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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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전 신체검사는 부당한 취업차별”

사소한 질환자 과학적 근거없이 고용 배제… ‘불건강자’ 색출 도구로 악용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입력2005-02-25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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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용 전 신체검사는 부당한 취업차별”
    최근 국내 대기업 A사에 입사원서를 제출한 미국인 K씨(29)는 회사측이 면접도 하기 전에 신체검사를 요구하자 무척 당황했다. 미국에서는 기업이 입사 희망자의 채용 확정 이전에 건강검진을 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며 항의를 해봤지만 회사측은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일관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진풍경’에 접한 그는 국내 다른 회사를 알아보았지만 상황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각 기업들의 항변처럼 국내법은 과연 채용 전 건강검진을 허용하는 걸까. 근로자 건강검진의 종류를 규정한 산업안전보건법은 ‘채용시 건강검진’을 ‘채용 전’(pre-employment)이 아닌 ‘배치 전’(pre-placement) 건강검진으로 못박고 있다. 신규 채용 근로자의 건강 기초자료 확보와 배치 대상부서의 적성 여부, 동료들에게 끼치는 영향 등을 종합평가하기 위해 작업 부서 배치 전에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 즉 ‘건강상의 이유’가 근로자 채용 여부의 판단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채용 전 신체검사로 관행화한 국내 기업의 ‘채용시 건강검진’은 정확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근로자의 고용기회를 박탈하는 도구로 전락한 게 현실이다. 일반인들과 건강검진 병원조차 이를 취업의 당락을 결정하는 통과 절차로 여기며, 오히려 입사 전에 신체검사를 하지 않는 회사를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이 때문에 실제로 많은 질환자와 장애인이 나름의 적합한 업무가 있는데도, 신체검사 결과만으로 고용기회를 잃고 있다.

    “공무원과 선원은 법에서 따로 검사 기준을 정하고 있지만 여타 기업은 법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자기네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래서 진단서를 쓰기가 겁나고 윤리적 회의까지 느껴집니다.” 울산대 의대 산업의학과 김양호 교수는 기업들의 채용시 건강검진이 ‘좀더 건강한 사람’을 걸러내기 위한 일종의 선별장치로 악용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전염력이 없거나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질환을 앓고 있는데도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배제되었다는 것. 심지어 질환을 앓은 흔적이 남는 매독의 경우 완치가 된 이후에도 성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경우까지 있다.

    “채용 전 신체검사는 부당한 취업차별”
    서울 B대학병원 건강센터 이모교수의 최근 경험담은 잘못된 채용시 건강검진의 심각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청력 검사결과 가는귀가 먹어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들을 정도의 사람이었는데 울면서 정상역(장애등급)의 판정을 내달라고 애원하는 겁니다. 그것도 돈봉투까지 준비하고 와서 말입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C회사의 생산직 사원 시험에 응시한 김모씨(26)가 이교수를 찾은 시점은 올 1월. 그는 이미 세 군데 회사에서 난청이라는 이유 때문에 취업에 고배를 마신 뒤였다.



    “정상 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다만 일반인들도 잘 들을 수 없는 고주파수대 난청이라는 소견이 보였는데, 회사에서 요구하니 검사결과를 적지 않을 수는 없고…” 이교수는 ‘직장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써 보냈지만 그는 이번에도 낙방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회사는 이에 대해 면접 성적이 나빠 떨어진 것일 뿐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김씨는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채용 전 신체검사가 없는 영세업체에 취직했다.

    채용 전 신체검사의 가장 큰 맹점은 기업 인사담당자의 의학적 무지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 의사의 진단서를 자신의 짧은 의학적 소견으로 해석해 멀쩡한 사람에게서 취업의 기회를 박탈하는 ‘만행’(蠻行)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

    “신체검사 전날까지도 테니스를 치고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척추에 이상이 있어 채용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지난 3월 국내 굴지의 조선업체에 지원한 이모씨(27)는 최근 회사측에서 자신의 불합격과 관련한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X-RAY 사진상에 ‘척추 분리증’ 소견이 보인다는 것. 즉각 자신이 건강검진을 받은 병원으로 찾아간 이씨는 의사에게서 “X-RAY상에서 척추분리증의 소견이 보인다 해도 이것이 곧 디스크나 요통을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고, 다만 척추의 형상이 그렇다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즉 방사선 사진상에 이상이 있다 해도 이것이 곧 질병으로 이어질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는 게 의사의 해명이었다. 담당 의사는 즉시 회사에 전화를 걸고, 소견서까지 다시 적어 줬지만 회사는 ‘입사불가’라는 종래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인하대 의대 산업의학과 임종환 교수는 “의사의 소견을 채용에 반영하는 기업은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라며 “정상적인 직장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질환에 대한 소견을 쓸 때는 가슴이 저린다”고 기업들의 잘못된 채용 전 신체검사 관행을 개탄했다.

    고혈압 때문에 번번이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이모씨(34)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리 검사를 선택한 경우. 현재도 대기업의 경리파트에 근무하는 그는 채용 전 신체검사의 허구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채용 때 불합격 판정의 기준이 되는 질환들이 채용 후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회사 동료 중에 고혈압 환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허리가 아프거나, 심지어 폐결핵에 걸린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취업 후 6년이 지났지만 병원과 사회를 속인 행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채용 전 건강검진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자신이 현재 회사에 불이익을 끼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채용 전 신체검사를 통한 기업의 부당한 취업 차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노동부 산업보건 환경과 이상준 사무관은 현재로서는 이를 차단할 법적 방지 장치가 없다고 답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도 건강검진의 개념과 종류만 규정하고 있을 뿐, 편법으로 이루어지는 채용 전 신체검사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고, 고용정책 기본법에도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한 고용상의 불이익을 받지 못한다’라고만 규정한 채, 건강문제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채용 전 신체검사 관행에 대해 고용주가 채용 근로자의 기초자료 확보차원이라고 변명하고 있는데다, 같은 성적과 조건의 사람이라면 좀더 건강한 사람을 뽑겠다는 기업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이는 노동관련법보다는 장애인 관련법에서 접근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미국의 경우도 장애인법(ADA)을 통해 모든 형태의 채용 전 건강검진을 불허하고 있으며 처벌조항도 이 법에 함께 규정하고 있다(단 소방 및 경찰 업무종사자 등 특수직 제외).

    “미국도 60년대까지 채용시 건강진단을 ‘불건강자’를 색출해 고용을 막는 수단으로 운용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 법의 정비를 통해 장애인법이 지난 92년 완성된 후에야 배치 전 건강진단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울산대 의대 산업의학과 김양호 교수는 채용 전 신체검사를 철폐한다 해도 취업 차별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질환자와 장애인들이 자신의 업무능력에 맞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치 전 건강검진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기업도 비용 손실 없이 인력 활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채용 전 신체검사를 관행적으로 실시하는 산업의학과 의사로서 우리의 왜곡된 진료행태에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B형 간염 보균자들의 취업차별 철폐투쟁을 통해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의 잘못된 관행에 종지부를 찍은 한 내과의사의 쾌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지난 2월18일 직업-환경의학 외래협의회 워크숍에 참가한 어느 산업의학과 전문의의 ‘양심 고백’은 땅바닥에 떨어진 우리의 기업윤리와 인권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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