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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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세계주의와 일본 역사 교과서 파문

  • 입력2005-03-03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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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런데 이 일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미지근한 태도는 온 국민을 실망시켰다. 국민의 원성이 자자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응책을 마련한 모양인데, 마지못해 하는 인상이 역력하고, 소 잃고도 외양간 못 고치는 무능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의 미온한 대처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현 정부는 광복 후 장면 정부와 함께 가장 사대주의적인 정부다. 이 일은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정책을 선언한 뒤부터 생겼지만,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본격화하였다. 현 정부는 개방과 구조조정의 강박증에 빠져 국가의 자주나 민족의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효율성과 시장 논리를 내세우면서 외국 자본과 강대국에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인 정부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계주의의 환상에 빠진 정부는 국사교육과 국어교육을 내팽개쳤다. 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국어과목을 빼버렸다. 국사도 제대로 안 가르치면서 남의 역사 왜곡을 규탄할 수 있겠는가. 영어를 필수로 하면서 국어는 시험도 보지 않는 공무원 제도, 문화민족으로서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공문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공무원들이 국가 공복을 자처하고 나서는 판이니, 우리는 도저히 문화민족임을 자처할 수 없다.

    민족보다는 ‘세계 시민’의 환상만 키운 정부-기업-언론-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 중에는 그까짓 교과서 문제가 무엇이 중요하며 그런들 우리에게 무슨 큰일이 생기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한마디로 돈벌이에 조금도 지장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든 언론이든, 이 사회의 ‘주류’가 자신의 정체성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채 어설픈 세계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으니, 미국에 멸시당하고 일본에 무시당하는 게 당연하다. 일본 사람들은 냄비 같은 한국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다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몇 주 못 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또 ‘관계를 악화하지 않기 위해’ 일본과의 선린우호를 강조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일본의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멋있는 일이었는지는 모르나 환상일 뿐이다. 김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일본 정부는 교과서 왜곡으로 응답하였다. 대승적인 자세는 큰 나라가 취할 것이지 작은 나라가 취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힘없는 약소국이다. 약소국은 약소국답게 행동해야 한다. 큰 나라 흉내내느라고 폼 잡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 외교적으로는 과거사를 용서한다고 말하더라도 언제나 경계를 풀지 않아야 한다. 상대가 일본일 경우 특히 그렇다.

    정부가 국사-국어 비중 줄이면서 역사 왜곡 탓할 수 있나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그들의 정신적 빈곤 때문이다. 그들은 선악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보편윤리보다는 상황윤리를 믿는 사람들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러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는 따위의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럴 만한 정신적인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 일은 잊히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본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독일식의 사과를 왜 하지 않느냐’ 따위의 추궁은 아무런 소득이 없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설픈 세계주의의 환상에 젖거나 주제에 맞지 않는 폼을 잴 게 아니라 정확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사대주의로는 주변국에 무시만 당할 뿐이다. 우호관계의 유지는 나와 남의 존재를 함께 존중하는 대등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웃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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