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잎꽃 향기 남겨놓고 떠나가는 뒤안길에 물결 소리만∼.’ 을숙도 갈대 숲을 돌아보던 그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인가 싶어 물어보니 그의 자작곡이라 했다. 제목은 ‘을숙도’. 그가 직접 글을 쓰고 곡을 붙였다. 83년 낙동강 하구 둑 건설에 반대하며 이곳에서 시위를 벌일 때 이 노래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기타를 부쉈다. 다시는 낙동강을 노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강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던 그는 그 후 투사가 되어 낙동강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강과 더불어 살아왔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다시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얼굴에서 언뜻 ‘희망’이라는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하구언이 만들어지고 분뇨매립장에 이어 쓰레기 압축매립장까지 들어서면서 혼비백산 쫓겨갔던 철새떼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날아들고 있고, 뿌리째 동강나 강물에 둥둥 떠내려갔던 을숙도의 갈대밭이 부분적으로나마 복원되고 있는 이곳의 풍경에서도 ‘희망’은 가까워보였다.
낙동강공동체 대표 김상화씨(51)는 을숙도 복원운동을 포함한 낙동강 살리기 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낙동강 지킴이’다.
“천연기념물 179호로 지정된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절단이 났지요. 전봇대보다 몇 배나 큰 쇳덩이가 쾅쾅 박히고 함부로 파헤쳐진 이곳에서 강은 피울음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중장비 기계의 퉁탕거림 속에서 그는 강이 우는 소리를 들었고, 틈날 때마다 그 아픈 자리에 다가가 함께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누렇게 바랜 가래를 뱉으며 끙끙대는 강의 아픔은 곧 그의 아픔이 됐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상처받은 강의 생명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 지난 30년 간 그를 끌고 온 유일한 신념이었다.
70년대 초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김씨는 낙동강 하구에 있는 을숙도를 자주 찾았다. 나루터 막걸리집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을숙도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살면서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낙동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했다. 철새들의 날갯짓에 힘이 없고 강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던 것.
76년 낙동강문화연구소를 발족해 낙동강 작곡발표회 등을 열었던 그는 78년부터 낙동강이 중병을 앓고 있음을 경고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낙동강 발원지 태백에서 ‘종착역’인 을숙도까지 붙이고 다녔다. 당시에는 환경운동의 개념조차 없던 때였다. ‘미친 놈’ 소리를 숱하게 들어가며 낙동강 유역을 답사하고, 지역 주민들을 만나 ‘낙동강 보호’를 호소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목발을 짚고 도보 답사에 나섰다. 5공 시절에는 하구둑 건설 반대 시위 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집 겸 사무실을 열일곱번이나 쫓겨다니면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었던 그를 두고 사람들은 ‘인간 승리’ 라고 했다.
수백 회의 기획 캠페인, 낙동강 노래 모음 테이프 제작, 사진전 등을 통해 낙동강 문제를 알리고 정부에 개발정책의 잘못을 지적해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등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강과 함께 흘러갔다. 강을 훼손하는 행위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환경감시자 역할을 했고, 생태 파괴의 현장에서는 온몸을 던져 막으려고 애썼다. 낙동강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낙동강생명찾기 백서’를 제작해 학교와 관련기관에 보급했던 97년, 철인 같던 그도 덜컥 병을 얻고 말았다.
“책을 완성하고 바로 대전에 가서 금강에 관한 강의를 하기로 돼 있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가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의사가 ‘이러다 큰일난다’고 하더군요. 혈변을 보면서도 그걸 몰랐어요.”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한 말은 “낙동강에 가야 하는데 왜 모두 여기 있느냐”였다. 그 때 얘기를 하며 김씨는 “낙동강이 내 천생배필인가봐”하고 웃는다.
문화운동과 환경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던 조직은 95년 ‘낙동강공동체’로 이름을 바꾸고 ‘공동체 생명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낙동강공동체는 여러 단체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활공동체를 지향한다. 여기엔 회원도 없고 회비도 없다. 철저하게 자발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따로 ‘재정’이라 할 것도 없다. 그저 뜻있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으고 품을 팔아 조직을 운영해간다.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김씨의 원칙이다.
최근 낙동강공동체는 ‘낙동강 생명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부산과 대구 등 영남지역 환경단체들과 손잡고 태백에서 낙동강 하구까지를 순례하 며 버드나무 3900그루를 심었다. 앞으로 2003년까지 모두 13만 그루 의 버드나무를 심을 계획인데, 13만이라는 숫자는 낙동강 1300리에 1300만명이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영남지역 대학생들과 김씨가 ‘늙은 청년’이라 부르는 교수, 지인들도 동참했다.
“버들은 강의 친구예요. 강이 싫어하는 오염물질을 빨아들여 정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인간이 24시간 강을 돌볼 수 없으니 친구를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이 작은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의 터전인 낙동강에 생기와 순리가 되찾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낙동강 살리기’ 신념
나무심기가 한창이던 중에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집이 철거된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풀과 야생초를 이용해 차나 음식을 만드는 ‘자연음식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씨의 부인은 수녀회에서 제공한 산에 비닐하우스를 지었고, 이곳이 공장 겸 이들의 살림집이었다. 놀라고 서러웠을 아내를 달래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당장 살 곳을 알아보고 이사를 하는 것도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었다.
강과 함께 떠돌아다닌 그에게 가정생활이 평탄했을 리 없다. 78년 결혼을 했지만 몇 년 만에 헤어진 그는 88년까지 혼자 살았다. 늘 강에 붙어 살다시피 하는 그를 좋아할 여자는 없었다. 나중에는 지인들 사이에서 ‘김상화 결혼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고,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당시 요리학원 원장을 하고 있던 그녀는 특이하게도 김씨를 ‘전적으로 이해했다’. “보통 여자 같으면 벌써 손들고 나갔을 것”이라는 게 김씨의 말.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술자리가 잦은 그에게 잔소리를 하는 법도 없다. “낙동강이 아프니까 당신이 아픈 것도 당연하다”고 하면서 “김상화가 낙동강의 거름이면, 김상화의 거름은 바로 나”라고 에둘러 원망을 표시할 뿐이다.
김씨에겐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있다. 한 달에 며칠밖에 집에 없지만 TV나 신문에 자주 나오는 아빠를 보고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이해하는 눈치다.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는 돈은 못 벌어도 우리가 마시는 물을 맑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늘어놓고, 함부로 물을 쓰는 친구들을 야단치는 걸 보면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다.
김씨는 낙동강의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본다고 했다. ‘낙동강 생명찾기 운동’의 주체도 서울, 대구, 부산, 안동지역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을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대학생들과 함께 한 저녁자리에서 김씨는 선생님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 같았다. 술 한잔 걸치고 돌아가면서 노래까지 한 곡씩 뽑았던 이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모든 사람을 유쾌하게 했다.
“강하고 하늘하고 누가누가 더 푸른가…내기해 보자…나무를 심어줄게…강아, 강아 이겨라 좀 더 파래라…”
강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던 그는 그 후 투사가 되어 낙동강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강과 더불어 살아왔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다시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얼굴에서 언뜻 ‘희망’이라는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하구언이 만들어지고 분뇨매립장에 이어 쓰레기 압축매립장까지 들어서면서 혼비백산 쫓겨갔던 철새떼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날아들고 있고, 뿌리째 동강나 강물에 둥둥 떠내려갔던 을숙도의 갈대밭이 부분적으로나마 복원되고 있는 이곳의 풍경에서도 ‘희망’은 가까워보였다.
낙동강공동체 대표 김상화씨(51)는 을숙도 복원운동을 포함한 낙동강 살리기 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낙동강 지킴이’다.
“천연기념물 179호로 지정된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절단이 났지요. 전봇대보다 몇 배나 큰 쇳덩이가 쾅쾅 박히고 함부로 파헤쳐진 이곳에서 강은 피울음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중장비 기계의 퉁탕거림 속에서 그는 강이 우는 소리를 들었고, 틈날 때마다 그 아픈 자리에 다가가 함께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누렇게 바랜 가래를 뱉으며 끙끙대는 강의 아픔은 곧 그의 아픔이 됐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상처받은 강의 생명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 지난 30년 간 그를 끌고 온 유일한 신념이었다.
70년대 초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김씨는 낙동강 하구에 있는 을숙도를 자주 찾았다. 나루터 막걸리집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을숙도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살면서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낙동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했다. 철새들의 날갯짓에 힘이 없고 강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던 것.
76년 낙동강문화연구소를 발족해 낙동강 작곡발표회 등을 열었던 그는 78년부터 낙동강이 중병을 앓고 있음을 경고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낙동강 발원지 태백에서 ‘종착역’인 을숙도까지 붙이고 다녔다. 당시에는 환경운동의 개념조차 없던 때였다. ‘미친 놈’ 소리를 숱하게 들어가며 낙동강 유역을 답사하고, 지역 주민들을 만나 ‘낙동강 보호’를 호소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목발을 짚고 도보 답사에 나섰다. 5공 시절에는 하구둑 건설 반대 시위 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집 겸 사무실을 열일곱번이나 쫓겨다니면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었던 그를 두고 사람들은 ‘인간 승리’ 라고 했다.
수백 회의 기획 캠페인, 낙동강 노래 모음 테이프 제작, 사진전 등을 통해 낙동강 문제를 알리고 정부에 개발정책의 잘못을 지적해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등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강과 함께 흘러갔다. 강을 훼손하는 행위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환경감시자 역할을 했고, 생태 파괴의 현장에서는 온몸을 던져 막으려고 애썼다. 낙동강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낙동강생명찾기 백서’를 제작해 학교와 관련기관에 보급했던 97년, 철인 같던 그도 덜컥 병을 얻고 말았다.
“책을 완성하고 바로 대전에 가서 금강에 관한 강의를 하기로 돼 있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가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의사가 ‘이러다 큰일난다’고 하더군요. 혈변을 보면서도 그걸 몰랐어요.”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한 말은 “낙동강에 가야 하는데 왜 모두 여기 있느냐”였다. 그 때 얘기를 하며 김씨는 “낙동강이 내 천생배필인가봐”하고 웃는다.
문화운동과 환경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던 조직은 95년 ‘낙동강공동체’로 이름을 바꾸고 ‘공동체 생명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낙동강공동체는 여러 단체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활공동체를 지향한다. 여기엔 회원도 없고 회비도 없다. 철저하게 자발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따로 ‘재정’이라 할 것도 없다. 그저 뜻있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으고 품을 팔아 조직을 운영해간다.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김씨의 원칙이다.
최근 낙동강공동체는 ‘낙동강 생명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부산과 대구 등 영남지역 환경단체들과 손잡고 태백에서 낙동강 하구까지를 순례하 며 버드나무 3900그루를 심었다. 앞으로 2003년까지 모두 13만 그루 의 버드나무를 심을 계획인데, 13만이라는 숫자는 낙동강 1300리에 1300만명이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영남지역 대학생들과 김씨가 ‘늙은 청년’이라 부르는 교수, 지인들도 동참했다.
“버들은 강의 친구예요. 강이 싫어하는 오염물질을 빨아들여 정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인간이 24시간 강을 돌볼 수 없으니 친구를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이 작은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의 터전인 낙동강에 생기와 순리가 되찾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낙동강 살리기’ 신념
나무심기가 한창이던 중에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집이 철거된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풀과 야생초를 이용해 차나 음식을 만드는 ‘자연음식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씨의 부인은 수녀회에서 제공한 산에 비닐하우스를 지었고, 이곳이 공장 겸 이들의 살림집이었다. 놀라고 서러웠을 아내를 달래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당장 살 곳을 알아보고 이사를 하는 것도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었다.
강과 함께 떠돌아다닌 그에게 가정생활이 평탄했을 리 없다. 78년 결혼을 했지만 몇 년 만에 헤어진 그는 88년까지 혼자 살았다. 늘 강에 붙어 살다시피 하는 그를 좋아할 여자는 없었다. 나중에는 지인들 사이에서 ‘김상화 결혼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고,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당시 요리학원 원장을 하고 있던 그녀는 특이하게도 김씨를 ‘전적으로 이해했다’. “보통 여자 같으면 벌써 손들고 나갔을 것”이라는 게 김씨의 말.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술자리가 잦은 그에게 잔소리를 하는 법도 없다. “낙동강이 아프니까 당신이 아픈 것도 당연하다”고 하면서 “김상화가 낙동강의 거름이면, 김상화의 거름은 바로 나”라고 에둘러 원망을 표시할 뿐이다.
김씨에겐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있다. 한 달에 며칠밖에 집에 없지만 TV나 신문에 자주 나오는 아빠를 보고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이해하는 눈치다.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는 돈은 못 벌어도 우리가 마시는 물을 맑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늘어놓고, 함부로 물을 쓰는 친구들을 야단치는 걸 보면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다.
김씨는 낙동강의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본다고 했다. ‘낙동강 생명찾기 운동’의 주체도 서울, 대구, 부산, 안동지역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을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대학생들과 함께 한 저녁자리에서 김씨는 선생님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 같았다. 술 한잔 걸치고 돌아가면서 노래까지 한 곡씩 뽑았던 이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모든 사람을 유쾌하게 했다.
“강하고 하늘하고 누가누가 더 푸른가…내기해 보자…나무를 심어줄게…강아, 강아 이겨라 좀 더 파래라…”