 시골티 벗은 짙은 개성’으로, 최완수는 ‘문인화가 가지는 문기와 서권기까지 기량으로 처리함으로써 문인화의 이념미(理念美)조차 회화적인 차원으로 소화해 버린 것’으로, 안휘준은 ‘조선 말기의 우리나라 회화를 꽃피운 최대의 거장’으로, 이구열은 ‘천운과 시운이 따른 천부의 화가’이나 ‘시대의식은커녕 대체로 타의성이 많은 중국화풍 추종으로 일관한 것’으로, 유홍준은 ‘추사 이후 주눅 들어 있던 화원, 즉 직업화가의 승리’로 보고 있다.
일자무식으로 글자를 모르며 스승이 누구인지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오원이지만 그의 그림에는 역대 중국 대가들의 화풍과 필치가 그야말로 난무한다. 서로 상반되며 함께 다루어질 수 없는 남북종화(南北宗畵)의 두 화풍을 함께 원용하는가 하면, 과거만이 아닌 그와 동시대 중국 화가들의 그림을 남보다 빠르게 수용하기도 했다.
유숙(1823∼1873)이 그의 스승으로 전해지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그림을 일괄해 살필 때 주제나 소재, 나아가 필치와 구성 등 화풍에서 선배화가의 영향이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의 장기였던 도석인물화에서는 일찍이 김명국(1600∼1663 이후) 등 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여러 화원들의 선종화 계열, 그리고 조영석(1681∼1761)의 ‘수노인’이라고도 불리는 남극노인의 도상, 아울러 김홍도의 잘 알려진 ‘신선도 8곡병’ 등의 도석인물과 동물그림에서도 선배화가의 영향이 엿보인다. 천진스런 눈매에 다리가 기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가늘고 긴 사슴은 김홍도와 연관지을 수 있으며 아래로 처진 스산한 나뭇가지 표현은 심사정(1707∼1769)을 비롯하여 최북(1712∼1786 이후)·김홍도·유숙을 거쳐 오원에게도 이어진다.
사실 오원이 국제급 화가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의 화풍이 중국적이란 점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점은 뛰어난 기량과 필력, 다양한 화풍의 거침없는 구사 등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오원의 중국적 화풍은 결국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점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이른바 민족의 고유색이나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 또 개성의 측면에서는 답이 궁해진다.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것은 중국의 여러 대가들이기 때문이다.
오원의 산수화는 수묵담채와 청록산수를 오락가락하며, 남종문인화와 이른바 장식적인 북종산수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나아가 기법이나 화풍에서 명청대(明淸代) 개성주의 화파와 그와 동시대 상해파까지 두루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의 산수화는 다양하고도 다채롭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산이곡’(眉山梨谷)은 주문자의 의도에 따른 것이겠으나 소를 탄 목동이나 노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은 아가씨의 등장 등 풍속적 소재가 돋보인다. 수채화를 방불케 한 기법으로 화면 넓은 부분을 물들인 점 등은 그의 산수화에서는 드물지만 담채 위주의 채색기법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 면모다. 예외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용우(1902∼1952)나 김기창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같은 화풍은 오원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영모화에서는 여러 종류의 동물과 꽃, 나무를 함께 그린 영모절지화라는 일종의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을 먼저 들게 된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이 분야 그림이 가장 번창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사인물과 영모를 함께 한 병풍도 현재 작품으로는 오원 이전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속도감이 돋보이는 활달한 필치, 닭과 매 등 동물들이 취한 자세나 특징을 잘 간파한 그림에서는 표현주의적인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다. 매 그림의 정형을 이룩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몫이다. 나아가 말 그림에서 보인 그의 필력은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견줄 대상을 찾기 어렵다.
반면 오원의 인물화는 마치 그의 모습을 전해주듯 고사(高士)나 신선풍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어 현실감이 떨어진다. 이는 신비스럽고 신령스러운 것을 찾았던 당시 중인층의 미감을 대변한다. 특히 얼굴 표현에서는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변화가 적다.
이동주는 오원에 대해 ‘조선시대 모든 화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지필을 주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게 할 때 단연 첫번째 위치를 점하는 인물’로 천명한 바 있다. 그의 일탈적인 삶-신혼 첫날밤 부인을 버린 것, 술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 어명에도 불구하고 왕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점-과 함께 활달한 필치, 분방한 구도, 다양한 장르의 넘나듦 등 조선에서는 드물게 호쾌하고 어엿한 그림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뛰어난 기량과는 별개로 그만의 독자성, 즉 고유색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부정적이다. 이 점이 그의 한계이자 조선 말기 화단의 비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