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1

..

“천 년의 꿈 녹청자 재현은 숙명”

해남 도예가 정기봉씨… 2대째 ‘신비의 색’ 살리기 혼신의 노력

  • 입력2005-03-02 15: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천 년의 꿈 녹청자 재현은 숙명”
    토기에 유약을 첨가하면 자기가 된다. 고려청자는 11세기에 세상에 나와 13세기에 꽃을 피웠다. 청자의 뒤를 이어 조선백자와 분청사기가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 자기 역사에서, 토기에서 고려청자로 이어지는 8, 9세기는 그 시대의 대표적 생산물이 알려지지 않은 ‘잃어버린 시기’였다.

    그러던 가운데 1985년 완도 앞바다에 수장되어 있던 옛날 배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장보고의 무역선이었다. 이 배에서 나온 3만7000여 점의 자기는 당시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녹색을 띠고 있었다. 이른바 ‘녹청자’였다. 일부 도예가들은 녹청자에 대해 고려청자를 만들려다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불을 잘못 때거나 유약을 잘못 발라서 엉뚱한 색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남 해남군 문화재전문위원 김승기씨는 “1985년의 대량 발견은 이런 견해가 억측임을 증명했다. 녹청자는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자기로, 한국 자기 역사의 비어 있던 8, 9세기를 채우는 존재”라고 말했다. 통일신라시대, 한국인들은 녹청자를 널리 이용했으며 장보고는 한국에서 생산한 이 제품을 중요한 국제무역 품목으로 거래했으리라고 추정한다. 완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해남지역에선 녹청자를 대량으로 굽던 가마터 104곳이 발견되었다. 해남은 한국에서 가장 큰 녹청자 생산-유통 기지였던 셈이다.

    1000년 전 동북아시아에서 애용되다 장보고와 신라의 몰락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던 이 자기를 지금 부활시키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해남지역 도예가 정기봉씨(44)다. 정씨의 집안은 해남에서 대대로 도자기 굽는 일을 가업으로 해왔다.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조부 동윤씨와 부친 형식씨도 모두 도예가였다.

    “어깨너머로 아버지가 청자 만드는 일을 봤습니다. 아주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도자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정씨가 도예를 천직으로 여기게 된 것은 전북 원광대 응용미술과에 진학해 도자기 수업을 받으면서부터. “어릴 때 자기 제작과정을 지켜보았던 경험들이 체계적인 미학이론과 결합하면서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향의 가마터로 달려갔습니다. “ 이때 정씨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여자친구 장은희씨에게 함께 가자고 프로포즈했다. 장씨의 집안에선 딸을 인적도 드문 벽촌 마을에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자기 만드는 일에 흥미가 있다”며 부모의 허락을 받아냈다. 장씨(43)는 지금 정씨의 아내이자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고향에 내려온 정씨는 부친과 함께 본격적으로 자기 생산에 나섰다. 주로 만든 것은 청자제품.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은 정씨에게 녹청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해남의 녹청자는 아름다운 자기였다”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 그릇을 함께 재현해 보자” “그것은 해남 도예가의 후손인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냐”는 말이었다.

    정씨의 부친은 이때부터 녹청자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자기를 완성하지 못한 채 지난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정씨는 부친이 바라던 일을 이어나갔다.

    정씨가 소개하는 녹청자의 제작과정은 청자와 비슷해 보였다. 녹청자 빚기는 원토를 떠온 뒤 그 흙을 물에 녹여 이물질을 없애는 일부터 한다. 압착방식으로 물을 짜낸 다음 반죽(토련) 작업이 이어진다. 이 흙으로 그릇모양을 빚어 한 번 말린 뒤 형태를 다듬어 한 번 더 말려야 한다. 이후 초벌구이-문양 새기기-재벌구이를 통해 녹청자가 완성된다. 정씨는 “녹청자의 색은 녹색의 염료를 써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고려청자처럼 흙과 불, 유약만 쓴다”고 말했다.

    이중 녹청자가 녹색을 띠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흙이다. 철 성분을 적당히 함유한 흙에서만 녹청자가 생산된다고 한다. 이런 흙은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나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해남의 산이면 지역이라는 것. 정씨는 “내가 해남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국내 대다수 도자기업체는 그릇을 굽는 가마를 최근 가스가마로 바꾸었다. 일정한 수준의 온도를 유지하기가 쉽고, 작업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크게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씨는 나무를 때는 재래식 가마를 고집한다. 이것도 일종의 장인정신인 듯했다. “돈벌이를 위해선 나도 가스가마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녹청자의 재현이 내 일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가마에 들어가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색이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옛 청자를 재현하기 위해선 철저히 옛 방식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000년 전 녹청자 조각들을 ‘교과서’ 삼아 그 색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날마다 녹청자 제작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해남에선 녹청자 재현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는데 이 단체는 정씨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다. 김승기 문화재전문위원은 “현재 국내에서 녹청자 재현 작업을 하고 있는 도예가는 정씨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어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기대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천 년의 꿈 녹청자 재현은 숙명”
    녹청자 역시 고려청자처럼 색에 ‘깊이’가 배어 있다. 이를 완벽히 복원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웬만한 전문가의 눈엔 옛 녹청자 조각과 정씨의 작품은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정씨는 “만족스러운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마를 구울 때마다 ‘옛 색을 완벽하게 재현한 녹청자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정씨가 만드는 녹청자는 다기세트, 반상기세트, 장고모형 등이다. 1999년 문화관광부의 한국관광명품 인증을 받은 녹청자 장고모형은 요즘 해남의 유명한 관광상품이 되었다. 98년엔 그의 녹청자 옻칠 반상기세트가 전국공예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정씨의 열정이 알려지면서 녹청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특히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녹청자를 선호한다고 한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나의 녹청자 다기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도자기 색이기 때문입니다.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녹차를 녹청자에 담아 놓으면 정갈하고 깔끔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정씨는 오는 8월 경기도의 세계 도자기 엑스포에서 독자적인 부스를 마련해 녹청자를 소개할 계획이다.

    정씨가 내놓는 녹청자 제품들은 매우 잘 팔리는 편이다. 그러나 정씨는 상품판매는 어디까지나 녹청자 재현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수요에 맞춰 생산량을 늘리는 일은 없다. 녹청자가 정씨에게 안겨주는 수입은 월 200만원을 항상 밑돈다. “한 유통업체에서 수백 점의 녹청자를 대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한이 충분하지 못했다. 양을 맞추기 위해 질을 희생시킬 수 없어 거절했다.”

    녹청자의 명맥을 잇는 일은 정씨가 해남에 살았던 먼 조상, 가깝게는 그의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이 일이 나 이후에도 계속 되었으면 한다. 다행히 나를 도와주는 후배들도 있고, 고등학생인 아들도 아직은 녹청자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웃어보였다.





    사람과 삶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