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학위 지도교수로 모시겠다며 도장찍는 순간 노예계약을 맺는 것이고, 박사는 종신노예계약인 셈이죠.”“대학원에서는 두 가지 불문율이 있어요. 첫째, 석사와 박사를 다른 대학에서 하면 안 된다. 그런 친구들은 영원히 찬밥신세를 면키 어렵죠. 둘째, 석사 지도교수와 박사 지도교수가 다르면 안 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학생은 끝까지 교수들의 눈총을 받아야 합니다.”
“교수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아시죠? 정답은 조교에게 시킨다. 요즘은 딸 낳으면 반드시 교수 시키라는 말을 해요. 집안 경조사 뒷바라지를 다 조교들이 해주니까 고생이 적잖아요. 특히 남자조교는 애 낳는 일 빼놓고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죠.”
2001년 1월 마지막 날 늦은 밤, 세 명의 대학원생들과 ‘이 땅에서 대학원생으로 살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분노에서 자조로 바뀌었다. 그들은 대학원 사회에 오래 전부터 퍼져 있는 ‘노예담론’이 개혁의 의지마저 앗아가 버렸다고 개탄했다. 무엇이 패기만만한 젊은 연구자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을까.
“대학원의 기능은 지식의 창조, 지식의 응용, 지식의 분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원의 실상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것 하나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 사무총장이 내린 한국 대학원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이사무총장은 “지금 대학원은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학원 교육 특유의 문제까지 겹쳐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원을 이처럼 병들게 한 원인은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까. 교육전문가들은 80년대 이후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대학원의 급격한 양적 팽창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원생은 1949년 국립서울대에서 배출된 석사 90명이었다. 이후 고려대와 연세대에 석사과정이 설치되면서 대부분의 대학들이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 1965년에는 대학원 37개, 학생수 3842명에 불과했으나 10년 뒤인 1975년에는 82개 1만3879명으로 늘었고, 85년에는 201개 6만9946명, 95년 421개 11만2728명, 2000년 829개 22만9437명 등 10년 주기로 대학원과 재학생 수가 거의 두 배씩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문민정부 시절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등장한 ‘대학원중심대학’(95년)과 국민의 정부가 의욕적으로 밀어붙인 ‘두뇌한국21’(BK21)은 많은 대학들을 ‘연구중심대학’의 환상에 빠지게 했고 대학원의 팽창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문제는 다른 대학에 뒤질세라 증원-증설에 나선 대학들이 대학원의 목적 및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인의 재교육을 위해 설립된 전문대학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구요원이나 교수요원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일반대학원은 철저한 정원관리와 질 관리가 필수적이지만 대학은 이를 외면했다. 오히려 대학원 입시에서 서류와 면접에 의한 무시험 전형의 확대를 계기로 자격검증 없이 들어온 학생들이 대학원의 질 저하를 부채질했다.
“뽑혀서는 안 될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연구에 뜻이 없으니 적당히 공부하다 빨리 졸업하면 그만이고 학교로서는 대학원을 유지하고 교수들에게 월급 주려면 그들이 낸 등록금이 필요할 테고….”(어느 대학교수의 자조 섞인 푸념)
그래서 요즘 교수들은 입만 열면 “대학원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 석사, 박사는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인데 아직도 가르쳐달라고만 하니 큰일”이라고 개탄한다. 반면 학생들은 “학교가 장삿속으로 대학원생의 숫자만 늘렸지 수업내용은 학부 때나 달라진 게 없다. 교수들은 대학원생을 학부생처럼 취급하고 연구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 사이 양자간 불신의 골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졌다.
무분별한 대학원 증원은 고학력 실업자 양산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박사라도 인문대의 경우 지난해 취업률은 31%에 불과했고 100% 취업률을 자랑하던 공대도 88%로 크게 떨어졌다. 물론 이들의 낮은 취업률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오로지 교수자리만을 목표로 하는 연구자들의 좁은 시야 탓도 크다. 결국 대학원마다 갈 곳 없는 졸업생들이 한 과목의 강의라도 얻으려고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교수들에게 대학원생들은 자발적으로 ‘무언의 충성서약’을 한다. 중앙대 정치학 박사과정의 염정민씨는‘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 번 찍히면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이미 부끄러움이나 비굴함을 망각 속에 묻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 개혁의 사각지대였던 대학원 내부에서 “한국의 대학원은 썩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 바로 대학원생들에 의한 대학원생들의 무크지 ‘모색’팀이다. 편집장 권경우씨(중앙대 영문학 석사)를 중심으로 염정민 박영은 김성희 이상용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가세해 지난 1월 ‘모색’ 첫 호를 발간했다. 첫 호에서 다룬 특집 ‘새로운 학문을 위한 권리선언’은 800여 개에 달하는 한국 대학원의 암울한 실상을 솔직하게 드러내 대학가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오창은씨(중앙대 국문학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에게 미래는 있는가’라는 글은 투명하지 않은 대학원 입시제도부터, ‘교육’도 아니고 ‘연구’도 아닌 어정쩡한 대학원 교육의 문제점을 사례중심으로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지도교수와의 충돌 끝에 석사과정 도중에 대학원을 포기해야 했던 P씨, 대학원 박사과정 면접에서 “집에서 자네의 공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나?”라는 질문에 난감했던 W씨, 나이 지긋한 교수들이 전담하는 대학원 강의에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나 토론과 논쟁을 통한 치열한 쟁점의 모색이 사라졌다고 지적한 H씨…. 사실 이것은 굳이 P씨 W씨 H씨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학원에 몸담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씨의 글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가 지적된 사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내부의 문제를 발설해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이 누구인지 색출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인 오씨를 비롯, 취재원들이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오씨의 글에도 나와 있듯 ‘그동안 대학원생들이 불만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모색’의 출발에 힘을 실어준 ‘이명원 사태’도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난해 10월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이명원씨(문학평론가)가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라는 글에서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표절문제를 거론하면서 시작된 ‘김윤식-이명원 논쟁’은, 한국학계에 팽배한 ‘사제카르텔’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이씨는 대학원을 자퇴해야 했다.
그는 ‘말’지 1월호에 기고한 ‘자퇴결의서’에서 “진정한 학적 토대라는 것이 대학에서의 학위취득과는 사실상 무관한 것이며, 해당 대학이 오히려 연구자의 학적 토대를 침해한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라는 말과 함께 지난 3개월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색’팀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대학원 논문심사 때 공공연하게 오가는 ‘거마비’문제를 터뜨렸다. 권경우 편집장은 “모든 대학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5명의 교수가 심사할 경우 교수 1인당 20만원씩만 넣어도 한 번에 100만원, 세 차례면 300만원이 된다. 마지막 심사 때는 식사나 술자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하면 박사논문심사에 논문 제작비를 포함해 800만~1000만원 정도의 돈이 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박사과정의 한 대학원생도 “오전심사인지 오후심사인지에 따라 비용이 큰 차이가 난다”면서 “오후심사는 호텔에서의 저녁식사와 술자리가 기본이고 호텔방까지 잡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을 누가 내겠느냐”고 되물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는 현재 이 문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중이다. 또 거마비 논쟁은 다시 거마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 예를 들어 선후배간에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논문대리작성이나, 프로젝트한다고 학생들에게 쥐꼬리만한 월급 주고 나머지는 착복하는 양심 없는 교수, 심지어 자신의 연구를 위해 똑똑한 학생의 졸업을 지연시키는 교수들까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대학원 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오씨의 표현대로 ‘오작동 중인 시한폭탄’처럼 폭발 일보직전까지 간 한국의 대학원들이 학교 안팎으로부터의 개혁요구에 밀려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가 각종 평가결과에 따른 정원 증원 및 차등 지원을 내걸고 있는 데다, 대학교육협의회도 올해부터 학부와는 별도로 본격적인 대학원 평가를 시작할 계획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학원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진원지는 평가의 잣대가 아니라, 대학원의 미래가 허상임을 깨닫고 떠나가는 연구자들에게 있다.
“유능하다고 알려진 한 여자선배가 지도교수 집에 가서 애 봐주고 설거지까지 하면서 학위를 땄어요. 시간강사 경력도 꽤 됐고 학과 내부에서는 이제 전임자리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교수가 ‘여자가 시간강사면 됐지’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 뒤로 저는 학교에 남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젠 하고 싶은 공부를 합니다.”(모대학 국문과 박사과정 K씨).
후학이 없는 대학원에서 명문대의 이름과 교수의 권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으로는 대학원에서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어줄 조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교수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아시죠? 정답은 조교에게 시킨다. 요즘은 딸 낳으면 반드시 교수 시키라는 말을 해요. 집안 경조사 뒷바라지를 다 조교들이 해주니까 고생이 적잖아요. 특히 남자조교는 애 낳는 일 빼놓고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죠.”
2001년 1월 마지막 날 늦은 밤, 세 명의 대학원생들과 ‘이 땅에서 대학원생으로 살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분노에서 자조로 바뀌었다. 그들은 대학원 사회에 오래 전부터 퍼져 있는 ‘노예담론’이 개혁의 의지마저 앗아가 버렸다고 개탄했다. 무엇이 패기만만한 젊은 연구자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을까.
“대학원의 기능은 지식의 창조, 지식의 응용, 지식의 분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원의 실상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것 하나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 사무총장이 내린 한국 대학원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이사무총장은 “지금 대학원은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학원 교육 특유의 문제까지 겹쳐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원을 이처럼 병들게 한 원인은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까. 교육전문가들은 80년대 이후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대학원의 급격한 양적 팽창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원생은 1949년 국립서울대에서 배출된 석사 90명이었다. 이후 고려대와 연세대에 석사과정이 설치되면서 대부분의 대학들이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 1965년에는 대학원 37개, 학생수 3842명에 불과했으나 10년 뒤인 1975년에는 82개 1만3879명으로 늘었고, 85년에는 201개 6만9946명, 95년 421개 11만2728명, 2000년 829개 22만9437명 등 10년 주기로 대학원과 재학생 수가 거의 두 배씩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문민정부 시절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등장한 ‘대학원중심대학’(95년)과 국민의 정부가 의욕적으로 밀어붙인 ‘두뇌한국21’(BK21)은 많은 대학들을 ‘연구중심대학’의 환상에 빠지게 했고 대학원의 팽창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문제는 다른 대학에 뒤질세라 증원-증설에 나선 대학들이 대학원의 목적 및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인의 재교육을 위해 설립된 전문대학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구요원이나 교수요원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일반대학원은 철저한 정원관리와 질 관리가 필수적이지만 대학은 이를 외면했다. 오히려 대학원 입시에서 서류와 면접에 의한 무시험 전형의 확대를 계기로 자격검증 없이 들어온 학생들이 대학원의 질 저하를 부채질했다.
“뽑혀서는 안 될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연구에 뜻이 없으니 적당히 공부하다 빨리 졸업하면 그만이고 학교로서는 대학원을 유지하고 교수들에게 월급 주려면 그들이 낸 등록금이 필요할 테고….”(어느 대학교수의 자조 섞인 푸념)
그래서 요즘 교수들은 입만 열면 “대학원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 석사, 박사는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인데 아직도 가르쳐달라고만 하니 큰일”이라고 개탄한다. 반면 학생들은 “학교가 장삿속으로 대학원생의 숫자만 늘렸지 수업내용은 학부 때나 달라진 게 없다. 교수들은 대학원생을 학부생처럼 취급하고 연구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 사이 양자간 불신의 골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졌다.
무분별한 대학원 증원은 고학력 실업자 양산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박사라도 인문대의 경우 지난해 취업률은 31%에 불과했고 100% 취업률을 자랑하던 공대도 88%로 크게 떨어졌다. 물론 이들의 낮은 취업률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오로지 교수자리만을 목표로 하는 연구자들의 좁은 시야 탓도 크다. 결국 대학원마다 갈 곳 없는 졸업생들이 한 과목의 강의라도 얻으려고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교수들에게 대학원생들은 자발적으로 ‘무언의 충성서약’을 한다. 중앙대 정치학 박사과정의 염정민씨는‘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 번 찍히면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이미 부끄러움이나 비굴함을 망각 속에 묻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 개혁의 사각지대였던 대학원 내부에서 “한국의 대학원은 썩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 바로 대학원생들에 의한 대학원생들의 무크지 ‘모색’팀이다. 편집장 권경우씨(중앙대 영문학 석사)를 중심으로 염정민 박영은 김성희 이상용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가세해 지난 1월 ‘모색’ 첫 호를 발간했다. 첫 호에서 다룬 특집 ‘새로운 학문을 위한 권리선언’은 800여 개에 달하는 한국 대학원의 암울한 실상을 솔직하게 드러내 대학가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오창은씨(중앙대 국문학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에게 미래는 있는가’라는 글은 투명하지 않은 대학원 입시제도부터, ‘교육’도 아니고 ‘연구’도 아닌 어정쩡한 대학원 교육의 문제점을 사례중심으로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지도교수와의 충돌 끝에 석사과정 도중에 대학원을 포기해야 했던 P씨, 대학원 박사과정 면접에서 “집에서 자네의 공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나?”라는 질문에 난감했던 W씨, 나이 지긋한 교수들이 전담하는 대학원 강의에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나 토론과 논쟁을 통한 치열한 쟁점의 모색이 사라졌다고 지적한 H씨…. 사실 이것은 굳이 P씨 W씨 H씨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학원에 몸담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씨의 글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가 지적된 사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내부의 문제를 발설해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이 누구인지 색출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인 오씨를 비롯, 취재원들이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오씨의 글에도 나와 있듯 ‘그동안 대학원생들이 불만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모색’의 출발에 힘을 실어준 ‘이명원 사태’도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난해 10월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이명원씨(문학평론가)가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라는 글에서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표절문제를 거론하면서 시작된 ‘김윤식-이명원 논쟁’은, 한국학계에 팽배한 ‘사제카르텔’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이씨는 대학원을 자퇴해야 했다.
그는 ‘말’지 1월호에 기고한 ‘자퇴결의서’에서 “진정한 학적 토대라는 것이 대학에서의 학위취득과는 사실상 무관한 것이며, 해당 대학이 오히려 연구자의 학적 토대를 침해한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라는 말과 함께 지난 3개월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색’팀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대학원 논문심사 때 공공연하게 오가는 ‘거마비’문제를 터뜨렸다. 권경우 편집장은 “모든 대학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5명의 교수가 심사할 경우 교수 1인당 20만원씩만 넣어도 한 번에 100만원, 세 차례면 300만원이 된다. 마지막 심사 때는 식사나 술자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하면 박사논문심사에 논문 제작비를 포함해 800만~1000만원 정도의 돈이 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박사과정의 한 대학원생도 “오전심사인지 오후심사인지에 따라 비용이 큰 차이가 난다”면서 “오후심사는 호텔에서의 저녁식사와 술자리가 기본이고 호텔방까지 잡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을 누가 내겠느냐”고 되물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는 현재 이 문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중이다. 또 거마비 논쟁은 다시 거마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 예를 들어 선후배간에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논문대리작성이나, 프로젝트한다고 학생들에게 쥐꼬리만한 월급 주고 나머지는 착복하는 양심 없는 교수, 심지어 자신의 연구를 위해 똑똑한 학생의 졸업을 지연시키는 교수들까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대학원 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오씨의 표현대로 ‘오작동 중인 시한폭탄’처럼 폭발 일보직전까지 간 한국의 대학원들이 학교 안팎으로부터의 개혁요구에 밀려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가 각종 평가결과에 따른 정원 증원 및 차등 지원을 내걸고 있는 데다, 대학교육협의회도 올해부터 학부와는 별도로 본격적인 대학원 평가를 시작할 계획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학원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진원지는 평가의 잣대가 아니라, 대학원의 미래가 허상임을 깨닫고 떠나가는 연구자들에게 있다.
“유능하다고 알려진 한 여자선배가 지도교수 집에 가서 애 봐주고 설거지까지 하면서 학위를 땄어요. 시간강사 경력도 꽤 됐고 학과 내부에서는 이제 전임자리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교수가 ‘여자가 시간강사면 됐지’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 뒤로 저는 학교에 남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젠 하고 싶은 공부를 합니다.”(모대학 국문과 박사과정 K씨).
후학이 없는 대학원에서 명문대의 이름과 교수의 권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으로는 대학원에서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어줄 조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